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카테고리 없음

시골 친구에게 보내는 편지

13- 몇몇 박사들은 한 걸음 더 나아가서, 자신들은 아무리 찾아봐도 얀세니우스의 책에서 그 명제들을 발견할 수 없었고, 오히려 정반대의 명제들을 발견했다고 선언했소, 그리고 이 책에서 그 명제들을 본 박사가 있으면 자신들에게도 보여 달라고 간곡히 청을 했소. 그건 너무도 간단해서 거절될 수 없는 일이었소. 사람들은 물론 아르노 선생마저 꼼짝 못하게 만들 확실한 방법이니까 말이오. 하지만 이 요청은 늘 거부되었소. 이상이 한편에서 일어난 일이라오.

13- 나는 이 명제들이 정말 얀세니우스의 책에 있는지가 궁금하고, 이 책은 구하기 어렵지 않고 끝까지 읽지 못할 정도로 두껍지도 않으니 소르본느에 자문을 구하지 않고도 그 사실을 확인할 수 있소.

14- 사실, 세상이 의심이 많아져서 눈으로 직접 봐야 믿으니까 말이오.

14- 이 점은 신앙에 관한 게 아니니 별로 중요하지 않소.

파스칼은 사실 문제와 법 문제(De facto/De re로 추정됨)를 구별한다. 사실 문제는 실증의 문제로서, 해당 명제가 실제로 그 책에 들어있는지에 대한 문제이다. 이는 신앙과 무관하며, 논의의 조건이 될 만한 사실들만을 확인하는 일이다. 법 문제는 논리의 문제로서, 그러한 명제의 내용이 이단적인지에 대한 문제이다. 파스칼은 두 문제 중 사실 문제는 “눈으로 직접 봐야 믿”을 수 있고, “어렵지 않”게 “그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고 말한다. 책을 구하는 것도 쉽고, 그 속에 같은 문장이 있는 것을 확인하는 것도 쉬운 일에 속하기 때문이다. 여기서 쉽다는 것은 노력하면, 할 수 있는 일이며, 그 사실 여부가 명확하게 드러날 수 있다는 의미에서 쉽다는 의미이다. 물론 파스칼은 실제로도 그 책이 두껍지 않고, 구하기도 쉬우니 더욱 쉽다고 말한다.
여기서 확인할 수 있는 것은 바로 사실 문제의 중요성이다. 파스칼은 사실 문제를 확정하는 것이 논의의 기본적인 작업이라고 생각한다. 이는 세 번째 편지에서도 드러난다.

48-49 “가장 확실한 그들 편은 늘 침묵이었습니다. 그래서 학식 있는 한 신학자는 ‘그들 중 가장 노련한 자는 모의는 많이 하고, 말은 거의 하지 않으며, 글은 전혀 쓰지 않는 이들이다’라고 말했던 겁니다”

파스칼의 대화자가 파스칼의 순진함을 지적하면서 언급하는 이 발언은 의미심장하다. 그들(아르노를 비난하는 예수회 소속 수사들)은 아르노의 명제가 잘못되었다는 것을, 사실로서도, 법으로서도 지적하지 않고 있다. 그것은 이상할 것이 없다. 왜냐하면 그들은 바로 말을 하지 않고, 침묵으로서 논쟁(?)에 임하는 이들이기 때문이다. 여기서 파스칼은 예수회와 얀센주의자들을 다음과 같이 대비한다. 예수회는 말로써 보여주지 않고, 단죄로서, 견책을 사실로서 공표함으로써 보여준다. 반면 얀센주의자들은 교부들의 말씀으로써, 책으로써, 논리로써(?) 자신들을 보여준다. 여기서 말에 대한 파스칼의 옹호가 드러난다. 말을 하지 않고, 침묵하는 사람들은 개인으로서만 존재하는 이들이며, 그들에게 있어서 중요한 것은 그들의 힘이고, 정치력뿐이다. 반면 진정으로 옹호될 것은 말이고, 논리고, 합리성이라는 것이다.
하지만 여기서 옹호되는 말은 단순한 음성은 아니다. 파스칼은 얀센주의가 수세적 입장에 몰리는 상황에 대해서 도미니코 수도회를 끌어당겨 사태의 부당함을 호소한다. 파스칼에 따르면 도미니코회는 얀센주의자와 실제로는 똑같은 신앙을 가졌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얀센주의나 도미니코회는 교부들의 말씀을, 아우구스티누스의 은총을, 토마스의 신학을 옹호하기에 다를 수가 없다. 하지만 도미니코회는 예수회와 같은 표현만을 공유함으로써 그들을 다수로 만들고 얀센주의를 박해한다. 하지만 이는 입술로만 같은 것이지 실제로 같은 것이 아니다. 그리고 도미니코회의 이러한 상황을 일종의 정치적 문제에 의한 것으로 파스칼은 그리고 있다.

34- “정말 쉽게 말하시네요. 당신은 자유로운 개인이지만 나는 교단에 속한 수도잡니다. 그 차이를 헤아릴 줄 모르십니까? 우리는 우리 장상들에게 속해 있고 그들도 다른 장상들에게 속해 있습니다. 그들은 우리에게 동의하기로 약속했어요. 당신은 내가 어떻게 하길 바랍니까? 우리는 다 듣지 않고도 이 말을 이해했어요. 비슷한 주제로 아베빌로 추방되었던 그의 동료가 생각났고요”

도미니코회 신부는 자신의 부자유함에 근거해서 현재의 상황을 변명한다. 그들은 이미 그렇게 약속했고, 그렇지 않으면 추방된다는 것이다. 여기서 수도회 소속의 부자유와 얀센주의의 자유가 대비된다는 점은 주목할 만하다.
하지만 이러한 말에 대한 신뢰가 제한적이라는 것은 반드시 명심해야한다. 이는 조건의 문제이다. 한편으로는 누군가를 비방할 때, 그것들이 근거를 통해서만, 즉 사실 문제를 확인함으로써만 이루어져야한다는 것이고, 다른 한편으로는 그것들이 또 다른 근거를 통해서만, 즉 교부들의 말씀 등으로 이루어진 이론적 논쟁을 확인함으로써만 이루어져야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파스칼은 전자의 문제에 대해서 확고한 방법을 제시하지만, 후자에 대해서는 애매한 태도를 취한다. 전자는 근대성의 영역이라고 부를 만하고, 우리에게 합리적 방법이 주어지지만, 후자는 그렇지 않기 때문이다. 후자는 권위의 영역이라고 생각할 만하다. 왜냐하면 여기서 언급되는 것은 오직 그리스도의 말씀, 성경 속 구절, 교부의 글들, 토마스의 글들처럼 권위에 의해서만 확인되는 종류의 증거들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러한 문제는 전자의, 즉, 사실의 문제가 확인되고 나서야 확인될 수 있는 종류이고, 파스칼은 아르노가 사실 문제에 있어서 죄가 없기 때문에 법 문제로서는 논증하지 않는 것일 수도 있다.
하지만 여기서 옹호되는 법 문제적 논쟁은, 그러한 가능성을 폐쇄시키는 것처럼 보인다. 여기서 그들은 근본적으로 은총론에 입각해서만 행위할 수 있다고 말한다. 의인은 그 자체로 의롭지만 때로는 의롭지 않은 행동을 하기도 하는데, 이는 은총이 부족해서라는 것이다. 때문에 의로운 행동 모두는 은총에 의한 것이라는 게 이들의 입장이고, 앎에 대해서도 이러한 입장을 취할 가능성이 있다. 즉, 진정한 앎은 노력으로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 은총에 의해서만 얻어지고, 이는 설명이 불가능한 영역일 수 있다. 하지만 아직 이는 확인된 사실이 아니므로 파스칼이 그러한 입장이라고 주장해서는 안 된다.

흥미로운 지점은 파스칼과 에라스뮈스의 유사점과 차이이다. 에라스뮈스도 파스칼도 일정 부분 말을 믿는다. 말은 신앙으로 직결되는 것이 아니라 그 조건이다. 적어도 합리적이라고 부를 수 있는 방법으로 말을 순화하는 것은 중요하고, 그 바탕에서만 신앙이 꽃필 수 있다는 것이 그들의 첫 번째 공통점이라고 말할 수 있다. 또 다른 공통점은 이러한 순화가 대중에게 호소된다는 점이다. 물론 에라스뮈스는 라틴어에 호소하고 민족어를 거부한다. 반면 파스칼은 민족어에 기초해 호소한다. 하지만 둘 다 대중적인 입장은 같다. 그들은 여자들도 읽을 수 있는 글을 쓰기를 바라며, 쓸데없이 어려운 말, 표현적으로 생소한 언어에 대해 반대한다. 스콜라 신학자들이 나쁜 것은 그들의 주장이 나빠서라기보다는 어려운 말을 해서라는 것이다. 에라스뮈스와 파스칼은 대화와 일화로 자신의 생각을 표현한다. 이러한 글은 생생하고, 구체적이며, 짧고, 명확하다. 그들의 대화는 일화 속에서 이루어지고, 유머(에라스뮈스의 경우)와 위트(파스칼의 경우)로 사람들을 매혹한다.(이는 꽁트의 기원인 것 같다) 여기서 에라스뮈스가 라틴어를 중시한 이유가 파스칼의 민족어와 충돌하진 않는다. 파스칼은 엄청나게 강렬한 감정의 언어로 호소하지 않는다. 파스칼은 분명 루터와 다르게 매혹한다. 그는 재치 있는 풍자로 매혹하지 강렬한 수사로 매혹하지 않는다. 루터와 달리 파스칼은 자신의 신앙을 고백하며, 호소하려는 열정이 없다!(이는 그의 신앙과도 밀접하게 관련있다. 파스칼은 특정한 신앙에 호소하지 않는 것이야말로 기독교적이라고 생각한다) 절제된 언어, 언어의 기본적인 합리성에 대한 호소, 문헌학적이라고 말할 수 있는 확인에 기초한 언어의 합리성 등이 에라스뮈스와 파스칼에게 공유되며, 광기 어린 열정, 힘으로써 현시하는 과도함에 대한 거부가 공유되고 있다. 여기서 루터와 예수회는 같은 의미에서 악한 존재다. 그들은 과도하다.
에라스뮈스, 파스칼, 이후 계몽주의로 이어지는 노선은 이러한 점에서 매우 비슷한 점이 있다. 그리고 이들의 공통점이 나를 매혹시킨다. 그들은 어려운 철학에 대해 반감을 갖는다. 전문 용어의 향연이 된 철학의 언어는 일상생활과 동떨어져 있으며, 여자, 어린 아이, 시골 사람, 배우지 못한 이들을 배척하는 언어이다. 이들의 언어를 극복하기 위해 그들은 일상 언어에 기초한, 재밌으면서도 ”내용이 있는” 언어를 개발하려고 한다.(그러나 내용은 상징적이기에 직접적으로 그려질 수 없다. 바로 이 점 때문에 에라스뮈스와 파스칼 모두 상징에 대해 고민한다) 그러면서 동시에 그들은 바로 이러한 언어에 기초한 합리성을 사람들 사이의 공통 기반으로 삼는다. 물론 모두가 같은 생각을 할 수는 없다. 하지만 언어는 하나여야 한다는 것이다. 즉, 보편성을 위해 요구될 것은 하나의 영혼이 아니라 하나의 언어이다. 이는 현재 철학이 놓여 있는 상황과 매우 비슷하다. 한편으로 대륙철학은 그들만의 리그로 전락한 언어로써 철학하고, 실제로 그 학파에 속한 인물들은 음성으로써만 대립하지, 내용으로써 대립하지 않는 경우가 허다하다. 반면 분석철학은 너무나도 전문적인 글들로 자신을 표현하기에 읽으면 이해될 수 있어도, 그것이 왜 필요한지에 대해서는 알 수 없는 형국이다. 이 경우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구체와 보편을 통일하는 철학함이고, 재치와 유머로 채워진 꽁트로 사람들을 이끄는 철학이다. 하지만 오늘날 이러한 언어가 정말로 가능할까? 물론 16-18세기에 이것이 더 쉬웠을 것이라 생각하지 않지만, 적어도 오늘날처럼 복잡한 세상이 그때보다 더욱 큰 난점을 만드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그 이상은 충분히 매혹적이고, 합리성과 교양, 자유로 나아가게 하는 학문(자유학예의 이상이었던), 인문학의 쓸모를 설파할 유일한 길처럼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