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하 카톡 인용
<블레이드 러너 2049>는 전작 <블레이드 러너>와 달리 매우 비관적인 작품입니다. 아이러니한 것은 많은 사람들이 <2049>에서 낙관론을 읽어내고, 원작에서 비관론을 읽어내고 있다는 것이죠.(나무위키 기준)
제가 주목하는 것은 각 영화의 거의 마지막에 등장하는 대사입니다. 원작에서 로이 베티는 “시간 속에 나의 기억들(moments)이 사라지고 마는군, 빗속의 눈물처럼 말이야.”라고 말합니다. 반면, <2049>에서 스텔린 박사는 “잠시(moment)만 기다려줘요. 아름답지 않나요?”라고 말합니다. 이러한 대사는 대립쌍을 이룹니다. 또한 이러한 대사가 진행되는 상황도, 비와 눈으로, 액체와 고채로 대비되고 있죠. 두 영화는, 정확히는 <2049>는 여러 모로 대립쌍을 많이 차용합니다. 종이와 나무, 유니콘과 말을 통해 전작과 대립를 만들어내는 것이죠. 많은 사람들이 전작과 다르게 <2049>에서 긍정성을 발견하려고 하는 것은 이러한 대립 구도 때문입니다. 본질이나 실체에 대해 접근하는 소재들과 상징들을 사용하니 가짜와 진짜 문제에 대해 명확히 답을 내리고 있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죠. 하지만 이것은 완전히 반대로 이해되어야만 합니다. 중요한 것은 바로 영화 안과 영화 밖의 대립이거든요.
로이 베티는 죽음을 앞두고 저 말을 꺼냅니다. 그렇다면 저 말은 도대체 왜 얘기되는 걸까요? 베티는 죽음을 앞두고 자신의 죽음이 너무나도 억울해서 저 말을 꺼내고 있습니다. 베티는 데커드를 두 가지 방식으로 조롱합니다. 하나는 데커드가 자신 앞에서 얼마나 무력한 존재인지를 보여줌으로써 조롱하죠. 다른 하나는 자신의 경험의 우월함을 얘기하면서, 데커드가 얼마나 경험적으로 빈약한 존재인지를 지적함으로써 조롱하는 것이죠. 이 두 번째 조롱은 아이러니합니다. 그는 단 4년을 산 존재입니다. 하지만 그는 인간들은 “믿지 못할 것들”을 우주에서 경험했기에 그 어떤 인간보다 경험적으로 우월하다는 것이죠. 베티가 죽음에 대해 갖는 태도는 그렇기에 매우 특별합니다. 그는 자신의 가치를 너무나도 명확하게 느끼기 때문에 죽음을 두려워합니다. 그가 죽음에 대해 갖는 두려움은 역설적이게도 그가 위대한 존재여서입니다. 여기서 그들이 지구에 온 이유를 생각해볼 필요가 있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이 인간이라는 것을 확인 받기 위해서, 지구에서만 특별한 삶이 가능하다고 생각해서 지구로 온 것이 아닙니다. 그들은 단지 신체적 결함을 치료하기 위해 위험을 감수한 것입니다. 그들의 추동력은 자신의 가치에 대한 확신이며, 이는 추가적인 증명을 요구하지 않습니다. 제가 이런 얘기를 꺼내는 이유는 한 가지입니다. <2049>에 등장하는 복제인간들, 그가 얼마나 베티와 다른 존재인지를 보여주고 싶어서이지요.
<2049>의 복제품들은 망상에 빠져있습니다. 베티는 유아기의 “추억” 따위가 없어도 자기 자신이 이미 증명되었다고 생각합니다. 그들은 불안에 빠지지 않았고, 자신들이 만들어진 존재가 아니라 “태어난 존재”라는 환상에 빠져본 적이 없습니다. 베티에게 만들어졌는지 태어났는지 여부는 그렇게 중요하지 않습니다. 바로 자신이 쌓아간 경험, 놀라움이 중요한 것이지요.(그렇기에 그들은 복제인간 테스트를 통과하는지 여부와 상관 없이 자신들을 존중합니다) 하지만 <2049>의 복제품들은 다릅니다. 그들은 풍문으로 들은 복제품의 출산이란 문제에 자신들의 가치를 담보해줄 형이상학적 지위가 달려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들은 그것에 헌신합니다. 전 이 태도의 차이가 정말 크다고 생각합니다. 베티나 그 일당이 자신이 인간임을 증명하려고 죽음을 불사한 것인가요? 베티나 그 일당은 자신이 인감임을 증명할 생각이 전혀 없습니다. 그들은 그런 형이상학적 지위에 목숨을 던질 생각이 전혀 없습니다. 그들이 목숨을 던진 것은 그 자신이 살기 위해서, 자신처럼 가치 있는 동료들을 구하기 위해서였지 “대의”를 위해서였던 것이 아닙니다. 베티 일당은 대의를 생각하지 않습니다. 물론 그들이 반윤리적인 것은 아닙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삶을 위해 많은 인간들을 살해하고, 끔찍한 일을 저질렀지만, 그것들이 정당한 것이라고 생각하진 않습니다. 베티가 자신의 행위들에 대해서 솔직하게 표현합니다. “많은 의문스러운 일을 저질렀다”고요. 그는 자신의 동료의 죽음에 슬퍼하고, 복수의 마음을 품기도 하고, 자신을 도와준 세바스찬을 죽이는 일에 미안함을 느끼기도 하죠. 그는 분명 악인이지만, 감정이 없는 악인이 아닙니다. 그의 윤리적이지만 "대의"를 위한 것은 아닙니다. 그는 불가피하게 살인을 저지르는 것이지, 자신들의 살인이 정당하다고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2049>의 복제품들은 전혀 다르죠. 출산을 직접 목격한 사람, 기적을 눈으로 봤다는 사람마저도, 아니 오히려 바로 그 자신이 목격자란 이유에서 그들은 목숨을 헌신짝 버리듯 버려버립니다. 마치 그 기적에 비하면 자신들의 삶은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요. 이것만큼 <블레이드 러너>와 반대되는 가치관은 없을 것입니다. 오히려 기적을 경험했다면, 바로 그 기적을 기억하는 자신의 목숨만큼 소중한 것도 없다는 것이 베티의 입장일 테니까요. 자신의 목숨을 쉽게 버리는 이들은 남의 목숨도 하찮게 여기게 됩니다. 혁명을 주장하는 복제품 일당들은 데커드를 죽이라고 말합니다. 그가 중요한 인물이었고, 그들에게 소중한 인간이란 것은 중요치 않습니다. 대의가 중요하고, 대의를 위해서는 그런 일을 벌이는 것만큼 중요한 것은 없다는 것이죠. 대의를 위해 죽는 것보다 인간적인 것은 없다는 게 그들의 주장입니다. 과연 그럴까요? 그리고 복제품들의 출산은 정말로 그들을 위한 “혁명”일 수 있을까요?
일단 쉬운 문제부터 풀어보죠. 출산은 그들을 위한 “혁명” 따위가 아닙니다. 월레스는 복제품들의 출산을 가능케 하는 기술을 개발하려고 한다는 점에서 그들과 똑같은 꿈을 가지고 있습니다. 물론 그 목적은 완전히 다르죠. 그런데 그들이 정말로 다를까요? 월레스 입장에서 복제품들이 스스로를 변화시켜서 출산을 시킨다고 했을 때 그것이 치명적일까요? 절대 아닙니다. 월레스는 복제품이 유순하기에 진정으로 인류에 필요한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지 않습니다. 유순함은 법을 통과시키기 위해 필요했던 변명에 불과하죠. 당장 그의 비서 러브만해도, 기존에 설계된 “유순함”에서 벗어나버렸습니다. 사장은 이를 모르지 않습니다. 하지만 오히려 그녀를 적극적으로 이용합니다. 그는 그것을 즐기고 있는 것이죠. 그가 즐기는 것은 복제품들의(하지만, 사실은 다른 모든 인간의) 노예성 그 자체입니다. 그는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인간이 과거의 위대함을 잃어버려 노예제를 유지할 존엄과 자신감을 상실한 게 문제라는 것이지요. 그의 본심은 노예제의 귀환입니다. 인류가 우주로 뻗어나가기 위해서 노예제가 필요하다는 것이지요. 하지만 인간들은 인간을 노예로 삼지 않습니다. 그것은 인간 문화에서 더 이상 납득할 수 없는 “악”이 되었습니다. 월레스는 바로 이 점을 파고들고 있는 것입니다. 인간이고 노예인데, 진짜 인간은 아니라 죄책감을 덜 수 있는 종류의 그런 존재가 필요하다는 것이죠. 월레스가 복제품에 매달리는 것, 그들의 출산을 가능케 하려고 하는 것은 합법적 노예를 인간처럼 육성시키려는 생각 때문입니다. 그들이 복제품으로 딱지 붙여질 수 있는 한, 그들이 출산을 하는 것과 상관 없이 그들을 노예로 부릴 "합법성"이 주어진다는 것이지요. 이 문제는 벽 너머의 세계를 통해서 반대의 형태로 암시됩니다. 거기에는 “태어난” 아이들이 노예로 부려지고 있죠. 법망 너머에서 말이죠. 중요한 것은 출산이 아닌 것입니다. 복제품의 혁명을 꿈꾸는 이들은 출산이 어떤 특별한 계기가 될 거라고 생각하고 있지만 그것은 그저 환상일 뿐입니다. 이 영화 속 복제품들, 인간들은 모두 환상에 빠져있습니다. 주인공은 말할 것도 없죠. 하지만 가장 흥미로운 인물은 러브일 것입니다. "유순한" "새 모델"은 거짓말을 할 수 없는 존재입니다. 하지만 그것이 사실이 아니란 것은 러브의 말과 행동으로 드러나게 되죠. 러브는 거짓말할 수 있는 존재입니다. 그는 스스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는 유순한 복제품이 아닙니다. 하지만 그는 월레스에게 절대 복종합니다. 왜 그럴까요? 월레스에게 복종하는 것만이 자신의 삶에 가치를 부여해주기 때문입니다. 그는 자신이 월레스의 꿈에 걸맞은 “천사”가 되고 싶어합니다. 그것이 그의 유일한 목표입니다. 그렇기에 본인이 실제로 생각을 하고, 느끼고, 반항할 수 있다는 것은 그다지 중요한 사실이 아닙니다. 가치를 부여해주는 대의가 중요한 것이죠. 이 점에서 러브는 혁명을 기도하는 복제품들과 다르지 않습니다.
혁명을 꿈꾸는 복제품들이 환상에 빠져 있는 것은 명확하죠. 그런데 그들이 환상에 빠져 있는 증거 중 하나는 바로 눈에 대한 집착에서 드러납니다. 혁명군 대장 역할의 여자는 눈이 하나 없죠. 바로 그 눈에 자신의 제품번호가 적혀 있기 때문에 눈을 제거한 것일 겁니다. 눈이 없어서 썬그라스를 끼고 있는데, 말을 걸고선, 자신의 눈이 보고 싶을 것이라면서 스스로 썬그라스를 벗죠. 누가 요청했나요? 전작에서 눈은 복제품과 인간을 가르는 가장 중요한 기관이자 상징으로 사용됩니다. 하지만 전작에서 중요했던 것은 눈이 아니었습니다. 그것 따위는 중요한 게 아니란 게 중요한 것이었죠. 베티는 복제품 통과 테스트를 극복할 수 있었을까요? 레이첼은요? 중요한 것은 그런 게 아니란 게 전작의 결론이었죠. 하지만 <2049>의 인물들은 눈에 집착합니다. 이를 드러내는 재미난 대립신이 있습니다. 전작에서 프리스는 죽기 전에 발광을 합니다. 그리고 총을 더 쏴서 프리스가 완전히 죽죠. 뒤늦게 도착한 베티는 프리스가 죽어 있는 것을 발견하고 슬퍼합니다. 그리고 프리스의 얼굴을 만지죠. 이런 경우 보통은 눈이 떠있고, 다른 사람이 눈을 감겨주곤 하죠. 하지만 재밌게도, 프리스는 눈을 감고 있고, 혀를 내밀고 있습니다. 베티는 그녀의 혀에 키스를 하고 입을 다물게 합니다. 그는 눈에 집착하지 않습니다. 그는 정신으로 인간을 정의하지 않습니다. 그는 육체를 사랑합니다. 하지만 <2049>의 복제품들은 눈에, 정신에 집착합니다. K가 마지막에 죽을 때도 결국 눈만 움직이다 눈을 뜬 채로 죽습니다. <2049>에는 인간보다 복제품이 더 많이 등장합니다. 인간들은 중요한 역할로도 등장하지만, 감정 묘사도 거의 없어서 사실 복제품과 그렇게 다른지도 모르겠는 존재로 등장합니다. 그들은 실제적으로 복제품과 대립되는 존재로 등장하지 않습니다. 그들은 그저 형이상학적 지위, 관념, 이데올로기로만 구별되고 있습니다. 복제품들 또한 그들 스스로의 생각과는 다르게 많은 점에서 매우 감정적입니다. 허나 그들 스스로가 자신들이 복제품이란 사실을 거부하려고 하다 보니 정작 이것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있는 것이지요. 그렇기에 그들은 환상에 빠지게 됩니다.
이제 이 영화가 왜 비관적인지가 대충 윤곽이 나왔을 것입니다. 겉보기에는 <2049>는 낙관론이고, 본질의 실재를 말하는 듯합니다. 하지만 이는 모두 허상이고, 사람들을 속이며, 그들의 목숨을 앗아가고 있다는 게 영화의 메시지가 되는 것이죠. 한 가지 주목해야할 점은 두 영화 모두 영화 안에서의 화면을 가득 채우긴 하지만, 그 화면들을 부정하는 논리를 사용한다는 점입니다. 블레이드 러너에서 베티가 언급한 "인간들은 믿지 못할 놀라운 경험"은 단 한 마디의 말로 간접적으로 다뤄질 뿐 우리 눈에 비춰지지 않습니다. 우리는 그것이 어떤 것인지 전혀 알 수가 없죠. 영화 내내 비춘 장면들은 그런 점에서 공허에 가깝습니다. 무엇인가 일어나고 있지만, 그것은 환상에 불과한 것이죠. 영화란 것의 본성이 그렇듯 말이죠. 영화 안의 세계가 그러하다는 것은 데커드란 인물을 보면 특히 두드러지게 드러나죠. 데커드는 은퇴를 한 인물입니다. 하지만 은퇴를 하고나서 한다는 일은 비오는 날 길거리에 앉아 있다가 국수나 사먹는 짓 정도죠. 그는 일을 맡았을 때도 기뻐하지 않습니다. 그는 은퇴하고 싶다고 말하죠. 그는 복제품들은 은퇴시키는 존재지만, 사실 스스로도 은퇴하고 싶은 존재입니다. 하지만 그의 은퇴는 복제품들과 달리 죽음이 아니기에, 그의 삶은 무의미로만 가득 찹니다. 하지만 데커드가 만난 복제품, 그가 은퇴시켜야만 하는 복제품은 은퇴를 거부하고 있죠. 여기서 전환점이 생겨납니다. 베티는 프리스를 죽인 것에 대한 복수로 데커드에게 공포를 선사합니다. 노예가 되어 쫓기는 삶이 얼마나 끔찍한지 알려주는 것이죠. 그는 그를 죽이지 않습니다. 그저 여유를 두고 쫓기만 할 뿐입니다. 그리고 데커드가 죽을 위기에 처해 있을 때, 그의 목숨을 구해주고, 그것이 노예의 삶이란 것을 가르쳐주죠. 여기서 우리는 이러한 진술이 노예 비판을 뜻한다고 생각해선 안 됩니다. 베티는 노예 해방을 위해 지구에 온 인물이 아닙니다. 그는 <2049>의 복제품들처럼 정치를 위해 지구에 남아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가 만약 무한한 삶을 가졌더라면, 그들은 지구에 오지도 않았을 것입니다. 그냥 자신을 다스리려는 인간들을 죽이고, 자기 살 길을 찾아 떠났겠죠. 그들은 지구에 오는 위험을 스스로 감수한 것입니다. 그들은 스스로 쫓기는 자가 된 것이죠. 스스로 노예와 같은 경험을 자처했다고도 말할 수 있겠네요. 그들이 이를 선택한 이유는 단순합니다: "살기 위해서" 혹은 "생명 연장" 그는 노예로서 사는 것이 죽는 것보다는 낫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아니, 혹시라도 모를 삶을 위해서라면 노예 생활이라도 감수할 것이라고 생각한 것입니다. 그들은 자신의 가치가 노예화로 훼손되지 않는다는 자신감이 있습니다. 그들은 노예라는 딱지를, 쫓기는 삶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살수만 있다면! 그리고 이러한 메시지는 데커드에게도 전해집니다. 데커드는 "그 사건" 이후 레이첼과 함께 도망 갑니다. 도망치는 삶은 쫓기는 삶이고, 쫓기는 삶은 노예의 삶입니다. 데커드는 이제 베키처럼 노예 신세가 될 것입니다. 데커드는 바로 조금 전에 쫓기는 공포를 느껴본 사람입니다. 그는 그것이 얼마나 공포스러운지 압니다. 하지만 그는 쫓기는 삶을 선택합니다. 왜일까요? 그것이 진정으로 가치 있다고 생각해서입니다. 영화에서는 나오지 않을 이후의 일들, 그것이 블레이드 러너가 제공하는 답이었습니다. 영화에서 보여주는 화면들은 모두 무가치했지만, 영화에서 보여주지 않는 화면, 이제 시작될 화면들은 진정으로 가치 있는 것이 될 것이지요.
반면 <2049>의 화면에는 무슨 가치가 있을 수 있을까요? <2049>의 화면들은 자기 스스로를 냉소하고, 조롱할 뿐입니다. 이 영화에서 나오는 “웅장함” 따위는 모두 블랙 코메디입니다. 모두 미치광이고, 모두 삶을 포기한 존재들입니다. 유령과 다름 없는 노예들만 등장하죠. 그곳에는 자유인이 없습니다. K는 이름을 얻어냈다고 생각했죠. 하지만 그 이름마저도 얄팍한 프로그램에 불과하다는 것을 깨닫습니다. 그는 추억도 가짜고, 애인도 가짜고, 이름도 가짜인 존재입니다. 그러니 실재를 상징하는 모든 상징물들 또한 환멸의 대상일 뿐입니다. 그들은 자신의 실재성을 외친다는 점에서 오히려 사기적인 존재들이지요. 정말로 있다고 주장하는, 혹은 주장되는 것들은 실제로는 환영에 불과합니다. 영화에서는 나무 말이 화덕에 들어갔다 다시 나와 주인에게 돌아갑니다. 화덕에 들어갔다 나오는 것, 연금술에서 사용되는 전형적인 상징입니다. 하지만 이는 기만인 게 확인될 뿐이죠. 나무 말은 재생된 게 아니고, 주입된 기억에 의해, 착각에 의해 주인에게 돌아갔을 뿐이죠. 여기서 부활이란 그저 상상에 불과합니다. 그들 기억의 본질이 상상인 것처럼요. 하지만 이는 인간들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그들의 기억은 스텔린 박사가 말하듯, 뒤죽박죽에 감정적인 기억이라 혼란스러울 뿐입니다. 결국 복제품이나 인간이나 허상만으로 자신을 만들고 있는 것이지요. K는 대의를 위해 데커드 정도는 죽여도 된다는 말을 따르지 않고 데커드를 힘겹게 살려냅니다. 여기에 딱히 이유는 없습니다. 데커드 본인도 어리둥절해할 정도니까요. 그 또한 묻습니다. “왜 이러는 거지?”라고요. 그럴 만하죠. K 본인도 모를 겁니다. 적어도 그가 “대의”에 공감하지 않는 다는 것 정도만 알 수 있겠죠. 그가 편안한 표정으로 죽는 것인지는 저는 잘 모르겠습니다만, 만약 편하게 죽으면 인간과 복제품 사이에서의 간극과 상관없이 어떤 의미로든 은퇴했기 때문이라고 말할 수 있겠네요.
이 영화 안의 모든 것들은 환상과 상상이고, 이를 극복할 수 있는 수단이 없을 뿐만 아니라, 그런 게 없다는 것, 그런 게 오히려 우리를 노예로 만든다는 것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원작과 대립되는 의미에서 반-영화를 위한 영화입니다. 원작은 반-영화입니다. 그것은 화면을 부정합니다. 삶을 긍정합니다. 이 화면에서 삶을 찾지 말라고 경고합니다. 진정한 삶은 화면 너머에 있다는 것을 가르쳐줍니다. 하지만 <2049>는 이를 블랙 코메디로만 그려냅니다. <2049>의 화면이 웅장할수록 냉소는 커집니다. 화면 속 사물들의 실재성이 커질수록 실재성은 무의미해집니다. 이 영화는 분명 영화를 부정합니다. 하지만 진정한 가치는 그렇다면 화면 밖에 있을까요? 잘 모르겠습니다. <2049>에서는 그런 것을 그리지 않습니다. 담담하게 화면의 무의미함을, 거짓을, 그것에 속는 존재들을 그려내고 있습니다. 여기에 환멸과 냉소 이상의 무엇이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이것이 현실 진단이라면 정말로 통찰력 있는 영화일 것입니다. <2049>에서 비관론이 아니라 낙관론을 읽어낸 이들의 존재가 영화의 통찰을 증명해줄 테니까요.
'영화' 카테고리의 다른 글
<라라랜드> (0) | 2021.04.26 |
---|---|
<더 울프 오브 월스트리트>를 보고 (0) | 2021.01.07 |
폴 토마스 앤더슨의 <인히어런트 바이스>를 위하여 (0) | 2020.12.20 |
<엑스맨: 퍼스트 클래스>에 대한 코멘트 (0) | 2020.07.05 |
<퍼펙트 블루>에 대한 감상평 (0) | 2020.03.3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