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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적 자유주의> 그리고 <새로운 세계 합리성> (추가)

별 생각 없이 이래저래 씨부린 것.



롤즈의 <정치적 자유주의>를 읽게 되었는데, 읽다보니 이 책 참 괜찮은 책이란 생각과 함께 역시 이론이 부족해서 문제가 생기는 게 아니란 생각이 들더군요.


롤즈가 <정치적 자유주의>에서 수행하려는 작업은 이런 겁니다. “정치적인 것”이라고 말해질 수 있는 영역을 구축함으로써, 정치적인 주장과 그렇지 않은 주장을 구별하는 판단 기준을 제시하고, 정치적인 주장들이 자신의 정당성으로서 제시할 수 있는 근거를 제한하는 것입니다. 즉, 무엇이 정치적인 것이냐를 규정하고, 해당 규정에 근거해 해당 영역에서 합당한 논쟁의 규칙을 제안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롤즈가 도덕철학을 하다가 뜬금없이 정치철학으로 넘어온 것처럼 보일 수 있는데, 그게 아니란 게 중요합니다. 롤즈는 자신이 <정의론>에서 제시한 도덕철학이 실패했다고 진단합니다. <정의론>에서 제시한 도덕철학은 “안정성stability”을 확보할 수 없기 때문이죠. 롤즈가 안정성을 내세우는 것은 중요합니다. 롤즈가 말하듯 정치철학에서 안정성은 매우 중요한 주제인데(제가 항상 얘기하지만 공화주의는 언제나 공화국의 안정성을 위한 것이었습니다), 도덕철학에서 이 주제가 중요하게 다루고 있지 못해서 자신이 문제를 놓쳤다고 얘기하거든요.

롤즈가 말하는 안정성은 이것입니다. 서로 다른 가치관(롤즈식 표현으로는 근본적으로 대립적임에도 합당한 포괄적 교의reasonable comprehensive doctrine입니다.)을 가진 사람들이 상호 협력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이러한 상호 협력을 지속적으로 수행할 수 있게 하는 원칙이죠. 서로 다른 가치관을 가진 여러 사람들이 모이면 가치관의 차이로 대립할 수 있죠. 그런 대립에도 불구하고 서로 협력이 가능해서, 공동체가 지속 가능한 원칙이 롤즈가 제시하는 “안정성”입니다. 이게 별거 아닌 것처럼 보이지만 꽤나 중요해요. 롤즈가 제안하는 안정성이 보장되면 적어도 원리적으로는 가치 대립에 의해 공동체가 와해되지 않거든요. 이 조건을 충족시키지 못하면, 특정 가치관을 강요하거나 가치관을 가지면 안 되는, 뭐 그런 게 됩니다.

롤즈가 애초에 이걸 진지하게 고민하게 된 것도 본인이 저 요건을 충족시키지 못한다는 것을 깨달아서였어요. <정의론>에서 롤즈는 본인이 제안하는 특수한 가치관, “공정으로서의 정의”가 보편타당해야만 공동체가 성립 가능해지고, 공동체가 정당해진다고 주장했어요. 그런데 이렇게 주장하고나니까, 공정으로서의 정의를 가치관으로 받아들이지 않는 사람들과는 원리적으로 공동체를 못 이루게 되는 거죠. 그래서 본인이 특정 가치관을 강요하고 있었고, 바로 이 강요에 의해 <정의론>이 추구하는 “질서정연한 사회의 안정성”은 비현실적이게 되었다고 판단하게 된 겁니다. 그래서 <정치적 자유주의>로 전회하는 거죠.(재미나게도 롤즈는 본인이 주장하는 전회가 전기적으로 사실인지는 본인도 모르겠지만, 하여간 이렇게 볼 때 의미 있다고 주장합니다.)

뭐 이건 쓸데없는 얘기고, 하여간 이 양반이 그래서 수행하는 활동의 유의미성을 설명하겠습니다. 롤즈는 현대에 전제되는 국가가 합당한 다원주의를 특징으로 하는 민주주의 공화국이라고 선언합니다. 꼬우면 이거 부정해보란 것이죠. 일단 이걸 받아들이면, 자신이 지향하는 가치관과 대립되면서도 합당한 가치관이 가능하다는 것을 받아들여야합니다. 그리고 이 사실을 받아들일 때, 정치적인 영역은 특정한 가치관이 실현되는 영역이 아니라, 서로 다른 가치관을 지닌 여러 사람들 사이에서, 협력할 이유가 있는 무엇인가를 다루는 영역이 됩니다. 이게 별거 아닌 거 같지만 매우 중요합니다. 정치적으로, 다시 말해 정부의 힘을 통해서 무슨 일을 벌이고 싶으면, 적어도 이에 합당한 주장을 가져와야하고, 이에 합당한 근거를 제시해야한다는 게 되거든요.

이게 별거 아닌 것 같아 보이지만 매우매우 중요합니다. <새로운 세계 합리성>도 비슷한 얘길하거든요. <새로운 세계 합리성>의 저자들은 기존의 분석이 시장vs국가 식이라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 것이라고 진단합니다. 이 양반들이 지적하듯, 신자유주의는 그것을 정당화하는 논리와 실제 현실이 이질적이거든요. 말로는 작은 정부를 표방하죠. 하지만 20세기후반부터 지금까지 정부는 적극행정 및 복지국가를 표방하며 큰 정부로 확장해왔습니다. <새로운 세계 합리성>의 저자들은 신자유주의는 작은 정부를 지향한 적 없으며, 모든 공적인 영역을 국가적 통제 영역으로 확장하고 있고, 바로 그래서 문제라고 말합니다. 애초에 국가가 권력으로 찍어누르면서 특정한 합리성을 강요해서 생기는 문제인데, 이걸 국가가 나서면 된다는 식으로 생각하면 진단부터 틀린 것이 된다는 얘기죠. <새로운 세계 합리성>에서 진단하는 신자유주의의 최대 위협은 민주주의에 대한 위협입니다.

맨날 복지 복지 떠들고, 적극행정이 중요하다고 떠들지만, 이건 원래부터 좋은 것, 본질적으로 선한 것이 아닙니다. 관련되어 역사연구를 진행한 모든 연구자들이 동의하듯이 복지국가 및 적극행정의 등장은 도덕적인 이유에서 비롯된 것이 아닙니다. 관료조직은 비대해지는 경향이 있고, 그래서 일을 벌이며 자신의 존재 이유를 강화하고 권력을 강화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복지국가 및 적극행정은 관료조직의 비대화의 결과물일 뿐 도덕적인 성취 따위가 아닙니다. 하지만 관련된 연구자들 모두가 동의하듯이, 복지국가와 적극행정을 부정해서 이득될 것은 없습니다. 복지국가와 적극행정이 패러다임으로 자리잡았고, 사람들이 원하고, 요구하며, 당연시 하는데, 이걸 거슬러서 좋을 게 뭐가 있겠어요. 하버마스가 말하듯 현대의 조건으로 받아들이고, 그 위에서 유의미한 방향을 찾아야하는 거죠.

생각보다 해결법은 단순해요. 정치적인 영역과 그렇지 않은 영역이 구별하면 됩니다. 롤즈가 제안하는 기준도 정말 단순하죠. 제가 자주 사용하는 용어로는 “대칭성”이고, 롤즈 본인의 용어로는 “상호성”이죠. 적어도 자신의 가치관에서 비롯된 특정 행위 규칙을 남에게 강요하려면, 그러한 가치관에 동의하지 않더라도 이를 받아들일 근거를 제시해야합니다. 만약 그게 아니라면 그냥 강요하는 거고 폭력이죠. 폭력을 일삼는 이들의 말을 존중할 이유도 없고, 그런 이들에게 폭력을 가하는 것도 대칭적이고 상호적이죠. 애초에 그런 주장들은 공적으로 합당한 주장도 아닌 데 그걸 공적인 것 마냥 신경 쓰니까 문제가 생기는 거죠. 롤즈는 공적인 것에 대립되는 것으로 사적인 것을 제시하지 않습니다. 공적이지 않은 것이 모두 사적인 것일 이유가 없다는 것이죠. 적극적으로 공적인 것, 즉, 정치적인 것과, 소극적으로 공적인 것, 즉 사회적인 것은 다를 수 있습니다. 사회적으로 남들을 설득하며, 자신의 내적 판단 근거로 가치 있는 삶을 추구하는 것이야 문제가 없겠지만, 정치적으로, 즉 권력을 매개로 이를 수행하면 문제인 것이죠.(사실 이럴 때는 푸코식 도식으로 권력과 지배를 구별하는 게 좋습니다. 사회적인 것은 권력이고, 정치적인 것은 지배죠.) 이것도 안 지키고, 대충 좋은 일이라고 일을 벌이니까 이 모양 이꼴이 된 것이죠. <새로운 세계 합리성>에서도 분석되는 것이지만(물론 저랑 이 사람들의 정치사상적 배경은 달라 표현은 매우 다르지만), 대충 좋은 일이라고 일 벌리는 사람들이 합리성이니 개혁이니 혁신이니 떠들며 자신의 합리성을 강요해서 생긴 문제란 것이죠. 롤즈가 말하듯, 그런 개별적인 기준도 합리적rational일 수 있지만, 결국 공권력으로 강요하려면 정치적으로 합리적인, 즉 합당할reasonable 수 있어야했던 것이죠.

근데 다시 생각해보면 문제는 너무 뻔하고, 해결책은 현실적인 것처럼보이지 않습니다. 이런 문제가 생긴 건 결국 대충 좋아보이는 일이면 목소리 높이며 강요하고 그거에 동조해서 생기는 일이거든요. 과거 청와대 청원을 보신 적 있음 알겠지만, 내 못생긴 얼굴도 국가에서 책임지라는 식으로 사람들은 생각하죠. 최인훈이 광장에서 말한 것처럼 광장은 약탈의 공간일 뿐이지, 뭔가 함께 무엇인가를 해볼 공간으로 여겨지지 않습니다. 이게 무슨 민족성의 문제 때문은 아니에요. 사람들은 충분히 합리적이고, 충분히 똑똑합니다. 단지 “정치”가, “도덕”이, “철학” 혹은 “사상”이 사람들에게 그다지 흥미로운 영역이 아니어서 생기는 문제죠. 솔직히 말씀드리자면 제가 생각하기로 사람들은 저런 영역에 그다지 관심이 없습니다. 당장 “자유주의”, “민주주의” 이런 거에 대한 상식을 보면 쉽게 이해가 됩니다. 저런 정치적 원리에 대한 일반적으로 통용되는 담론들은 근본 없고 조금만 생각해도 헛점 투성이인 븅신 같은 소리들이거든요. 븅신 같은 소리들이 통설인 것은 사람들이 멍청해서도, 뭘 좀 제대로 아는 사람들이 열심히 안 떠들어서도 아니에요. 관련해서 븅신 같은 소리들을 모두 반박하며, 그래도 말이 될 입장을 전개하는 책들은 한국어로도 많이 나와 있습니다.(물론 번역서들이죠. 거의 다.) 근데 애초에 저런 책을 보지 않고, 딱히 생각해보려고 하지 않아서 그런 거에요. 딱히 필요하지 않다고 생각하는 것이죠. 실제로 저에게 철학은 이런 거 아니냐고 하면서 이래 저래 얘기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전 그런 얘기를 들을 때 적당히 반응할 수밖에 없습니다. 평생 5분도 생각해보지 않고서 떠들어대는 걸 10초 안에 알 수 있는데 들을 게 뭐가 있겠어요. 그런 것이죠 뭐. 애초에 별로 알려고도 안 하는 겁니다. 사람들이 정말 알려고 했으면 이미 알고 있겠죠. 사람들은 멍청하지 않거든요.

뭐 결국 하는 얘기는 뻔한 겁니다. 이론적으로는 이미 나올 것은 다 나왔단 거죠. 패러다임 전환 같은 것은 없을 거란 얘기입니다. 제가 라투르의 사물정치는 사실 현실정치라고 얘기하는 것도 비슷한 맥락이죠. 애초에 현실정치는 어원적으로도 “실물정치”, “사실정치”, “사물정치”였습니다. 라투르 본인이야 열심히 고민했다고 대답하겠지만, 별로 고민하지 않고 본인 습관대로 사고하고 비난하고 주장했을 겁니다. 요즘 학자들은 롤즈를 두들겨 패지만, 롤즈만 가지고도 최신 담론으로 나아갈 수 있습니다. 롤즈가 “정치적인 것”의 영역과, 해당 영역에서 통용 가능한 기본 가치들을 구성적 원리로 제시한 것은, 걍 이거 믿으라는 그런 소리가 아닙니다. 저건 이념이죠. 이념은 규제적 원리고 이에 맞게 실천해야하는 거죠. 롤즈 본인부터가 시민들에게 요구되어야할 덕목들을 얘기하는데, 거기에 역량 교육(누스바움 식의)이나, 가치 지향적인 협력 활동의 실습practice 가능성(여기서 제가 굳이 실습이라고 한 것은, 연습으로서의 practice이자, 이러한 연습을 통해 실현되는 실천으로서의 practice를 포괄하고 싶어서입니다. 결국 정치가 지속되기 위해서는 정치로 나아가는 데 있어 바탕이 될 실습들이 생활 속에 있어야한다는 얘기죠.) 따위가 이미 말해지고 있죠. 부족한 게 뭔지 저는 모르겠습니다.

학자들도 관료조직의 비대화와 비슷한 방식으로 자신의 세를 불립니다. 굳이 비판할 게 없어도 꼬투리 잡는 거죠. 롤즈식의 정치철학에 대해 불만을 가질 수 있죠. 하지만 적어도 뻘소리하는 븅신들보다는 롤즈에게 동의할 게 더 많겠죠. 또한 자신의 가치관을 강요하는 멍청이들의 입을 봉할 필요는 없어도 그걸 “정치”라고 말하는 것은 멍청하다고 생각해야 정상이죠. 반박을 해도 좀 의미있게 해야하죠. 학적 반박이란 게 그렇습니다. 자연주의가 문제, 환원주의가 문제, 물리주의가 문제라고 가브리엘은 떠들곤 하는데, 솔직히 말하자면, 그딴 거 믿는 것은 전문 철학자 뿐이고, 그런 주장들은 애초에 논리적이지도 합리적이지도 않아서 반박할 가치조차 없습니다. 애초에 저런 주장을 학자들이 하고 있는 현실이 문제죠. 저게 도대체 학자가 주장할 이유가 있는 주장이고, 논박이 필요한 주장인가요? 애초에 저런 소리를 진지하게 하는 학자들은 창조론이 과학적이고 진화는 상상이라고 주장하고 다니는 과학자들 마냥 미친놈 취급을 해야하는 것이죠.(목소리 높여 진화론을 외치는 이들도 수준은 똑같지만 그래도 미친놈 취급할 필요는 없다는 얘깁니다. 최재천 같은 양반은 사유나 성찰로 진화론을 떠드는 게 아니라 습관과 반사로 떠드는 거죠. 사상이랄 게 없습니다. 그래도 좋은 생물학자고 미친놈 취급할 이유는 없단 소리죠.) 반박은 이미 나올 만큼 다 나왔어요. 아직도 고집하는 사람들은 그 어떤 반박이 나와도 그걸 옹호하기 위해 평생을 쏟아 부을 멍청이고요. 결국 문제는 애초에 그런 문제를 만드는 사람은 아무 생각도 없이 그냥 장난 삼아 그러고 있다는 사실에 놓여 있단 얘기죠. 학문을 위한 것도 아닙니다. 그냥 그러는 거죠.

결국 인프라도 중요하고, 제도도 중요하고, 이론도 중요하지만, 지금 정말 중요한 것은 이론적 가능성이 아니라 현실적 가능성인 것 같습니다. 제가 저번에도 얘기한 것이지만, 오늘날 유의미한 공동체 형성, 협력은 정말 열심히 찾아봐야 찾을까 말까하죠. 그런 것들을 찾아내거나, 그런 일을 스스로가 해내는 게 중요하단 생각이 듭니다. 결국 그 중요한 사건들을 보존하고, 알리는 것 말고 할 수 있는 학적 작업은 없는 것 같단 얘기죠. 물론 이런 활동을 위해서라도, 지속적으로 괜찮은 이론적 논의들이 유통되어야하겠지만요… 하여간 결국 사례가 중요하고, 이를 잘 기록하고, 이를 의미있게 조직해내 보존하는 일이 중요한 것 같단 소리입니다. 하마구치 류스케는 참 복받은 사람이란 생각이 드네요… 하여간 그렇습니다.


사실 저런 주장은 특별히 현실적인 진단이라기보다는 찡찡거림에 가깝습니다ㅋㅋ 자리를 못 찾은 사람의 서러움 같은 거죠.

이론은 당연히 의미가 있습니다.
저기서 관심만 있으면 당연히 알 것이라고 얘기했지만, 이건 사실이 아니죠.
얼마전에 얘기한 “일본 학계가 이제서야 준비된 듯하다.”만 생각도 이론이 중요하다는 것은 알 수 있죠.
이미 있는 것을 다르게 말하는 것만으로도 매우 의미있고, 심지어 복사 붙여넣기에 비슷한 반복 재생산도 의미를 가질 수 있습니다.
게다가 최장집 선생 같은 양반을 생각해봐도 저런 주장은 의미를 잃습니다.
최장집 선생의 민주주의를 이해하려는 열망이 진정성이 부족할 것이라고 생각하진 않습니다.(존경받을 만한 사람이라고 생각합니다. 잘은 모르지만요.)
하지만 그 분도 한국 민주주의의 위기에 대한 대답을 루소의 <사회계약론>에서 찾는 등 제가 생각하기로는 납득하기 어려운 방식으로 학문적 앎을 이해하고 있죠.
또한 제가 진단한 “사람들이 말로는 관심 있다고 말하지만 실제로는 관심이 없는 것 같다. 저녁 밥에 대한 고민보다 더 많이 고민하는 사람은 정말 없고, 고민 없이 이거 아니냐는 식으로 말한다.”라는 사실을 타개하기 위해서도, 사상이나 철학을 실천하는 모범적 인간형을 반복 재생산할 필요가 있죠. 즉, 그러한 모범 사례를 전파하고, 이에 반응하게 하기 위해서는 모범의 질 뿐만 아니라 양도 중요하단 것이죠.(실제로 인지과학적으로 양이 중요합니다. 아이들이 몇몇 사례에 집착하고, 영향을 받는다고들 생각하지만, 발달심리학적으로 아이들은 무의식적으로 통계적으로 인물 유형들을 형성한다고 밝혀졌습니다. 덕분에 가족 관계로 심리적 성향/성장을 환원할 수 없다는 것이 학적으로 증명되었죠.)

제가 찡찡 거리는 것은 제가 원하는 방향의 소통 방식으로 소통을 할 시장이 마땅찮아 보여서 그런 것이죠… 결국 가치란 것은 (어느 정도 지속성이 있는) 기대들의 일치가 만들어내는 신뢰계에서 유통되는 화폐 같은 것입니다.(가치 발생에 대한 저의 이론적 결론입니다… 뭐 딱히 색다를 것은 없다 생각합니다…) 그런데 제가 모아둔 화폐가 휴지조각이 되어 있고, 유통되는 화폐는 제가 기대를 걸 그런 종류의 것은 아닌 것이죠. 그게 아쉬운 것이죠…

이론적 패러다임 변화가 없을 거라고 말했지만, 이 또한 사실이 아닙니다. 스케일을 크게 보면 평평해보이지만, 스케일을 바꾸면 격변들이 있죠. TV의 등장이 맥루헌에게는 놀라운 일이었지만(키틀러도 이쪽 입장이죠), <정보사회의 철학>의 저자에게는 대중매체의 한 양태에 불과하고, 네트워크식 매체의 등장이 진정한 격변이죠. 둘 사이의 차이는 사실-거짓의 문제라기보다는 각자가 주목하는 특정한 양태/현상/인지적 유도지점의 차이인 것이죠. 맥루헌은 시각-촉각으로 즉자적으로 자극하는 것에 사람들이 매혹되는 현상에 주목한 것이고, 이것도 맞는 얘기죠. <정보사회의 철학> 저자는 루만의 영향을 많이 받아서 체계 내의 위계 여부를 중심으로 변동 사항을 주목한 것이고요… 이런 것만 봐도 결국 주목 지점 만으로도 발생시킬 수 있는 이론적 의의가 있습니다. 주목을 끌 때 대상만으로는 일반적으로 지불 효력을 갖는 통화로서 이론은 언제나 의미가 있죠. 결국 국제 거래에 필요한 화폐는 그런 종류의 것이죠… 그런 점에서 전 종이쪼가리들을 모아두고 존버하고 있는 것인데… 화폐의 경우에서처럼 이 또한 사회적이라 특정 제도권 안에 들어가야하다보니 지금 전략으로는 가망이 안 보이는 것이죠ㅋㅋ

하여간 기대를 일치해볼 만한 신뢰계 안에만 있으면 이론은 언제나 의미가 있습니다. 그냥 학계 내부의 투쟁을 위해서라도 의미가 있죠. 소통 확장이 어케 가능한지는 애초에 힘든 문제라 특정 학계의 문제가 아니라고 생각하고요.

뭔가 지금 제가 <인간적인 너무 인간적인> 즈음의 니체 같군요ㅋㅋ 뭔가 잘 안 되다보니 심드렁해져서 가치의 언어들을 화폐나 기호로 치환해서 설명하는…ㅋㅋㅋ
하여간 의미가 있습니다. 그게 의미 없으면 더욱 해결이 안 되는 문제죠. 니체도 모범적 사례를 통용시키는 것을 전략으로 삼았지만, 현실적 사례들을 수집하는 방식이 아니었죠. 모범 구축도 결국 이론적 정교함과 결합될 때만 의미가 있죠. 미독의 석사논문에 동원된 이론들이 무의미했다고 누가 지적한다면 미독은 납득하지 못할 겁니다. 저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제가 생각하기에도 미독의 논문에서 이론은 충분히 유의미하거든요. 논문에 동원된 이론들 없이는 사례 제시는 보편적 타당성을 갖지 못했을 겁니다.(제가 예전에 극딜한 “국내 하버마스 수용 사례”에 대한 사례 중심의 연구 강조가 의미가 없듯이 말이죠... 애초에 이론을 매개로 안 하면 그 사례 자체가 의미가 없죠. 박사논문으로 객관적인 의미가 보장되지 않는 잡다한 사실들을 긁어모았다면 박사논문으로 통과시켜선 안 되는 게 정상입니다.)

해당 글의 교훈은 롤즈는 나쁘지 않은 편… 윤리학 연구에 좋은 교과서가 되어준다 정도입니다.(롤즈의 사례 분석은 좀 병신 같긴 합니다ㅋㅋ 아 이거 얘기하면 재밌는데… 하여간 학자로서 결론까지 지으려고 하는 거에서 다 실패해서 바보 같은 소리만 나온… 그런 경우더군요. 공적 이성으로 해결되지 않는 문제죠 정치는 원래. 그런 게 가능하면 정치인 없애고 알파고로 처리했겠죠. 결국 학적인 분석이 유의미해지는 지점은 서로 다른 집단들 사이를 공적 이성을 매개로 소통 가능하게 하는 영역인데 그거에 집중을 안 하더군요. 제가 자주 얘기하지만 안락사나 낙태 문제에 대해 미국 의사 협회가 반대하고 있는 것은 매우 합당한데 학자들이 오히려 소통을 방해하고 있습니다. 낙태나 안락사는 의사들의 직업 윤리로 설명되는 의료 행위가 아니라 별도의 구별이 필요합니다. 아니면 의료 윤리 자체가 우스꽝스럽게 되거든요. 적당히 원하는 의사들에 한해서 해당 행위를 할 수 있게 하는 방식으로 의료 행위랑 구별지어주면 되는데 학자들이 외려 의협의 부도덕성을 비난하며 문제를 악화시키고 있죠… 그런 짓만 안 하면 됩니다. 사실 학문이 소통에 도움을 주어야한다는 주장은 피히테가 한 주장인데… 근대 국가는 결국 분업을 할 수 밖에 없고, 이때 생기는 특화로 인한 갈등을 해소하기 위해 학자들이 소통을 돕는 역할을 해야한다는 주장을 학자의 소명으로 주장한 첫 인물이죠. 하여간 앎은 부족하지 않습니다. 환기는 필요하지만요ㅋ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