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이프니츠라는 수수께끼
최근 여러모로 멘탈이 나갈 수밖에 없던 상황인지라 거의 글을 올리지 못했다.
여러모로 빡치지만 별 수가 없다.
그래도 화형 당해 뒤진 브루노보다는 상황이 나은 것 같기도 하다.(브루노는 키도 작았다)
오랜만에 글을 올리는 김에 재미난 주제를 다뤄볼까 한다.(재미있을지는 모르겠다. 수백년전 사람의 이상한 헛소리를 분석하는 게 재밌는 사람은 많지 않을테니 말이다)
오늘의 주인공은 라이프니츠.
라이프니츠하면 신비스러운 천재의 이미지가 좀 있는 것 같은데(라이프니츠 전문가인 모 교수는 몇 년간 들여다봐야 이게 뭔 소린지 조금 이해되기 시작한다고 말하곤 한다), 딱히 신비스럽지도 않고 딱히 천재인 것 같지도 않다.
오늘 다룰 수수께끼 이전에 이 문제를 약간 밝히고 넘어가자.
라이프니츠는 다방면으로 활동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가 각 분야의 전문가였던 것은 아니다. 내가 이것저것 알고 있고, 각 분야에 대해 이것저것 떠들 수 있지만 그렇다고 내가 전문가는 아닌 것처럼 라이프니츠도 이러쿵 저러쿵 떠들기는 했지만 그 분야에서 전문적으로 사용할 연구서를 집필했던 것은 아니다. 그는 보통 “시론”을 적고 영원히 본론은 적지 않는 유형의 작가였고, 이는 그 스스로가 원한 것이기도 하다. 그는 각 분야의 전문가가 되길 바라지도 않았다는 소리다. 그의 작업은 하나로 수렴된다. 바로 유럽의 평화이다. (지금도 그렇지만) 당대에 종교적인 이유, 정신적인 이유로 갈등이 극심하였다. 라이프니츠는 이러한 갈등을 마무리하는, 모든 의견들이 틀리지 않았음과 동시에 하나 될 수 있는 체계를 기획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의 산만한 연구들은 한편으로는 그가 산만한 인간이었다는 것을 보여주고, 다른 한편으로는 그는 그러한 잡다한 것들이 하나로 엮는 작업을 기획하고 있었다는 것을 보여준다. 지금은 더하지만, 당대에는 슬슬 전문적인 연구자들이 등장하고 있었고, 이들 사이에서의 앎의 차이를 어떻게 이해해야할지 아무도 모르는 상황이었다. 라이프니츠는 이러한 “사이들”을 연결할 하나의 거대한 환상을 구축하는 일에 몰두하였다. 그의 예정조화론이 바로 그것이다. 그의 예정조화론은 보통 환상적이고 공허한 헛소리의 대명사로 여겨지지만, 그의 그러한 환상이 그 자체로 유용하지 않은 것은 아니다. 볼테르도 초기의 저작에서는 사실상 예정조화랑 같은 소리를 주창하기도 했다. 단지 그것이 형이상학적인, 신학적인 믿음이 아니었을 뿐이다. 예정조화론은 하나의 환상이고, 믿으면 좋은 환상이다. 문제는 이러한 환상을 어떻게 믿느냐이다. 믿고 싶지만 믿지 못하는 이들을 위해서는 이러한 환상을 통해서만 설명되는 사태를 보여줄 필요가 있고, 바로 그러한 작업이 라이프니츠의 형이상학이 되겠다. 결국 그의 모든 논증은 우리가 이러한 믿음을 가질 필요가 있고, 이러한 믿음이 과학적 사고와 전통적 사고를 종합해줄 것이란 소리가 되겠다. 이제 근본적인 문제(갈등)는 없다. 탐구되어야할 문제만 있을 뿐이다. 알려고 노력하면 결국 알 수 있다. 이게 바로 신의 섭리다. 단순해보이는 이러한 주장을 좀 더 복잡하고 설득력 있게 한 것이 라이프니츠의 철학이라고 할 수 있고, 이게 단순해보이지만 이것이야말로 진정으로 위대한 과업이기에, 진정으로 천재적인 본인만 할 수 있다는 것이 라이프니츠의 소명의식이었다고 할 수 있다.(우리가 옆에서 보기에는 우스꽝스러운 인물이지만, 그토록 열심히 산 존재에게는 그에 걸맞은 믿음이 있는 법이다. 참고로 라이프니츠가 우스꽝스러운 인물이 아니라고 생각한다면, 그의 삶에 대한 300페이지 분량 이상의 전기를 참고하시라. 당신 또한 웃음을 참을 수 없을테니)
뭐 대충 그의 천재성과 신비한 사고에 대한 말도 안 되는 환상 부여에 대한 비판은 이쯤으로 그만하고, 이제 본격적으로 그의 아리송한 주장의 합리적 근거를 탐구해보자.
내가 오늘 다루고 싶은 수수께끼는 바로 이것이다.
라이프니츠의 유명한 테제이자, 들으면 ???가 떠오르는 이 주장이다:
(성직자라 결혼하지 않은) 아르노가 결혼하였다면 그는 아르노가 아니었을 것이다.
사실 이러한 동일성 테제를 평가하는 것은 매우 쉽고 그렇기에 어렵다.
일단 동일성이라고 했을 때, 그 경계가 애매모호하기 때문이다.
결혼하지 않은 아르노와 결혼한 아르노가 같냐고 물으면 우리 모두 다르다고 대답한다.
하지만 그들이 그럼 다른 인물인거냐고 물으면 문제는 좀 복잡해진다.
아르노란 인물이 결혼을 할 수도 안 할 수도 있다는 것을 받아들일 경우, 결혼한 아르노와 총각인 아르노는 그러한 가능성에 속한 것이기 때문이다.
사실 그래서 여기서부터 문제는 그냥 본인의 전제에 따라 달라지는 것처럼 보인다.
어떤 의미에서는 다르고 어떤 의미에서는 같으니 누가 더 옳다고 얘기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그러니 이러한 테제는 걍 추상적인 테제로서 다뤄질 것이 아니라, 도대체 왜 이딴 븅신같은 공상을 가지고 난리 치면서 떠들고 있는지를 이해할 때에나 분석될 수 있다.
일단 라이프니츠와 아르노 둘 모두 가능한 것에 대해 감각이 있다. 아르노에게 결혼할지 안 할지가 달려 있었다는 것은 둘다 인정하는 “사실”이다. 다음으로 전제되는 것은 라이프니츠에게만 강조되고 아르노에게서는 발견되지 않는 감각이다. 가능한 것이 하나의 존재를 이룰지도 모른다는 공포가 그것이다.
당대에는 우주가 유한한 것이 아니라 무한한 것이 “과학”적인 “사실”로 부상하고 있었다. 우리에게 있어 특정한 과학적 사실이 부상하고 있다는 것은 그저 과학계에서나 떠들법한 사건이겠지만, 당대에는 좀 더 현실적으로 느껴질 수밖에 없는 문제였다. 당대인에게 우주는 신이 인간에게 준 거주지이자, 인간을 위해 선물한 거주지였다. 물론 인생은 고난하지만(당장 칸트의 글만 봐도 낙관론은 보이질 않는다. 인생은 고통이고 뒤지는 게 낫다는 사고는 인류 역사에서 없어진 적이 없을 것이다) 적어도 이러한 것이 질서 정연하다는 것 정도는 환상으로서 공유했다는 소리다. 세계는 인간에게 딱 맞게 주어져있다. 하지만 무한 우주가 등장하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우주가 무한하다는 말이 중의적인 것은 우연이 아니다. 당대에 우주가 공간적으로 무한하다는 소리는 다른 세계가 무한히 존재한다는 소리와 다르지 않았다. 지구세계 다음은 달세계, 그 다음은 태양세계, 그 다음은 행성세계, 그 다음은 별세계가 등장한다. 기러기를 타고 우주 여행을 하는 소설들이 등장하고, 당연히도 그 세계는 우리 세계랑 다르다. 이게 뭔 소리인가 하면, 세계는 딱히 인간을 위한 것이 아니고, 우리 세계가 딱히 더 좋은 것이 아니란 게 되겠다. 다른 세계가 행복하고 좋은 세계고, 우리 세계가 고통뿐인 지옥일 수 있다. 그리고 이는 사실인 것 같기도 하다! 한 마디로 말하자면 정신 승리는 이제 어려워졌다.
이런 무서움에 한 가지 더한 것은 이러한 세계가 저 먼 곳에 있는 게 아니라 바로 내 옆에 있을 수 있다는 공포였다. 현미경의 발견으로 미시세계가 등장했다. 그런데 이 미시세계의 끝이 어딘지 당대인들은 가늠이 되질 않았다. 벼룩이 큰 동물 만큼이나 정교하고, 그들 또한 거시기가 있다는 관찰 결과는 무한히 더작은 세계가 가능할지 모른다는 사고로 이어졌고, 몇몇은 그것을 진지하게 받아들였다.(이러한 사고가 비합리적이게 된 것은 1830년대이다) 당장 로크 또한 자신의 옷을 바라보며, 이 옷감에 무한히 작은 세계, 허나 우리 세계에 뒤지지 않고, 그만큼 정교할 수 있는 세계가 존재할 수 있다는 얘기를 하면서, 다른 곳, 다른 세계를 우리가 생각 못하는 것은 벼룩이 다른 옷감을 생각하지 못하는 일과 비슷할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즉 세계 어디의 작은 부분에도 무한한 세계가 존재할 수 있다는 소리다. 그리고 그 세계에 나와 비슷한 존재가 있을 수도 있다는 소리다. 세계가 무한히 많으면, 그 중에 나랑 똑닮고 똑같은 다른 존재 또한 있는 게 뭐가 이상하냐는 소리가 되겠다. 그리고 이러한 똑닮은 것들 중 뭐가 나인가는 슬슬 진지한 문제가 된다.
이런 질문이 좀 이상해보일 수 있다. 무한한 우주 곳곳에 나랑 똑닮은 것들이 몇 명 더 있다고 내가 누구인가가 혼란이 온다는 것은 아무리 봐도 이상하다. 하지만 김재권의 영혼 논변을 생각하면 생각보다 문제가 심각하다. 나의 정신이 하필 왜 저것에 연결되었는지 알 수 있는 방법이 없으니까 말이다. 당대에도 그런 상황이었다. 데카르트 이후 물질과 정신은 구별되는 실체가 되었다. 뭐 이 두 실체가 겹쳐있다고 생각하긴 했지만, 적어도 영혼은 영원한 세계 속에 있기 때문에 해당 필드랑 겹치지 않는다.(요게 어케 가능한지는 복잡하니 넘어가겠다) 그러니 이제 영혼과 육체 사이를 정신이 잇는다는 생각이 매우매우 중요해진 것인데, 이제 그 정신의 영역이 무한우주로 혼란에 빠진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광대한 우주의 영원한 침묵에 나는 전율한다.” 파스칼은 이러한 무한 우주에 공포를 느꼈다.(여기서 전율은 공포 그 자체다) 파스칼은 무한한 파스칼들의 존재와 그 헛됨에 대해서 공포를 느낀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아르노와 파스칼은 같은 장세니스트지만, 요 문제에 있어서는 생각이 좀 달랐던 것 같다. 실존적인 체험의 무게가 달랐다고 할 수 있겠다. 뭐가 되었든 아르노는 이러한 무한히 많은 존재 중 하필 “나”라는 게 가능한지 딱히 고민하지 않았던 것 같고, 라이프니츠는 이 지점을 파고들려고 했던 것 같다.(그래서 설득은 먹히지 않았다)
라이프니츠가 사용한 표현 중 이런 게 있다. “무한한 우주 속에 같은 나뭇잎은 없다.” 모두가 다르다는 소리인데, 여기서 같고 다름은 이런 맥락에서 중요하다. 이전까지 유일하지 않다(영어로는 singular하지 않다는 소리다. 늬앙스가 훨씬 무겁다는 것을 금방 알 수 있다)는 말은 무한하다는 것을, 내가 하나가 아니란 소리를, 나는 특별하지 않다는 것을 뜻했다는 점에서, 유일한 나뭇잎은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약간 씩 다른 것들이 서로 같은 것은 아니라는 엄격한 기준을 라이프니츠가 가져온 것은 바로 그 유일함을 통해서 특별함으로 나아가려고 했기 때문이다. 결혼하거나 결혼하지 않는 그러한 선택 영역을 동일성에 넣음으로써 특별함으로 나아가려고 한 것이다. 바로 그러한 선택들을 자신의 본질로서 만듦으로써 말이다.
물론 아르노의 결혼 문제는 이런 문제로 확대된다. 네 말이 맞으면 신이 아담을 창조할 때, 그 아담의 본질에 아담의 모든 후손이 본질로서 새겨져 있어야한다는 것 아니냐는 그런 문제로 말이다. 물론 이것은 반직관적으로 보인다. 하지만 당대 과학을 살펴보자. 당대에 현미경을 통해 정자가 발견되었고, 정자는 그 아래로 분석되지 않고 있었다. 하지만 정자의 발견과 작은 동물들의 복잡함은, 이러한 작은 동물들 또한 정자를 가질 수 있을 것이라는 상상을 가능케 하였다. 정자 속에 인간과 똑같은 복잡성을 가진 축소된 인간이 있고, 그것 또한 정자를 가졌을 테니, 그 속에 또 인간이 있고... 이는 무한히 반복될 수 있고 반복되어야만 한다. 그렇다! 아담 속에 그 후손이 다 저장되어있다는 것은 물질적으로 주장되던 소리 중 하나이다. 라이프니츠는 그것을 초본질주의로, 논리적이고도 형이상학적인 주장으로 발전 시킨 것일 뿐이다. 이러한 “축소된 인간”은 다른 것들을 이용해 자라난다. 그 과정에서 이 축소판의 내적 형상이 다른 것들을 인도한다. 누가 들으면 라이프니츠의 모나드론이라고 얘기하겠지만, 이건 당대에 유통되는 범속적인 물질적 세계관 중 하나이다.(저런 내적 형상이 “이데아”라고 명명된 것은 주목할 만한 사실이다) 그러니 라이프니츠의 모나드론은 범속한 세계관을 좀 더 고상히 만든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라이프니츠는 이러한 과학적 담론들을 통해 아르노를 설득하려고 했다. 라이프니츠의 강한 동일성 주장은, 바로 그러한 너의 선택들이 너 안에 들어있다는 것이고, 이 “들어있다”는 한편으로는 물질적이고 다른 한편으로는 매우 관념적인 그런 것이었다고 할 수 있다. 물질적으로 축소판이 안에 있듯, 관념도 안에 있다는 소리 되겠다. 그리고 이러한 선택들이 실재로서 우리를 “이룬다”면, 적어도 신이 우리를 특별하지 않게 만들었다고 걱정할 이유는 없다. 자유의지나 신의 선함이 문제될지언정 말이다.
간단히 말해서 라이프니츠의 초본질주의는 추상적인 테제가 아니었단 게 되겠다. 그의 그러한 주장은 실존적 공포를 해결할 수 있는 관념적 환상이다. 그리고 이러한 환상은 지금으로 따지면 과학적인, 혹은 이성적인 사고랑 동떨어진 것이 아니었다. 세계가 굴러가는 것, 그 속에서 우리가 할 수 있는 행위들을 통해 추론할 수 있는 그런 종류의 환상이란 소리다. 그런 점에서 라이프니츠가 제공한 환상은 믿으면 그 자체로 기분도 좋고, 그 자체를 따져보아도 믿을만한 이유가 있는 환상이라는 점에서 “실천적”이었다고 할 수 있다. 라이프니츠 본인이 반복해서 얘기하는 것이지만, 그의 거의 유일한 관심사는 “도덕 철학”이었으니 이는 놀랄 일도 아니다. 이러한 도덕적 관심 없이 라이프니츠의 형이상학과 논리학을 분석하는 것이 오히려 놀랄 일이다. 분석이 안 되는 데에는 이유가 있는 법이다. 할 말은 많지만 여기서 줄이는 게 나을 듯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