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의 얼굴을 한 초월철학; 칸트의 삶, 철학, 우리
한 명의 인간을 온전하게 드러낼 수 있는 하나의 공식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우리는 한 명의 인간을 관통하는 하나의 주제를 찾을 필요가 있다. 서로의 삶을 비교하기 위해서, 온전한 삶은 너무나도 복잡하고, 길다. 그것은 루소가 <고백>을 쓰면서 기획했을 법한 시도를 통해서 얻어질 수 있겠지만, 그것은 항상 불완전할 수밖에 없는 기획일 것이다. 우리는 단순화를 통해 하나의 비교항을 드러낼 필요가 있다.
칸트라는 비교항을 제시하기 위해서 우리는 그의 성격을 알 필요가 있다. 칸트 자신이 기술했던 것을 따르자면, 칸트는 멜랑콜리 기질의 인물이다. 멜랑콜리 기질, 이 말은 너무나도 불완전하다. 하나의 삶을 하나의 단어로 치환하는 것은 너무나도 무모한 일이다. 하나의 단어를 하나의 의미로 치환하는 것 역시 너무나도 무모한 일이다. 칸트가 자신을 표현하기 위해 선택한 멜랑콜리가 무수히 많은 멜랑콜리들 중 어떤 멜랑콜리였는지조차 탐구의 대상이지 설명항일 수 없다. 우리는 설명하기 위해서 테마를 드러낼 수 있는 소재, 일화를 끌어들일 필요가 있다. 이것이 성공적이라면, 칸트의 삶, 칸트의 멜랑콜리는 하나의 모티프를 통해 드러날 것이다.
무수히 많은 일화 속에 하나의 일화로 칸트의 삶을 설명하기 시작해야한다면, 어떤 일화가 좋을 수 있을까? 스타로뱅스키가 루소의 삶을 설명하기 위해, 어린 시절 도둑으로 몰렸던 일화를 가져왔던 것처럼, 나 또한 어린 시절의 일화를 가져오고 싶다. 도둑으로 몰린 일화와 달리 유별난 사건은 아니지만, 칸트의 삶 속에서 끊임없이 지속된 하나의 감정을 드러낼 수 있는 조용한 열정을 담은 그런 일화를 말이다. 어린 칸트의 삶은 규칙으로 가득 차 있었다. 이해할 수 없는 규칙들이 그의 삶을 옥죄였다. 김나지움의 삶은 원래부터 그런 것이었다. “원래부터 그렇다”라는 말이 일상화된 곳이다. 이해할 수 없는 규칙이지만, 그것을 따라야만 했다. 좋지 않은 규칙이었지만, 그것을 따라야만 했다. 어린 칸트의 삶은 답답했다. 그는 겉으로는 순종적인 학생이었지만, 속으로는 끌어 오르는 무엇인가를 가지고 있었다. 그는 그가 느끼는 무엇인가를 마주할 수 있는 공간을 찾아냈다. 바로 별이었다.
시골 김나지움의 옥상에 천문대가 있는 일은 흔한 일이 아니었다. 이런 행운은 의도치 않은 결과를 낳았다. 칸트는 답답한 마음일 때면, 옥상에 오른다. 별을 본다. 별들의 힘을 느낀다. 우리에게는 그저 시계처럼 규칙적인 움직임, 기계적인 움직임으로 느껴질 그 빛의 흔적 속에서 칸트는 알 수 없는 감정을 느꼈다. 답답한 감옥에서 벗어나 비를 맞는 한 남자처럼, 갑갑한 집에서 벗어나 동네를 달리는 한 여자처럼, 그는 별 세계에서 자유를 느꼈다. 그는 아직 이 감정이 무엇인지 모른다. 훗날 등이 굽고, 머리가 세었을 때, 그는 이 “무엇”에 “밤의 숭고함”이라고 이름붙이겠지만, 그는 아직 그 이름을 모르고 있다. 그는 단지 규칙과 움직임 너머에 있는, 현실 너머에 있는, 알 수 없는 무엇인가를 느끼고 있을 뿐이다. 삶은 자신이 겪는 이 이해할 수 없는 규칙성 그 이상이라는 깨달음, 그것이 그를 옥상에 서 별을 보게 만드는 원동력이었고, 그것이 그의 삶을 지탱해주는 힘일 수 있었다. 별의 움직임 이상의 것, 힘, 칸트는 별세계에서 자신의 내면에 있는 무엇과 비교될 수 있는 것을 발견한 것이다.
칸트와 별. 세 개의 학위논문을 쓰는 동안 칸트는 별에서 벗어난 적이 없다. 누군가는 그의 논문이 그저 재능 부족한 뉴튼주의자의 장광설에 불과하다고 느꼈을지 모른다. 하지만 칸트는 뉴튼에 대한 존경과 함께, 그를 넘어서려는 욕망에 시달리고 있었다. 뉴튼은 과학의 대상이 현상-이론을 확립하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는 가설을 만들지 않는다. 그는 발생하는 현상의 규칙성만을 기술한다. 수적으로 다뤄지지 않는 것은 앎의 대상이 아니다. 뉴튼에게 있어 “인과”나 “힘”에 대해서 떠드는 일은 에피쿠로스주의자들이 세계를 자신의 망상 속 물체들로 뒤바꾸는 일과 마찬가지의 것이었다. 하지만 칸트는 자신이 “에피쿠로스주의”라는 것을 항상 염두에 두고 있었다. 그는 자신이 밤하늘 속에서 느낀 무엇, 밤하늘을 바라보면서 본 무엇, 별들의 움직임 그 이상의 것을 보고 느꼈던 것을 잊지 않았다. 그는 “교만”에 빠지는 일일지라도, “망상”에 빠지는 일일지라도, 자신이 보고 느낀 것을 포기할 수가 없었다. 그는 꿈속에서 그리워하는 연인을 만나듯이, 꿈속에서 데미우르고스가 되어 세계를 창조하곤 한다. 그는 꿈속에서 한 명의 장인으로서 움직임 뒤에 있는 무엇을 탐구하려고 한다. 그는 자신의 꿈을, 꿈에서 깬 채로 그려보려고 한다.
꿈에서 깬 채로 그려보려는 꿈. 칸트는 내면 속의 조용한 열정을 그렇게 그려내려고 한다. 그는 뉴튼주의를 극복하려고 하지만, 그를 모욕하고 아래로 끌어내리려고 하지 않는다. 그가 그토록 혐오했음에도 김나지움의 규칙을 따랐듯이, 그는 그것들을 세상의 이치로 받아들인다. 하지만 그는 그것으로 만족하지 못한다. 그 너머의 것을 끄집어내려고 한다. 그는 꿈속에서 그것들을 그리는 것으로 만족하지 못한다. 그는 옥상에서 별을 바라보며 공상에 빠지는 것으로 만족하지 못한다. 그는 그저 자신의 내면에서 샘솟는 무엇을 느끼는 것으로 만족하지 못한다. 왜 그랬을까? 그는 분명히 자신의 멜랑콜리 기질을 광기에 연결한다. 그는 자신의 멜랑콜리가 자신을 시령자(영혼을 볼 수 있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의 길로 이끄는 것을 느낀다. 그는 자신이 보는 것을 있는 그대로의 것으로 받아들이고 싶어 한다. 그는 자신이 보고 느낀 것이 진짜라고 말하고 싶다는 유혹을 느낀다. 그가 멜랑콜리를 느낄 때마다, 그는 이러한 “유혹”을 느낀다. 그의 멜랑콜리는 무력감과 소진된 감정으로서의 멜랑콜리가 아니라, 납의 어두움을 걷어내고, 그 검은 그림자에서 꽃피는 빛나는 금을 쫓고 싶은 마음에 가깝다. 그는 유혹을 느낀다. 하지만 그는 이것을 유혹이라고 느낀다. 그는 그것을 받아들이고 싶어한다. 하지만 그는 그것을 받아들여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다. 왜 그랬을까?
“O philoi, oudeis philos”, “오 친구들이여, 친구는 없구나!” 아리스토텔레스의 말은 아니지만, 아리스토텔레스의 말이라고 생각하며 칸트는 이 네 단어를 읊는다. 그는 친구가 없다. 하지만 그는 이 사실을 친구에게 말한다. 그는 친구를 원한다. 그는 자신의 감정을 토로할 친구를 원한다. 하지만 그는 존재하지 않는다. 그는 자신이 별에서 보았던 무엇인가를, 느꼈던 무엇인가를 토로하고 싶어한다. 하지만 그 자신조차 자신이 보고 느꼈던 것을 믿지는 못한다. 그는 그것이 자신의 마음이 만들어낸 공상에 불과하다고 생각한다. 그는 믿고 싶지만, 그것을 믿을 수 없다. 그렇기에 그는 그것을 누구에게도 토로하지 못한다. 자신에게조차 토로하지 못하기에. 그는 그것을 믿을 수 있길 바란다. 그래서 그는 자신을 설득시키려고 한다. 하지만 그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자기”라는 존재는 그에게 호락호락한 존재가 아니다. 그는 멜랑콜리와 다른 완고함을 바로 이 “자기”에서 마주한다. 그는 앎인 것만을 원한다. 설사 내가 보고 느끼는 것일지라도, 내가 그것의 존재를 간절히 바라는 것일지라도, 그것이 정말로 존재한다는 확신이 없다면 그는 거절하게 된다. 바로 이 거절의 경향, 앎에 대한 집요함 또한 “그”였다. 그는 이 친구를 향해 말하고 싶어한다. 그는 그 친구를 설득하려고 한다. 그가 설득된다면, 그때서야 그는 다른 친구들에게 다갈 수 있을 것이다. 그는 자기에게 다가감으로써 친구들에게 다가간다. 친구는 없지만, 그는 친구들에게 말한다. 그들이 있게 될 때까지.
칸트의 철학은 이제 자연의 배후를 넘어서기 시작한다. 그는 자기 자신에게 다가간다. 그의 다가섬은 그가 느끼지만, 이름붙이지 못했던 바로 그것으로부터 비롯된다. 그가 숭고의 감정에서 느꼈던 활력은 그가 그것을 세 가지로 쪼갰을 때도 유지되는 단 하나의 것이다. 세상의 인과, 세상의 힘이 존재하지 않을지라도, 그것의 존재하지 않음을 알리는 것은 “나”의 그 활력일 수밖에 없을 것이다. 칸트는 자신을 그렇게 설득한다. 그는 그 활력, 그 자발성에 “나”라는 이름을, “선의지”라는 이름을, “숭고”라는 이름을 붙인다. 하지만 그 이름은 여럿이라도 그가 느끼는 것은 하나이다. “살아있음” 그는 아버지가 죽은 날 완성했던 “살아있는” 힘의 측정에 대한 논고를 뒤로 한다. 그는 더 이상 살아있음을 측정하려 하지 않는다. 그는 단지 그 힘의 펼쳐져서 만들어내는 것에 주목하고, 그것들을 진실로 만들 도식에 주목한다. 그는 더 이상 하나의 감정으로 자신의 내면을 토로하지 않는다. 그는 단지 보고 느끼는 것으로, 자신 안의 무엇과 자신이 보는 무엇을 설득시키려하지 않는다. 그는 바로 그것이 드러나 만들어내는 흔적들을 가리킨다. 그 흔적들을 가지고서 추측해낸다. 그 흔적을 만든 바로 그 무엇을. 그는 탐정처럼 움직인다. 그는 그 흔적들을 남긴 무엇에 하나의 이름을 붙이고, 그것을 추적해낸다. 추적은 끝이 없다. 바로 그 흔적은 그 자신이 남긴 것이고, 그는 눈을 뽑아 자신을 바라볼 수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는 흔적 속에서 자신의 정체를, 살아 있음을 확인한다.
그는 그 자신을 투명하게 마주하려고 한다. 그 자신이 투명해질수록 그 자신은 선해진다. 그것은 누구에게서나 보일 수 있는 무엇이기 때문이다. 그가 “보편”을 쫓은 것은 바로 그 자신의 투명함에 대한 요구이다. 그것은 사고실험을, 그저 똑같은 규칙을 쫓는 수많은 물질 덩어리들이 등장하는 세상을 상상하는 일을 넘어선다. 그는 자기 자신의 불투명함을 걷어내고, 자기 자신을 투명하게 보고 싶어한다. 하지만 그것을 보는 자기 자신은 불투명하다. 그렇기에 그는 보편성을 요구한다. 자기 자신 앞에 투명하게 드러나는 무엇이려면, 자신의 불투명함을 극복하는 무엇이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는 모든 불투명함 속에서도 드러나는 투명한 것으로서 보편을 쫓는다. 그는 그렇게 자기 자신에게 다가간다. 그렇게 그는 친구들에게 다가간다. 아직은 친구가 없다. 자기 자신조차도. 하지만 그는 그 길에서 수많은 친구들을 만날 수 있을 것이라 기대한다. 몽테뉴가 “O philoi, oudeis philos”에 덧붙였던, “친구는 두 몸을 가지고 있는 하나의 영혼”이라는 말을 되뇌이면서.
그러나 그것이 육신을 부정하는 망상이라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그는 육신이 본성적으로 부정하다는 말을 믿지 않는다. 그는 원죄에 대한 말은, 물리학에서 제1원인을 쫓는 일만큼 어리석은 일이라고 말한다. 그는 분명 원인을 쫓지만, 그 근원에 다가가려고 하진 않는다. 그는 무지의 소치에서 비롯된 발작에는 다가설 수 없다. 그것을 혐오하는 자신을 배신할 수 없기에. 그는 단지 “나”를 쫓고, “선의지”를 쫓으려고 한다. “선의지”라는 투명한 시선을 통해 드러나는 형상인 “나”를 쫓을 뿐이다. 그는 투시도법의 창시자들이 투명하게 색을 드러내려고 했던 것처럼, 투명함을 쫓을 뿐이다. 죄는 그 과정 속에서 드러나는 불투명함이다. 투시도법의 창시자들이 신의 관점을 드러낼 수 없었던 것과 마찬가지의. 그가 육신을 거부한다면, 그것은 그것을 거부할 때 스스로가 조금 더 확신을 얻을 수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자신도 이해할 수 없는 끌림에 의해 어떤 준칙을 따르려고 할 때, 그는 자기 자신의 끌림을 느끼곤 한다. 그의 마조히스트적인 사례 수집에서 그는 괴로움에서 비롯되는 쾌락을 발견하려고 하는 것이 아니다. 그는 스스로가 이해할 수 없음에도 따르게 될 때 드러나는 투명한 무엇을 발견하려는 것일 뿐이다. 그는 쾌락을 거부하는 것이 아니라, 쾌락의 눈속임을 거부하고 있을 뿐이다.
영혼과 유령. 영혼은 볼 수는 없지만 알 수 있는 것이고, 유령은 알 수는 없지만 볼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칸트에게 있어 영혼과 유령을 경계지어줄 가시성과 가지성의 경계는 너무나도 흐릿했다. 그는 자신의 영혼을 볼 수도 알 수도 없었다. 단지 자신으로 착각될 수 있는 유령을 언뜻언뜻 볼 수 있었을 뿐이었다. 그는 그가 보는 것이 유령으로, 그저 사라지는 것이 아니기를 바랐다. 베버가 정치를 꿈꾸는 청년들에게 조언했던 것처럼, 광기를 통해서만 볼 수 있는 유령은 금방 사라져버리는 법이니까. 그는 그래서 유령들을 자세히 살핀다. 그것들을 알려고 한다. 유령은 쉽게 자신을 밝히지 않는다. 하지만 때론 그것들의 이름은 알게 된다. 칸트는 바로 이 이름 있는 유령들에 이념이란 이름을 붙인다. 자유, 진리, 사랑은 유령이다. 하지만 그것들은 그저 사라지는 유령은 아니다. 칸트는 실천이성이 유령이긴 하지만, 그저 사라지는 유령은 아니라고 말한다. 그것은 우리 자신과 분리될 수 없는 유령이다. 그것은 내가 사라지기 전까지 사라지지 않을 유령이다. 그것은 나 자신일 수 있을 유령이다. 그는 그것들에 친숙해지길 바란다. 그는 죽어서 그 유령이 사라지기 전에 그 유령과 함께 있길 바란다. 그는 사후세계를 거부한다. 그것을 바라는 것조차 거부한다. 그는 그가 함께하는 유령과 함께 세상이 물질 덩어리들의 “움직임” 이상의 것임을 보여주는 일에 몰두한다. 그것이 꿈에 불과한 것일지라도, 그는 그 꿈은 배신하지 않는다는 것을 안다. 그는 꿈에서 보던 것을 현실에서 본다. 하지만 그것은 모두에게 투명하게 드러날 수 있는 것이 되었다. 흔적을 쫓는 추적의 기술, 발자국을 쫓는다는 의미를 가진 “탐구”와 함께라면 모두가 볼 수 있다는 것을 안다. 그는 이제 외롭지 않다. 아직 하나 되지 않았지만, 하나 될 수 있을 유령들과 함께 하기 때문이다. 그는 더 이상 “친구가 없다.”고 말하지 않는다. 늙은 자신을 돌보아주는 어린 제자에게 “친구”라고 부른다. 그는 이제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죽고 나서의 세계를 믿어서가 아니라, 삶이라는 세계를 사랑하기에. 그는 불완전한 세계를 있는 그대로 인정한다. 그는 친구를 얻었다. 그는 행복하다. 그렇기에 그는 다음과 같이 말할 수 있다. "그것으로 좋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