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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엑스맨: 퍼스트 클래스>에 대한 코멘트

이하 카톡 복붙


걍 뻘글인데 쓰고 싶어져서 썼고, 아무도 읽을 사람이 없다는 것은 슬픈 일이라 한번 남겨봅니다.

 

일단 이 글을 쓰게 된 의식의 흐름은 다음과 같습니다. 최근 슈미트에 대한 연구서를 하나 보고 있는데, 이 연구서는 슈미트 사상의 원천을 국제 관계에서 찾고 있습니다. 당시 국제 관계의 양상과, (이에 대한 동물적인 개입이 아닌) 사상적 개입으로서 슈미트의 사상을 읽는 것이지요. 일단 매우 설득력 있는 해석이기도 하고, 이 사람이 제공하는 근거들을 보면, 이미 슈미트 연구에서 통용되는 관점 중 하나인 것으로 보입니다. 이에 대해서도 한번 정리 글을 올릴 것이긴 한데, 정리 글을 생각하면서 19-20세기 외교사를 어케 전달할지 고민하다가, 갑자기 엑스맨 퍼스트클래스가 떠올랐고, 그 영화를 외교사 맥락에 두면 어떤 해석이 나오는지, 이 영화가 무엇을 의도했는지가 나오길래 적게 되었습니다.

 

일단 엑스맨 시리즈에 대한 저의 평은 뭐 이런 것입니다. 어릴 때부터 OCN에서 많이 봐서 매우 애정이 드는 시리즈지만, 영화적으로는 퍼스트클래스를 제외하곤 다 븅신인 것 같다 정도죠. 그만큼 저는 퍼스트클래스를 고평가하고 있었는데,(정확히는 퍼스트클래스만 고평가하고 있었죠) 딱히 이유는 생각해본 적 없습니다. 그런데 이참에 해석을 해보니 실제로도 괜찮은 영화더군요.

 

일단 이 영화에서 나오는 구도가 유비들로 채워져 있다는 것은 너무나도 명백합니다. 인간vs돌연변이는, 미국vs소련으로 유비되고 있죠. 이러한 유비에 덧붙여 이는 각각에 대한 특징 묘사로도 이어집니다. 돌연변이들은 인간으로부터 무시 받고 핍박받고 있습니다. 이와 더불어 그들은 한편으로는 생존을 위해 집착하고 있고, 다른 한편으로는 자신들이 진보한 존재라는 우월 감정에 빠지고 있죠. 이는 소련의 상황을 생각하면 매우 설득력 있는 특징 부여라고 할 수 있습니다. 소련의 외교심성(?)(망딸리떼를 어케 표현할지 모르겠군요)은 “고립감(시즈드)”입니다. 소련은 사회주의 국가로 탄생했습니다. 하지만 그 어느 나라도 소련을 정상 국가로 생각해주진 않았습니다. 이러니 소련의 외교적 현실과 이에 대한 인식은 이런 것이죠. 한편으로는 다른 국가들이 자신들의 안전을 위해 소련을 붕괴시키려고 한다는 것이고, 다른 한편으로는 다른 국가들의 그러한 개입 의지는 봉건->부르주아 자본주의->사회주의로의 이행에 대한 두려움 때문이라는 것이죠. 소련은 그래서 실제로도 고립되었고, 감정적으로도 고립된 상황이었죠.

 

영화에서는 인간과 돌연변이의 대립이, 미국과 소련의 대립으로, 특히 쿠바 미사일 배치 사태라는 하나의 사건으로 표상됩니다. 소련은 자신들의 안전을 지키기 위해서는 미국의 뒷통수에 칼을 배치해야한다고 믿습니다. 미국은 끊임없이 자신들의 존재를 위협하고, 그들의 존재를 부정하는 국가니까요. 그리고 미국은 그러한 소련의 “감정”에 맞대응으로 일관하고 있었죠.

 

영화는 이러한 대립의 후면에 다른 세력이 있음을 그립니다. 쇼로 상징되는 미치광이 집단이 그들의 고립감을 이용해서 상황을 악화시키고, 미국이 이들의 감정을 이해하지 못하게 함으로써 파국으로 치닿게 만들려고 하고 있는 것이죠. 그리고 이러한 갈등은 아무런 생산도 낳지 못하고 멸망으로, 인간 사회의 멸망으로 이어질 것입니다. 이제 돌연변이만 남고 쇼는 돌연변이 제국의 황제가 되는 것이지요.

 

영화는 쇼를 막기 위한 뮤턴트들의 동맹을 그려냅니다. 그리고 찰스를 미국의 편으로 그려냄으로써 한편으로는 미국의 승리를 그려내고 있죠. 만약 이 영화가 찰스의 승리를 그려냈다면 미국 만세를 외치는 굉장히 한심한 영화가 되었겠지만 감독은 그런 선택을 하지 않았죠. 감독은 찰스를 미국에 비유하고, 매그니토를 소련에 비유함으로써 구조를 복잡하게 만듭니다.

 

찰스는 미국을 상징합니다. 그의 능력은 정신을 지배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그의 지배는 마음을 동하게 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는 단지 생각을 훔쳐보고, 행동을 통제합니다. 이는 자유주의의 본질에 대한 감독의 의도를 드러냅니다. 자유주의는 그들의 자유를 규명합니다. 올바른 자유와 그렇지 않은 자유를 미국이 결정하고, 이에 맞춰 다른 국가들을 통제하려고 한다는 것이지요. 미국의, 찰스의 이러한 특징은 미스틱과의 관계에서 극대화됩니다. 미스틱은 찰스에게 있어 매우 각별한 존재이지만, 미스틱은 이러한 관계에서 절망만을 느낍니다. 그녀의 절망은 찰스가 미스틱의 존재를 부정하는 것으로부터 비롯됩니다. 찰스는 그녀를 여동생으로 각별히 여깁니다. 하지만 그녀는 그의 여동생이 아니죠. 그녀는 찰스에게 있어 한명의 성숙한 여자로 인정받고 싶어합니다. 그러나 찰스는 이를 부정하죠. 단순히 그녀를 사랑하지 않는 것을 넘어서, 그녀가 여자라는 것 자체를 인정하려 들지 않습니다. 그녀의 감정 자체를 부정하려고 하죠. 그리고 이러한 부정은 돌연변이로서의 미스틱에게도 그대로 반복되죠. 그는 미스틱의 돌연변이로서의 모습을 보고 싶어하지 않습니다. 그것을 거부하고, 그녀가 돌연변이라는 것을 그가 필요할 때만 이용하고, 그녀의 돌연변이로서의 모습을 직시하려고 하지 않죠. 찰스는 이점에서 매우 이중적입니다. 이러한 그의 태도는 러셀의 뻘짓에 유비될 만하죠. 러셀은 모두를 위한 합리적 학교를 만들었지만, 그곳에 그의 자식은 “모두”일 뿐, 그의 “자식”은 아니었고, 자식은 이에 절망해서 아버지와 원수가 되죠. 그는 자식을 자식으로서 보지 않으려 함으로써 그의 자식을 정말에 빠뜨렸습니다. 마찬가지로 찰스는 미스틱을 (그저 사실일 뿐인, 여자, 돌연변이) 있는 그대로 보지 않고, 한편으로는 각별히 여기고, 다른 한편으로는 통제하려고만 합니다.

 

매그니토는 찰스의 능력과 반대의 능력이죠. 강철로 상징되는 무력을 그는 통제합니다. 그는 정신적으로는 매우 취약하죠. 그는 무력만을 가집니다. 하지만 그는 바로 그러한 특징에서 다른 이들을 정신적으로 통제하려고 하지 않습니다. 그들의 욕망을 있는 그대로 표출하라고 말하죠. 물론 그가 말하는 표출은, 그들의 욕망을 부정하는 이들을 적대시함으로써 드러나는 것이라 항상 충돌을 만들지만요. 무튼 그는 무력만을 통제할 뿐 정신은 통제하지 않습니다.

 

이러한 유비를 염두에 두고 그들의 관계에서의 예외상태(요 표현은 체계 심리학에서 가져온 것입니다. 슈미트의 것이 아니에요)를 파악할 필요가 있습니다. 바로 그들이 갈등하지 않고 조화를 이루던 상황을 말이죠. 찰스는 미스틱의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부정합니다. 하지만 그들은 첫 만남에서 그렇지 않았죠. 도망치는 신세였던 미스틱은 찰스의 집에 침두해서 먹을 것을 훔쳐 먹고 있었죠. 그러다가 찰스가 나타나서 그녀를 발견합니다. 물론 미스틱은 찰스의 엄마로 변신해서 찰스를 속이려하죠. 하지만 찰스는 그녀가 엄마가 아닌 것을 알아차립니다.(그는 이런 쪽에서는 이길 수 없는 능력자죠) 여기서 중요한 것은 찰스의 반응입니다. 그는 화를 내지도, 당황하지도 않고, 자연스럽게 그녀가 엄마가 아님을 지적합니다.(가벼운 조크로 말이죠) 그의 이런 계략은 그녀를 잡고 통제하기 위해서 취해진 것이 아닙니다. 그는 정말로 있는 그대로의 그녀의 모습을 요청하며, 자신은 그녀를 해칠 마음이 없다고 말하죠. 그렇게 미스틱은 본모습(그가 이후에 싫어할 바로 그 파란 괴물의 모습)을 보이고, 그들은 남매가 되죠. 여기서 찰스는 그의 통제 능력을 사용하지 않고, 그녀의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인정함으로써 그녀와 조화를 이룹니다.

 

이제 매그니토와 찰스의 관계를 살펴보죠. 이들의 조화는 다시 또 유비를 거칩니다. 쇼라는 미치광이에게 대적하기 위해 둘은 협력합니다. 그들은 쇼가 상징하는, 바로 나치즘입니다. 쇼는 나치였고, 매그니토는 쇼와 나치 잔당을 제거하고 있었던 인물이죠. 물론 이념 때문이 아니라 복수를 위한 것이었지만요. 여기서 찰스는 미국으로 매그니토는 소련으로 유비되고, 상황은 2차 대전으로 돌아가죠. 아실 분은 아시겠지만 2차 대전의 실질적인 싸움은 소련과 제3 제국의 전쟁이었습니다. 사실상 모든 싸움은 둘 사이에서 이루어졌죠. 이런 상황에서 소련이 제3 제국을 꺾기 위해 미국과 동맹한 것은 무슨 의미일까요? 일차적으로는 강력한 적을 꺾기 위한 힘의 결합이었습니다.(미국이 큰 도움이 되진 않았지만요) 하지만 소련이 얻은 것은 단순히 힘이 아니었습니다. 제가 자주 인용하지만 루즈벨트와 스탈린은 서로가 서로를 처음 만났을 때부터 독특한 감정을 느꼈고, 마음이 통한다고 느꼈습니다. 아까도 얘기했지만 소련은 고립감을 느꼈습니다. 국제 세계에서 정상 국가로 인정을 받지 못했고, 모두가 자신들을 위협적인 존재로, 단순히 무력의 문제가 아니라 존재 자체로 위협적인 존재로 느꼈죠.(마치 돌연변이처럼!) 그런 상황에서 미국과의 동맹, 그들과의 협력, 그들의 인정은 소련이 국제무대에 들어갔다는 것을 의미했고, 그들이 더 이상 혼자가 아니라고 느낄 수 있게 했죠. 소련의 연합국 가입은 바로 이것을 의미했습니다. 이러한 관계는 찰스와 매그니토 사이에서도 이루어지죠. 매그니토는 찰스를 믿지 않았습니다. 단지 쇼를 죽이기 위해 일시적으로 협력하고 있을 뿐이었죠. 하지만 찰스는 매그니토에게 그 이상의 존재가 됩니다. 매그니토는 쇼(나치)에게 고통을 받았고, 그에게서 분노를 배웠습니다. 그의 힘의 원천은 분노인 것처럼 여겨졌고. 그는 분노로 인해 각성을 이뤘습니다. 그렇기에 그는 쇼를 죽이기 위해 더욱 분노하려고 했죠. 하지만 이는 효과가 없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찰스는 그의 감정 속에서, 그의 행동을 통제하지 않고, 그의 감정에 동감함으로써 그를 2차 각성하게 만들죠. 그는 그에게 분노의 감정이 아니라, 다른 감정을, 추억을 느끼는 향수를, 연민의 감정을 발견하고 이에 공감합니다. 그렇게 매그니토는 다른 감정을 느끼고, 찰스와 특별한 관계를 이루게 되죠.

 

찰스는 통제 능력이 뛰어나지만, 그의 진정한 능력은 통제에서 비롯되지 않습니다. 그는 감정을 통제하진 못하지만, 감정에 침투하면서 그 감정에 공감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의 진정한 능력은 바로 이 공감 능력이죠. 미스틱도 매그니토도 그들이 찰스와 대립하면서도 찰스에게 특별함을 느끼는 것은, 그들이 찰스와 공감을 느낀 적이 있기 때문이죠. 찰스의 진정한 능력은 역설적이게도 공감입니다. 미스틱과 매그니토는 강한 능력과 함께 강함 정신적 아픔을 가진 존재죠. 이들을 하나로 엮은 “예외상태”는 찰스가 바로 이 공감 능력을 발휘할 때였습니다. 그가 통제할 때가 아니라요. 영화는 찰스의 이러한 능력과, 그의 능력 오용을 보여주죠. 그리고 이는 미국에 그대로 적용됩니다. 미국은, 그리고 영화 속에서 인간은 나쁜 존재가 아닙니다. 또한 사태 해결의 열쇠를 쥐고 있는 것은 그들입니다. 돌연변이가 아니라요. 돌연변이는 문제가 있는 이들이죠. 이들은 그들의 존재를 부정당하고 있습니다. 그렇기에 그들은 존재해서는 안 되는, 존재할 수도 없는 존재인 것이죠. 그들은 이러한 사실에 절망하고 있고, 발악을 하고 있을 뿐입니다. 따라서 이들은 열쇠를 갖고 있지 못합니다. 열쇠를 쥐고 있는 이들은 인간입니다. 하지만 그들은 싸워 이기는 것으로 열쇠를 쥐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들을 포용함으로써, 즉, 그들을 포용함 힘이 있다는 점에서 그들이 열쇠를 쥐고 있는 것이지요. 영화에서 가장 중요한 존재들, 모든 문제의 수호자들, 즉, 인간, 미국, 찰스는 이렇게 연결됩니다. 그들은 정상적인 존재이며, 교양 있는 존재이죠. 그들은 성숙한 존재입니다. 하지만 그들에게 찾아본 타자들, 그들을 포용할 수 있느냐가 문제의 관건이죠. 영화는 바로 이 관건에, 이 능력에 초점을 맞춥니다. 단순히 미국 만세 인간 만세가 아니라 바로 이 능력에 말이죠. 통제가 아니라 공감하는 능력으로서의 자유주의를 주목하면서요.

 

이 영화는 외교사에 대한 이해가 참 괜찮습니다. 교과서적이지만, 잘 알려져 있지 않은 사실들이죠. 그리고 이에 대한 설득을 정상을 규정하는 그들의 양면성을 드러냄으로써 보여주려 합니다. 한편으로는 모든 희망을 짊어진 존재이면서, 동시에 문제를 악화시키는 빌런으로서 말이죠. 그들은 내로남불로 사태를 악화시킵니다. 피해자 코스프레와 가해자 포지션을 끊임없이 왕복하죠. 영화는 이 결점을 드러냄으로써 비판과 설득을 기획한 것으로 보입니다. 그 속에서 폭발하는 공감의 감정이 가진 아름다움과 힘에 무게를 부여하면서 말이죠. 이러한 무게 부여를 영화는 대립들로 이루어진 관계들이 맺는 유비로 역사를 중첩시킴으로써 다양한 배역을 맞겨 보여줍니다. 미국과 소련의 협력이라는 예외상태를 현재에 소환하죠. 찰스와 매그니토의 협력으로 말이죠. 인간과 돌연변이의 협력으로 말이죠. 이러한 소환은 영화적 시간대의 현재입니다. 하지만 영화에서 부수적인 갈등과 조화, 미스틱과 찰스의 관계는 현재에 소환될 수 있죠. 그렇게 이들의 관계는 단순히 미국과 소련의 갈등을 넘어서, 보편적인 것으로 현재에 소환됩니다. 아무리 생각해도 퍼스트 클래스는 괜찮은 영화입니다. 엑스맨 시리즈는, 그 등장에서 이러한 문제의식을 함축했을 겁니다.(코믹스 기준) 그러한 문제의식을 감독은 현재에 반복해닙니다. 이 영화는 생각보다 높은 평가를 못 받고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엑스맨 시리즈 팬들은 이 영화에서 코믹스의 캐릭터들을 븅신으로 만들었다고 욕하곤 합니다. 하지만 이 영화의 진정한 매력은, 단순히 캐릭터를 반복하는 것이 아니라, 바로 그 시리즈의 정신을 반복하는 것에 있죠. 그리고 감독은 분명 이를 탁월하게 해냈습니다. 외교사를 검토하다가 나온 뻘글이지만 이걸 꼭 말하고 싶었습니다. 이 영화가 그려내는 정신은 현재에도 충분히 가치가 있고, 우리가 외교사를 통해 얻는 교훈은 항상 크다는 것을 말이죠. 이 감독의 차기작은 킹스맨의 기원인데(올해 개봉할 예정입니다), 그 영화에서도 이러한 외교사의 교훈을 캐릭터들과 그들이 만들어내는 갈등을 통해 보여줄 것으로 기대됩니다. 개봉하면 같이 보러 갑시다ㅋ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