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이프니츠와 클라크의 서한
순수한 물리학사, 순수한 철학사에 반하여
1.
라이프니츠와 클라크의 서한집은 뉴튼의 대변자 사무엘 클라크와 라이프니츠가 1715년에서 1716년까지 주고받은 일련의 편지들로 이루어져있다. 서한집은 라이프니츠로부터 시작되는 총 5회(총 10통의)의 논박적인 편지들로 구성되어있다. 한 가지 주목해야할 점은 사무엘 클라크의 답변이 뉴튼주의자 중 한명인 사무엘 클라크 개인의 답변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뉴튼 또한 클라크가 답변을 작성하는데 도움을 주었기에 클라크의 답변은 충분히 “뉴튼주의의 공식적인 입장”이라고 여겨질 만하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서한집의 논쟁을 라이프니츠주의(?)와 뉴튼주의의 대립으로서 이해할 필요가 있다. 다른 한 가지 주목해야할 점은 이 글의 대부분의 내용이 신학적인 내용이라는 사실이다. 이러한 사실은 당대에 “편재하는(ubiquitous)” “필수불가결한(integral)” 사실이며, 우리는 두 사상의 논쟁에서 신학적인 입장과 과학적인 입장을 분리시킬 수 없다.
2.
뉴튼주의는 시간과 공간에 대한 가장 일상적인 직관을 토대로 객관적 공간론을 구상한 것으로 보인다. 그것을 추론할 수 있는 표현은 바로 ‘공간은 신의 센소리움(sensorium)’이다. 이 표현은 계속해서 라이프니츠와 클라크의 편지에 등장하며 논쟁의 대상이 된다. 논쟁의 중심 내용은 ‘센소리움’이 ‘기관’을 뜻하는지, 아니면 ‘감각의 장소’를 뜻하는지, 또는 ‘감각의 장소’를 뜻할 수 있다고 생각할 수 있다는 것인지에 대한 것이지만, 이러한 해석적 문제는 두 사람의 논쟁은 핵심 문제가 아니다. 핵심 문제는 뉴튼주의에서 절대적 공간을 요구하게 된 동기와 연관이 있다.
클라크는 일종의 유비로 ‘공간은 신의 센소리움’이란 표현이 무엇을 뜻하는지 설명한다.(CⅡ.3) 그것은 우리의 정신을 토대로 한 유비이다. 우리는 사물을 지각할 때 상(images)을 필요로 한다. 그런데 상을 불러일으키기 위해선 상이 불러일으켜질 토대가 필요하다.(CⅢ.11) 즉, 무엇인가를 지각하기 위해서는 어떠한 토대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물리적인 대상이 존립할 수 있기 위해서는 그것의 가능성을 담보해줄 토대가 필요하다. 그것이 바로 공간이라는 것이 클라크의 설명이다.
공간의 필요성이 이렇게 제기된 이후에는 신의 속성에 의해 공간의 특성이 설명된다. 그것이 바로 신의 무소부재(Omnipresent)와 편재(Ubiquitous)에 의해 공간의 특성을 설명할 수 있다는 것이다. 즉, 신의 광대함이 절대공간의 광대무변성을 설명하고, 신의 영원함이 절대시간의 영원성을 설명하게 될 것이다. 시간과 공간은 신의 속성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것의 절대성은 가정된 것이 아니라 추론의 결과로 이해될 수 있다는 장점 또한 가진다. 다만 이럴 경우 공간과 시간은 실체가 아니라 속성이 된다.
뉴튼주의가 호소할 수 있는 논증은 우리의 일상직관과 잘 통할 수 있다. 우리는 우리 우주 전체의 사물들이 그것들 사이의 관계는 바꾸지 않고 그대로 옆으로 이동하는 것도 상상할 수 있다.(예컨대 모든 사물들이 동쪽으로 5m만큼 움직이는 일) 우리 우주 전체의 사물들이 옆으로 이동할 수 있다면, 우리의 우주 전체가 애초부터 이동할 수 있는 그 자리에서 생겨났었을 수도 있다. 따라서 우리 우주 전체가 탄생하는 위치가 지금과 달랐을 수도 있다는 것도 상상할 수 있다. 마찬가지로 우리 우주 전체가 옆으로 이동하는 것이 가능하다면, 우리 우주 전체가 사실은 이동하고 있는 것일 수도 있다. 우리는 그러한 가능성들을 충분히 상상해볼 수 있다. 단지 모든 사물들이 다른 변화 없이 위치만 변경하거나, 이동한다고 상상해보면 되기 때문이다. 모든 사물들을 그렇게 변화시키는 것을 상상할 수 있다면, 우리 우주 전체가 그렇게 될 수 있는 가능성 또한 상상할 수 있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시간에 대해서도 비슷한 상상을 할 수 있다. 우리 우주 전체가 탄생한 시점을 앞으로 당겨도 되고 뒤로 미룰 수도 있다.
뉴튼주의는 바로 이러한 직관에서 운동들에 대한 절대적 시공간을 주장한다.
3.
라이프니츠가 뉴튼주의를 반박하는 모든 근거는 충족이유율과 구별불가능자의 동일성 원리이다. 바로 앞에서 우리가 가능하다고 생각했던 상상을 다시 점검해보자. 우리의 우주 전체가 동쪽으로 5m 움직인 상태로 탄생할 수 있다고 상상할 수 있다는 것은 다음과 같은 것을 함축할 수 있다. “창조할 때 수많은 장소 중에 지금의 장소를 선택한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공간이 균질적이라는 것이다. 즉 지금의 장소를 고르나, 동쪽으로 5m 움직인 장소를 고르나 본질적으로 달라지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왜냐하면 우리는 가정상, 사물들의 관계는 그대로 유지시키고 있을 뿐만 아니라, 공간의 균질성하다는 전제에 의해 지금의 장소와 동쪽으로 5m 움직인 장소가 본질적으로 다르지 않다는 것을 전제하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신은 여러 많은 장소 중 딱히 이유 없이 지금의 장소를 골랐어야만 한 것이 된다. 마찬가지의 일이 시간에 대해서도 적용될 수 있다. 창조된 시점과 창조 5분전은 선택의 차원에서 다르게 판단될 근거가 없다. 따라서 신은 창조된 시점과 창조 5분전이 다르지 않음에도 골랐어야만 한 것이 된다.
그런데 충족이유율에 따르면 여러 가능성 중 현실화된 가능성을 선택할 충분한 이유가 없다. 그것은 공간이라는 점과 시간이라는 점에서 균질적이기 때문에 차별할 이유가 없기 때문이다. 또한 그러한 일이 정말로 가능하다면, 구별불가능자의 동일성 원리는 성립할 수가 없다. 우리 우주 전체와, 우리 우주 전체와 동일하면서도 창조 5분전에 창조된 세계는 구별불가능하면서도 다른 것이 되기 때문이다. 따라서 위 두 원리를 근거로 라이프니츠는 뉴튼주의의 시간과 공간에 대한 입장을 비판한다.
그런데 라이프니츠가 충족이유율을 근거로 대는 것은 단순히 충족이유율의 옳음을 전제하고 있기 때문만은 아니라는 것을 이해하는 것이 중요하다.
“충족이유(sufficient reason)”, 그리고 “구별불가능자의 동일성(identitiy of indiscernibles)”이라는 위대한 원리들은 형이상학의 위상을 바꿉니다. 그 학문(형이상학을 가리킴)은 바로 그러한 원리들에 의해서만 그러한 것이 그 자체로 그러하게(real) 되며, 확증적일 수 있게(demonstrative) 되기 때문입니다. 그렇지 않았기에 그것은 그저 공허한 말들로만 주장되었었죠. (LⅣ.5)
여기서 라이프니츠는 충족이유율과 구별불가능자의 동일성 원리를 복수로서 지칭하지만, 구별불가능자의 동일성 원리는 충족이유율의 한 가지에 불과하다. 왜냐하면 구별불가능자의 동일성 원리의 근거가 충족이유율이기 때문이다. 라이프니츠는 충족이유율은 균형상태의 양팔저울에 동일한 무게의 사물을 올려놓는 일에 비유한다. 동일한 무게의 사물을 양편의 올려놓을 경우, 무게라는 점에서 두 사물을 차별할 이유가 없기 때문에 그것은 균형상태를 유지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충족이유율은 곧 “차별하지 않음”과 같다. 라이프니츠는 무게에서뿐만 아니라 도덕적인 이유에서도 마찬가지의 원리를 주장한다. 그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만약 두 사물들이 함께 존재할 수 없으면서도, 똑같이 좋다면(그것은 그것들 자체로 보나, 다른 사물들과 조합에서 보나, 하나가 다른 하나의 이점을 넘어설 수 없다면), 신께서 는 그것들 중 어떤 것도 창조하시지 않을 것입니다. (LⅣ.19)
심지어 그것을 창조하는 것이 좋을지라도 신은 선택할 수 없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신이 특정한 것을 이유 없이 차별하는 것이 되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원천적으로 구별불가능한 것이 여러 개인 것도 이유 없는 차별이 된다. 따라서 구별불가능자의 동일성 원리는 충족이유율에 근거 지어진다.
다시 원래 논의로 돌아오자. 충족이유율과 구별불가능자의 동일성 원리가 사실 다르지 않다면, LⅣ.5를 충족이유율이 형이상학의 위상을 바꾼다는 주장으로 읽을 수 있다. 그런데 여기서 말해지는 ‘형이상학’은 우리가 말하는 형이상학이 아니다. 우리는 형이상학을 하나의 철학적 분과라고 생각하지만, 라이프니츠의 주장을 그렇게 읽어서는 안 된다. 다음을 보자.
일상적인 화법에 따라 말하자면, 수학적 원리는 오직, 그리고 단지 수학(즉, 수들, 도형들, 산술, 기하학)에만 관련됩니다. 그러나 형이상학적 원리들은 더욱 일반적인 개념들, 예컨대 원인과 결과와 같은 것에도 관련될 수 있습니다. (LⅢ.1)
즉 수학적 원리에만 기초해서는 수학 이외의 학문은 담보될 수가 없다. 수학적 원리는 오직 수학에만 적용되며, 수학만을 정당화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물리학은 수학적 원리에 의해 정당화될 수 없다. 특히 물리학은 인과 개념을 포함한다. 따라서 앞에서 언급한 형이상학은 단순히 철학이라는 학문의 한 분과가 아니라, 수학 외의 학문들을 가리키며,(당연히 그 중 하나인) 물리학을 가리키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LⅣ.5의 형이상학은 학문(들)을 뜻한다. 그런데 도대체 왜 충족이유율이 학문을 정당화시켜줄 수 있다고 말하는 것일까?
이는 뉴튼주의가 갖는 귀결을 생각해보면 알 수 있다. 뉴튼주의가 옳다면, 우리 우주 전체는 지금의 장소가 아니라 다른 장소에서 창조되었을 수도 있고, 이동하고 있을 수도 있다. 그런데 이러한 사실은 근본적으로 관찰불가능하다. 왜냐하면 우리가 감각할 수 있는 것은 오직 사물들이지, 공간자체들은 아니기 때문이다. 이는 큰 함축을 갖는다. 즉, 물질들의 운동과 시간적 위치라는 것이 근원적으로 알 수 있는 범위가 아니라는 것이기 때문이다. 더구나 그것은 관찰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신의 선택의 근거 또한 없기 때문에 추론할 수도 없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것에 대해 근원적으로 앎을 가질 수 없다는 것이 도출된다. 라이프니츠는 바로 이점을 지적한다.(LⅤ.51-52) 만약 그렇다면, 물리학은 애초에 근원적으로 알 수도 없는 문제에 관련된 개념을 가지고 왈가왈부하는 것이 되어버린다. 운동이라는 개념은 결국 절대적 운동 개념으로부터 파생된 개념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앎이 애초에 얻어질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결국 학문이 아닐 수밖에 없다. 따라서 그러한 생각은 불합리하다. 이것이 라이프니츠의 추론이었다.
라이프니츠는 여기서 더 나아간다. 그는 뉴튼주의가 그러한 생각을 갖게 된 이유를 짐작해낸다. 그는 이러한 이유를 종족의 우상과 시장의 우상으로 설명한다.(LⅢ.2) 이 두 우상은 결국 인간의 언어사용과 관련된 문제로 연결된다. 즉 어떤 말이 있다고 그 말이 대상을 가리키는 것은 아니다. 말은 말뿐이라 제대로 된 개념을 갖지 못할 수 있기 때문이다. ‘둥글다’라는 말이 있고(때로는 그러한 것이 있다.), ‘사각형’이라는 말이 있고(때로는 그러한 것이 있다.)라고 해서 ‘둥근 사각형’이 말이 되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말뿐인 것이지, 실제로 무엇을 가리키는 것은 아니다. 둥근 사각형은 우리가 쉽게 그것의 오류를 파악할 수 있지만, 모든 것을 그렇게 쉽게 파악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그리고 바로 그러한 말들 중 하나가 공간과 시간이라고 라이프니츠는 지적한다. 그렇다면 왜 (절대) 공간과 시간이 그러한 오류를 갖는가? 그것은 파악될 수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무엇인가가 올바른 개념이기 위해서는 그것은 원리적으로 파악될 수 있는 것이어야만 한다. 그런데 뉴튼주의의 개념은 자신의 사고방식을 신에게 투사한 후 부여한 것에 불과하지, 본인이 직접 파악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말해지지만 근원적으로 파악될 수 없는 것이다. 그렇다면 그것은 비존재에 불과하다. 라이프니츠는 이렇게 뉴튼주의를 비판한 것이다.
학문은 올바른 개념을 다뤄야만 한다. 그것은 앎이기 때문이다. 올바른 개념은 파악될 수 있어야만 한다. 그래야만 올바른 개념으로부터 앎이 얻어질 수 있기 때문이다. 바로 이러한 논리에 입각해서 라이프니츠는 충족이유율이야말로 학문의 근거라고 주장했던 것이다. 라이프니츠의 기준에서 뉴튼주의는 말들을 쏟아내고 있을 뿐, 파악될 수 없는, 그렇기에 존재하지 않는 개념을 다루고 있다. 그리고 바로 그렇다는 점에서 그것은 (충족이유율 이전에 행해졌듯이) “공허한 말들로만 주장”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라이프니츠의 이러한 주장들은 단순히 신학적인 논쟁에 근거한 것이 아니라 학문이 어떠한 것이어야만 하고, 앎은 어떻게 가능해질 수 있는지에 대한 생각에 근거하고 있다는 점에서, 신학에 국한된 문제가 아니다. 그리고 바로 이 지점에서 (라이프니츠의 사상에서의) 과학은 신학이 연결되고 있다. 그의 신학은 “올바른 사고란 무엇인가?”라는 물음에 대한 답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4.
뉴튼주의에 따르면 공간과 시간은 신의 속성이다. 그렇다면 그것은 비물질적인 실체의 속성이 된다. 신은 물질적인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는 이상하게 들린다. 공간과 시간에 사물이 “놓인”다면 사물들은 공간과 시간과 어떠한 관계를 맺을 수 있어야만 한다. 그런데 그것이 비물질적인 실체와 관련된 것일 뿐만 아니라, 그것의 속성이라면 도대체 어떻게 관계 맺어질 수 있는 것일까? 이는 마치 정신과 물질이라는 서로 다른 실체가 상호작용을 한다는 주장과 다르지 않다. 정신과 물질이 상호작용하지 못하는 이유로 지적된 것은 정신과 물질의 상이성이 아니라, 그것이 “서로 다른 실체”라는 주장이었기 때문이다. 만약 공간과 시간이 비물질적 실체의 속성이라면 물질이 그것에 놓인다는 생각은 어떻게 정당화될 수 있을까? 클라크는 이에 대해 답하지 않는다.
우리는 뉴튼을 과학의 수호자로, 라이프니츠를 신학의 수호자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뉴튼은 최고의 과학자이자, 근대 과학을 확립한 인물인 반면, 라이프니츠는 스스로를 ‘신의 변호사’라고 부른 인물이기 때문이다. 우리에게 뉴튼은 과학의 독립성을 주장한 천재 과학자고, 라이프니츠는 신학의 중요성을 강조한 철학자다. 하지만 발제자의 논의에 따르면 이러한 구도는 사실이 아닐 뿐만 아니라, 정반대의 것이 된다. 라이프니츠가 과학의 독자성을 설명하고 있는 반면, 뉴튼은 과학의 절대적 한계를 주장하고 있는 것이 되기 때문이다. 실제로 라이프니츠는 뉴튼주의가 인간의 능력을 과소평가한다고 비판한다. 의미심장하게도 그는 편지의 첫 시작을 자연신학에 대한 논의로 시작한다. 로크주의가 자연신학을 부패시켰다는 말로 첫 시작을 여는 것이다.(LⅠ.1) 여기서 ‘로크주의’는 뉴튼주의를 뜻하고, ‘자연신학’은 학문들을 뜻하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자연신학은 계시 없이 인간의 이성만으로 파악될 수 있는 신성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뉴튼주의가 자연신학을 타락시켰다는 라이프니츠의 비판은, 뉴튼주의가 자연신학적으로 파악될 수 있는 것을 수학적 원리에 국한한다는 점에서 인간의 능력을 과소평가하는 것이며, 물리학 같은 학문에서 신의 절대적 우연성을 계시를 통해서만 알 수 있다고 주장하고 있다는 것에 대한 비판이다. 즉, 학문, 특히 물리학의 독자성을 부정한다는 것에 대한 비판이다. 라이프니츠는 처음 첫 구절부터 이러한 것을 염두에 두고 뉴튼주의를 비판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보았을 때, 우리는 ‘위대한 과학자 뉴튼’이라는 생각과, ‘신의 변호사 라이프니츠’라는 생각의 구도를 재검토할 필요가 있으며, 신학과 과학의 관계를 다시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