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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인>에 대하여

개선비 2020. 7. 11. 21:01

이하 미독에게 보낸 카톡 복붙


 

아마도 미독은 제 글이 많은 정보를 담고 있고, 해당 분야들을 탐험할 때 도움이 될 수 있을 정도의 인지적 (상상) 지도를 바라셨겠지만, 그런 기대에는 부합하지 못할 것 같습니다. 세넷의 책을 조금 읽어봤지만, 제가 느낄 수밖에 없는 인상은, 한편으로 세넷과 제가 공동 전선에 속해 있다는 것이고, 다른 한편으로는 그럼에도 우리는 화해할 수 없는 사이라는 것 정도입니다. 세넷이 젊은 시절 아렌트에게 동의하지 못했지만 반박하지도 못했듯, 저는 세넷에게 동의하지 못하지만 반박하지도 못할 것 같습니다.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우리는 다르다는 것이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같이 말해야만 하는 것이 있다는 것이죠. 우리가 같이 말해야하는 것은 분명 계몽일 것입니다. 저 또한 계몽을 연구하고 있고(비록 저는 학자에서 많이 벗어나고 있는 재능이 없어 불행한 한 직인이지만) 우리는 계몽을 바라보고 작업하고 있다는 점에서 하나의 길드에 속해있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작업의 목표는 계몽을 재구성하고, 다시 설파할 수 있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죠. 저에게 있어 세넷의 글은 저의 생각과 감정이 교차하는 곳에 놓여 있기 때문에 이를 객관적으로 기술하지는 못합니다. 제가 할 수 있는 것은 제 생각과 감정이 교차하는 모티프들을 세넷의 모티프와 교차시키면서 하나의 직조물을 짜내는 것뿐입니다.

 

시작은 제 취향대로 영화로 시작하고 싶네요. 얼마 전에 얘기했던 <엑스맨: 퍼스트 클래스>로 말이죠. 저는 그 영화에 대해 분석하면서 대립 구도와 시간의 교차를 얘기했습니다. 한편으로 그 영화는 62년 쿠바 미사일 위기 사태를 배경으로 이루어지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제2차 세계 대전 시기를, 나치라는 괴물을 막기 위해 손잡았던 (체계 심리학 용어로서의) 예외상태 시기를 삽입해서 극을 진행하고 있습니다. 시간을 교차시킴으로써 영화는 대립들을 재구성하고, 그들의 역할을 재부여하고요. 제가 이 얘기를 꺼내는 이유는 세넷이 바로 같은 사건을 배경으로 같은 구도를 들고 오기 때문입니다. 우리에게 쿠바 미사일 위기 사태는 남의 일이고, 그것을 나치와 연관 시키는 것은 너무나도 신기한 사고일 수 있겠지만, 그것을 겪은 미국인들에게는 그렇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세넷은 쿠바 미사일 위기라는 사태에서 미국인이 경험했던 공포는 정치적 대립이 아니라, 핵이라는 새로운 존재였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그 존재는 과거 나치라는 괴물과 같은 자궁에서 나온 것처럼 여겨졌던 것이죠. 세넷은 위기 사태 당시에 한 거리에서 아렌트와 마주쳤다고 합니다. 그가 기억하는 당시의 아렌트의 모습은, 당시의 다른 사람들과는 달랐습니다. (아렌트)의 모습은 다른 한 영화의 한 장면을 통해 얘기하고 싶네요. 다리가 무너졌을 때 놀랐던 고니가, 세상이 아름답고 평등하다고 생각하지는 않지만 그래야만 한다고 생각했던 고니가, 다음 해 서울에서 백화점이 무너졌을 때는 놀라지 않았듯이, 아렌트는 놀라지 않고 담담한 모습이었던 것이죠. 그에게 있어서 쿠바 미사일 사태는 2차 대전, 나치의 탄생과 다르지 않고, 핵이라는 새로운 존재는 (<엑스맨>에서 그렇듯) 나치의 다른 모습에 불과했기 때문이죠. 이미 본 것, 그가 생각한 평범한 악, 기술, 그것이 나치와 핵의 공통 근원(여기서 하이데거 풍으로 동근원이라고 말하는 게 나을까요?)이기에, 나치에 놀랐던 그는, 핵에는 놀라지 않았습니다.

 

한번 쉬고 넘어가죠. 세넷은 이러한 구도를 조금 더 복잡하게 취합니다. 아렌트의 기원이지만 아렌트가 뻗어 나와 다른 곳으로 이탈한 하이데거를 언급하면서요. 하이데거도 아렌트와 마찬가지의 반응을 했을 거라고 세넷은 언급합니다. 하이데거는 전 후 나치를 비판하는 의식을 가진 척 했습니다. 하지만 세넷은 그의 사고 전환의 무책임성에 분노를 느낍니다. 세넷이 보았을 때 하이데거는 나치가 가진 환경특수성을 무시하고, 그들 특유의 악행을 인간 악행의 역사로 다룸으로써, “기술적 농업가스실 학살을 한 묶음으로 다루는 역겨운 일을 저지르고 있거든요. 세넷은 아렌트를 이런 조류로 엮지 않습니다. 그에게 있어 아렌트는 실천을, 인간 행위들을 고민한 진지한 사상가이죠.

 

원래의 길로 와봅시다. 저는 <엑스맨: 퍼스트 클래스>에서 자유주의의 다른 얼굴을 보여주고 있다고 주장했었습니다. 감독은 자유주의를 정의하지만, 그것의 정의(定意)로 자유주의의 본질을, 규범을 말하지 않습니다. 감독은 자유주의를 다른 사람의 생각을 훔쳐보고, 움직임을 통제하지만 마음은 움직일 수 없는 것으로서, 규범적 내용을 부여하지 않고 외연만으로 정의내립니다. 그는 이러한 자유주의가 활용되는, 찰스가 자신의 능력을 활용하는 모습을 보이고, 그것이 좋은 결과를 가져왔을 때와 나쁜 결과를 가져왔을 때를 비교해서 자유주의의 규범을 찾아냅니다. 중요한 것은 자유주의의 본질이 아니라 그것의 결과이고, 좋은 결과를 만들어낼 때 자유주의의 얼굴이 무엇이냐는 것이죠. 감독은 찰스가 자신의 능력을 통해 통제가 아니라 공감을 이끌어낼 때, 그때 자유주의가 가진 큰 힘, 진정한 힘이 작동한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열쇠는 우리가 갖고 있지만, 이 열쇠는 우리의 힘만으로 사용할 수 없다. 그것이 감독이 보여준 쿠바 미사일 위기 사태의 교훈, 지금 우리에게도 필요한 교훈인 것이죠. 제가 이렇게 길게 영화 이야기를 꺼낸 것은 세넷도 이와 비슷한 시도를 하고 있는 것처럼 보였기 때문입니다. 물론 그는 자유주의를, 민주주의를 재구성하지 않고 계몽운동과 사회주의를 재구성하지만요. 이를 보기 위해서 아렌트의 자유주의와 그의 사회주의를 나열해보죠.

 

세넷은 아렌트의 자유주의를 로크와 제퍼슨에게서 찾습니다. 그리고 한 마디 덧붙이죠. 아렌트는 자유주의를 고정된 법칙에서 찾지 않았다고, 그는 자유주의가 서야할 곳은 우리의 법칙이 바뀐다는 그 안타까운 사실 위일 수밖에 없음을 밝혔다고 말합니다.(이러한 세넷의 주장은 아렌트의 발화행위중심의 정치이론이 하버마스의 그것과는 다르다는 것을 강조하기 위한 것일 수도 있습니다. 이것은 하버마스에 대한 공정한 관점이 아닐 수 있지만요) 이 말을 조금 더 파고 들어가 보죠. 얼마 전에 18세기 스터디 모임에서 다뤄졌던 시드니의 저작으로부터 시작해봅시다. 시드니는 왕정을 위한 변론가에 진리를 사랑하는 자라는 뜻을 가진 필라레테스라는 이름을, 공화정을 위한 변론가(, 자신)좋은 질서라는 뜻을 가진 에우노미우스라는 이름을 붙이죠. 그에게 있어 왕정제는 최악을 피하기 위해 차악을 선택한다고 떠드는 현명한 척 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진리를 사랑하죠. 하지만 이 사랑은 부재의 징표이고(소크라테스가 필로스에 부재의 의미를 부여했듯이!), 그들은 진리가 이 세계에 없다는 것을, 세속은 악이고 이곳(지금 여기라는 세속은 문자적으로 시간을, 지금을 뜻하죠)의 질서는 최악을 피한 차악, 폭정과 전횡을 통해서만 유지된다고 말하죠. 반면 공화정을 지지하는 이들은 다릅니다. 그들에게 있어 왕정은 악일뿐입니다. 최선을 초월로 두지 않는다면, 가능한 것 중에 가장 좋은 것을 선택할 수 있는데, 왜 그토록 불합리한 왕정을 선택하냐는 것이지요. 그들에게 있어 철학은 지금 여기에 없는 진리를 쫓는 것이 아니라, 지금 여기에 질서를 세우는 일이 됩니다. 공화정은 의미부터 질서 있는 체제를, 지금 여기를 가리키죠. 시드니는 로크의 후예입니다. 로크의 휘그당직계 후손이지요. 로크에게 지금 여기는 무엇이었을까요? 시드니와 비슷하면서도 달랐을 겁니다. 여기서 문제가 되는 것은 바로 지금 여기의 질서입니다. 시드니는 수사로만 논의하기에 지금 여기에 가능한 질서가 있기야 한가라는 물음에는 답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로크는 철학자로서 이에 대해 답하죠. 그의 답은 회의적 해결책 비슷한 것입니다. 질서는 있지만, 그것은 임시변통이고, 그것은 항상 우리가 진정으로 원하는 것은 아니란 것이죠. 로크는 물론 오늘날의 합리주의적 회의주의자가 아니고, 그에게 있어 진정으로 중요한 것은 초월이지 세속이 아니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여기서 세넷이 가져오는 모티프를, 완벽한 것을 추구하지는 않더라도, 그래도 존재하는 질서 속에서 임시변통의 해결책을 가질 수 있다는 모티프를 찾을 수 있습니다. 세넷은 아렌트의 철학을 자유주의, 로크와 제퍼슨(얘는 제가 안 다뤘지만, 얘도 로크와 같은 초월신학의 신봉자라고 보시면 됩니다... 물론 이게 좀 복잡한 게, 독일에서는 이런 걸 초월신학-이신론이라고 부르는데 영국에서는 이런 걸 이신론이라고도 초월신학이라고도 안 부릅니다. 톨랜드 같은 광신자가 이신론이고요... 로크와 제퍼슨을 엮는 그런 용어는 당대에는 없었던 것 같고 오늘날에는 포콕이 말하는 영국의 계몽일 겁니다)에서 비롯되었다고 여겨지는 지금의 질서에 사상적 구조를 부여하는 것이지요.(미국인들이 지금의 정치질서가 이들로부터 비롯되었다는 근거 없는-뭐 베일린이 이 문제에 대한 사실 관계를 많이 밝혀서 근거 없는 것만은 아니지만- 믿음을 갖고 있고, 보통 그 내용은 환상만을 담고 있죠) 바로 완전한 것을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 불완전한 것 안에서 사유하는 것, 앞으로 얘기할 계몽을 자유주의에 부여하면서 말이죠. 하지만 그는 바로 이러한 현재의 질서를 극복하려고 합니다. 아렌트로부터 많은 것을 배웠지만 동의하지는 못했던 무엇을 밝힘으로써 말이죠.

 

세넷의 극복이 무엇인지는 일단 문학적으로 얘기할 수밖에 없을 것 같습니다. 그 자신이 문학적으로 말을 하니까요. 판도라의 신화가 우리의 테마가 되어야 합니다. 판도라는 프로메테우스, 미리 생각할 수 있는 자연적 힘(프로메테우스라는 티탄)이 가져온 문명()이라는 오만을 심판하기 위해 제우스가 보낸 거짓 선물(“모든것에 대한 약속은 거짓약속입니다)입니다. 그것은 아름다움으로 치장되어 있지만, 재앙을 품고 있고, 인간의 헛된 호기심”(이것은 그리스도교만의 악이 아니었습니다!)이 판도라의 상자를 열게 함으로써 재앙이 현실이 되었죠. 아렌트는 이러한 구도 속에서 기술에 대한 맹목적인 복종이 가져오는 재앙을 얘기합니다. 그래서 노동하는 인간의 모습을 육체와 이를 성찰하는 정신으로 구별하고, 바로 정신-판단력에 강조점을 찍음으로써 문제를 해결하려고 하죠.(이런 시도는 매우 칸트적입니다) 세넷은 이 테마에서 어떤 모티프에 강조점을 찍을까요? 세넷의 강조점을 살피기 전에 전 판도라의 신화를 다시 보고 싶습니다. 판도라는 인류 최초의 여자이기도 합니다. 그녀가 세상에 당도함으로써 인간은 스스로를 만들어낼 수 있게 되었을 것입니다. 그녀의 당도는 진정한 하나의 기예를, 재생산이라는 기예를 뜻합니다. 세넷은 프랑켄슈타인이 만들어낸 괴물에 대해서 그것은 괴물이 아니었다고, 밀튼의 서사시를 따르는 한 인간이라고 말하는데 이는 이 맥락에서 매우 의미심장합니다. 괴물이 자신의 창조주에게 요구한 단 하나의 권리주장(창조주로서의 책임을 다하라!)은 자신의 부인이 될 나와 같은 한 존재를 만들어달라는 요구였거든요. 뭐가 되었든 그녀의 존재는 치장하는 기술로 국한되지 않고, 세넷이 지적하듯 발명의 여신이었단 소리입니다. 또한 그녀는 프로메테우스의 동생, “뒤늦게 아는 자라는 뜻을 가진 에피메테우스의 배필이 되죠. 그는 프로메테우스와 같은 지혜를 갖고 있지 않고, 어리석게 여겨지기 쉽지만, 그 또한 프로메테우스의 형제이자 지혜로운 티탄이죠. 판도라와 에피메테우스의 자식이 현 인류의 기원이된다는 신화를 가져온다고 할 때, 우리에게 있어 기술이 가져오는 예기치 못하는 재앙이 프로메테우스가 가져온 문명의 한 힘이라면, 이 힘에 의해 일어난 사태를 (뒤늦게, 하지만 늦기만 한 것은 아닌) 이해하는 것이야말로 에피메테우스의 후예인 인간이 할 만한 일이라고 할 수 있죠. 물론 세넷은 판도라의 신화에서 이러한 해석을 가져오지 않고, 다른 신을, 기예의 신, (세넷은 의도적으로 아테네를 지웁니다. 요것도 좀 재밌는데... 아테네로 가면 아렌트를 못 이기게 됩니다) 헤파이토스를 가져오면서요. 이제 세넷이 판도라 신화에서 가져온 모티프를 봅시다. 바로 판도라의 희망을 말이죠. 그 신화 속 희망은 판도라의 상자에 남습니다. 우리는 덕분에 희망을 갖게 되었다고 말해지죠. 하지만 재앙은 상자에서 나감으로써 현실화되었는데, 왜 희망은 남음으로써 현실화되었을까요? 세넷은 이 문제를 넌지시 언급합니다. 그리고 우리는 한 가지 답변을 생각할 수 있죠. 희망이 상자 속에 봉인되었기에 우리는 희망을 가지고 있다는 걸 말이죠. 희망이 나와 우리가 희망을 너무나도 꿈꿨다면, 그것은 아귀지옥이 되었을 수 있을 겁니다. 광기로 가득 찬 희망은 기술을 가장 큰 악으로 이끌 수 있으니까요. 그렇기에 희망은 상자 속에 봉인됨으로써 희망은 실현되는 것입니다.

 

판도라의 상자에 대한 세넷의 답변은 자유주의와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우리는 조금 더 구체적으로 완전한 것으로부터 거리두기에 도달했을 뿐이죠. 그것은 디드로와 볼테르를 통해 세넷이 말하는 계몽주의와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그는 디드로(세넷은 의도적으로 <백과사전>에서 달랑베르의 이름을 지웁니다. 하지만 제가 언제나 얘기하듯 <백과사전>은 디드로 한 명의 것이 아닙니다)<백과사전>에서, 볼테르의 <캉디드>에서 불완전한 것에 대한 사랑을 노래합니다. “우리는 우리의 밭(jardin)을 갈아야합니다.” 캉디드의 마지막 문장은 팡글로스의 합리주의적 세계관에 대적하는 지금 여기를 가리키는 문장으로 언급됩니다. 비록 볼테르는 농사를 지은 적 없지만, 이 말은 단순히 농사를 뜻하는 것이 아니라, 지금 여기에서 느끼는 하나하나의 발전을 중시하는 문장이라고 세넷은 주장하죠. 이러한 주장은 물론 설득력이 있습니다. 저 또한 그 문장에서 밭(jardin)을 정원(jardin)으로, 볼테르에서 몽테뉴로, <캉디드>의 밭에서 <에세>불완전한 정원으로 시선을 돌리게 될 거 같거든요. 그리고 세넷은 이러한 시선의 움직임에서 계몽을, 로크의 신학에서 장인들의 노하우로, 천국을 향한 대기 장소에서 우리의 삶의 터전으로 바꾸려고 하는 것이겠죠. 그에게 있어 계몽은 로크의 신학과 적당한 현실주의가 아니라, 앎을 위한 용기로, 삶을 조금 더 잘 꾸려가기 위한 우리의 노력으로, 말로 표현할 수 없지만 표현하기 위해 노력을 뜻하는 것이죠. 하지만 여기서 등장하는 기계라는 새로운 존재는, “기술에 대한 물음에서 논해지는 프랑켄슈타인의 괴물, 하나의 독립적인 행위자로 다뤄질 필요가 있습니다.

 

세넷은 기계를 거울로 실체변화시킵니다. 그것은 한편으로 인간을 닮은 것, 다른 한편으로는 인간을 넘어선 것입니다. 세넷은 그것들의 탄생을 기원에서 평가하지 않고, 상호작용에서 평가하려고 합니다.(이런 작업은 벤투리를 연상시킵니다. 철학자는 기원Ur을 탐구하지만 우리는 수원지에서부터 바다에 닿는 곳까지의 경로와 과정을 살펴야한다는 바로 그 언명을요) 그것은 거울이란 것이지요. 세넷은 한편으로는 계몽을 이끄는 원동력이었던 책의 기원인 펄프 산업을, 다른 한편으로는 욕망의 투사하여 우리를 허례허식에 빠지게 만들었던 당대의 자본주의 기업 유리 산업을 다룹니다.(물론 여기서 욕망의 투사는 너무 나간 소리입니다. 세넷은 아쉽게도 유리 공장의 기원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했습니다. 세넷은 거대한 유리를 만드는 기술 문제를 다루는데 이걸 창유리의 문제로 이해하더군요. 창유리는 채광을 위해 크게 만들 필요가 없었습니다. 작게 이어 붙여도 괜찮거든요. 큰 유리는 오직 거울을 위해 만들어졌고, 만들어져야만 했습니다) 그리고 펄프 산업에서는 한 가지 희망을, 우리를 닮지 않았지만 우리의 통제 안에 놓인 골렘을, 유리 산업에서는 한 가지 비극을, 우리를 닮지 않았기에 우리의 통제 안에 놓일 수 없는 괴물을 그려내죠. 여기서 세넷이 이론적으로 허접하다고 평을 내려서는 안 됩니다. 세넷은 여기에서 이론이 아니라 다른 것을 그리려는 것이거든요. 2000년 미국의 선거는 고어와 부시의 치열한 접전 속에서 부시의 승리로 끝이 났습니다. 저는 여기서 고어가 총득표가 높았지만 선거인단의 차이에서 낙선했다는 사실을 언급하면서 민주주의 어쩌고를 얘기하려는 게 아닙니다. 바로 플로리다 주의 투표 문제를 다루려는 것이지요. 플로리다 주는 가장 치열한 선거장이었습니다. 하지만 문제는 바로 투표용지였죠. 새로운 투표용지에 유권자들은 익숙하지 않았고, 그들은 실수로 무효표를, 혹은 공화당을 찍었습니다. 그들의 의지와 상관없이 말이죠. 세일러와 선스타인이 <넛지>에서 보여주었듯이 아무런 의도를 담지 않고 있는 작은 차이들이 큰 차이를 만들 수 있고, 이러한 차이를 의도를 담아 만들 경우 큰 차이를 만들어 수도 있습니다. 물론 이는 설계자의 선의에 달려 있겠죠. 하지만 문제는 선의에만 달려 있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여기서 새로운 기술의 양면성을 있는 그대로 봐야만 합니다. 2000년 플로리다 사건 이후 MIT와 칼텍은 새로운 투표 양식에 관심을 가지고 터치스크린 투표 방식을 설계했습니다. 하지만 그들의 새롭고도 편리한, 그래서 오류를 줄이는 유권자 친화적 터치스크린은 후속 연구에서 그 가치가 없다는 것이 연구를 통해 드러났죠. 새로운 기술은 천공식 투표용지라는 구시대적이고 가장 문제적인 방식보다 아주 약간 나을 뿐이었습니다. 유권자들은 투표용지가 아닌 것 자체에 당황했고, 유권자들의 일반적인 습관은 설계자들이 예측하지 못한 오류를 일으켰습니다. 가장 뛰어난 기술이 가장 뛰어난 선택지는 아니라는 것은 상식적이지만 잊기 쉬운 일반 문제입니다.(저는 의도적으로 제가 즐겨 사용하는 18세기적인 불변하는 자연법칙이란 용어를 배제하였습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그냥 살던 대로 살라는 건가요? 우리는 여기서 절망해야할까요? 답은 당연히도 아니다가 되겠죠. 우리는 터치스크린의 실패에서 터치스크린이 어디에서 실패했는지를 배울 수 있었으니까요. 문제가 된 것은 기술이 아니라 기술을 만들 때 우리가 검토하는 것, 그리고 그 효과를 이해하는 것이 되는 거겠죠. 세넷은 너무나도 당연한 이 사실을 언급하는 것입니다. 그의 3부작의 시작이 되는 <장인>은 하나의 큰 문제를 겨냥하고 있지 않습니다. 어렵고도 지난한 작은 문제을 겨냥하고 있는 것이지요. 그리고 기술은 이럴 때, 그 자체로 나쁘고 좋은 게 아니라, 나쁠 수도 있고 좋을 수도 있는 것이 되는 것이죠. 기술은 인간을 닮은 것도 닮지 않은 것도 아닙니다. 인간을 닮은 것도 있고, 닮지 않은 것도 있기 때문이죠. 중요한 것은 그것이 인간은 닮았냐가 아니라 우리가 무엇을 하고 있느냐입니다.

 

물론 이렇게 얘기하면 세넷이 너무나도 당연한 소리를 너무나도 쓸데없이 길게 늘어놨다고 불평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세넷이 추가한 한 가지 모티프를 다뤄보겠습니다. 세넷이 제기하는 문제는 이런 것이 됩니다. 그렇다면 기술에 대해 누가 평가하냐는 것이죠. 정치가가 평가한다고 답하면 그것이 아렌트의 답변이 된다가 세넷의 입장입니다. 세넷은 여기서 이러한 임무를 복잡하게 만들자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한편으로 이런 문제를 제기해보죠. 정치가는 신이 아닙니다. 그가 모든 것을 알 수는 없습니다. 그의 합리성은 제한적입니다. 이 당연한 사실은 생각보다 어려운 결과를 낳습니다. 정치를 정치인만이 할 수 없다는 결론을 내놓기 때문이죠. 이런 예를 생각해봅시다. 19세기 중후반부터 프랑스와 영국은 군함 경쟁에 돌입합니다. 이 시기에 새로운 기술은 끊임없이 등장했고, 그들은 계속해서 새로운 기술이 탑재되어 있는 새로운 군함을 수주해야만 했죠. 문제는 이것을 평가하는 게 불가능했다는 것입니다. 일단 이런 것도 있죠. 지금 돈이 없기도 하지만, 지금 당장 최신 기술로 엄청난 군함을 만든다면 단기적으로는 이익이 될 것입니다. 하지만 그 군함들을 무력화할 수 있는 새로운 기술이 나온다면, 그때는 돈이 없어 군함을 만들지 못하겠죠. 또한 이러한 기술들의 우위 관계는 복잡하고, 해당 기술이 얼마나 실효성이 있는지 평가하기는 어렵습니다. 당시에 흔들리는 파도 위에서 함포의 조준을 유지하는 시스템을 설계한 회사는 해당 기술에 대한 특허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새로운 군함은 이 기술을 탑재해야만 하는 것처럼 보였지만 해당 회사의 군함은 너무 비쌌죠. 당시 관료-군인들은 해당 기술과 매우 유사한 기술을 갖고 있는 회사의 저렴한 제품을 구매했습니다. 물론 이 회사 또한 이론적으로 그들과 같은 기술을 갖고 있었고, 특허를 우회하기에 문제가 없었습니다. 하지만 이 선택은 매우 큰 문제를 갖고 있었죠. 이 회사의 제품은 흔들리는 배가 돌격할 때는 매우 잘 작동했지만, 배가 가만히 있거나 옆으로 항해할 때는 작동하지 않았거든요. 해당 제품이 프리깃함, 돌격 전투정이 아니라 치고 빠지기를 하며 사격을 해야 하는 함정이었다는 것을 생각하면 관료-군인의 선택은 세상에서 가장 바보 같은 선택이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들의 선택, 그 회사의 제품이 그런 문제가 있다는 것은 많은 기술자도 몰랐으니까요. 특허를 낸 회사의 몇몇 기술자만 해당 문제를 알고 있었고, 그러한 주장도 제기했지만, 너무나도 당연히도 그들의 주장은 팔아먹으려는 술수로 여겨졌고, 그들의 문제제기는 구체적이지 못했거든요. 그렇다면 정치인들은 잘못된 판단을 내린 게 아닌 게 될까요? 문제는 이런 것이죠. 그들이 평가를 내려야하지만, 그들은 앎을 가지고 있지 않다는 것이죠. 그것을 알 수 있는 사람은 정치인이 아니라 아주 사소한 문제를 다루는 장인들이거든요. 세넷은 이런 문제를 제기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는 여기서 완전한 앎을 다시 정치인에게 요구하면 문제가 지속된다고 말하는 겁니다. 세넷은 언급하지 않지만, 그는 정치에 대해서, 민주주의에 대해서 다른 관점을 가져오자고 제기하고 있는 것이지요. 정치에 대한 본질주의가 아니라 효율성을 중시하는 새로운 조류를요. 제가 보통 슘페터-달 계통이라고 부르는 새로운 민주주의자들을 지지하면서요. 민주주의 기원이 되는 총재정부의 민주파에게 민주주의는 전쟁 도구에 불과했던 것 같습니다.(이들이야말로 현대 민주주의의 선구자입니다. 이전에는 민주정이 있을 뿐 민주주의는 없었습니다. 민주정 자체도 매우 부정적인 의미였고요 보통. 스피노자가 유일한 반례인데 이게 그렇게 큰 의의가 되는 것은 아닙니다) 정당성이라는 문제를 해결함으로써 좀 더 병사를 쥐어짜낼 수 있는 그런 도구 말이죠. 그들은 현실 정치 안에서 가장 좌파였지만, 안타깝게도 이런 사고는 현실정치에서 가장 우파인 정치적 본질주의자들과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결국 문제는 정당성이 되고, 정당성을 얻어 힘을 키우면 문제는 해결될 거라고 생각하니까요. 문제는 힘의 부족이지 판단 능력의 부재가 아니란 얘기입니다. 하지만 슘페터-달 계의 민주주의는 다른 계보를, 밀의 계보를 따릅니다. 민주주의는 정당성을 얻기 위한 제도가 아니라 합리적 판단을 내리기 위한 도구라는 주장을 따르면서요. 밀은 (이후 달이 좀 더 엄격하게 논증하는 것이기도 한데) 투표는 평균 수준보다 높은 수준의 사람을 선출한다고 논증합니다. 여기서 끝냈으면 밀은 그저 투표 찬양자가 되었을 겁니다. 하지만 밀은 여기서 문제를 시작합니다. 그럼 어떻게 투표해야 더욱 높은 수준의 사람을 선출할 수 있을까? 밀은 여기서 똑똑한 몇몇 사람을 골라내는 원리를 구상하지 않습니다. 밀은 여기서 우리가 쉽게 알 수 없는 다양한 관점들, 다양한 문제들, 다양한 이해(interest)들을 어떻게 판단의 영역으로 넣는지를 묻습니다. 그에게 있어 높은 수준은 다양성에서 우리가 알지 못하는 것을 논쟁에 넣는 것을 뜻하기 때문이죠. 밀은 그래서 투표 제도의 다양한 가능성을 논의합니다. 전통에 따르는 지역구를 탈피하고 새로운 방식으로 지역구를 만들어보는 가능성, 직군 별로 투표를 실행하는 가능성, 지역구에 국한하지 않고 투표하는 가능성, 한 명에게 투표하는 것이 아니라 여러 명에게 투표하는 가능성, 그는 다양한 투표 제도를 설계하고 예상되는 효과를 비교 평가하죠. 그리고 그의 평가 기준은 중요한 문제임에도 고려되지 않는 가능성을 줄이고, 하지만 문제를 너무나도 어렵게 다루게 되지 않는 제도입니다. 문제 해결은 정치적 결집을 통해 힘을 키워서 이뤄지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중요한 것은 문제를 인식하는 것이 되는 것이고, 그것을 평가하는 것이죠.

 

세넷은 이런 경향에 지지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정치에 대해서 떠드는 것이 굉장한 사유를, 지고한 정신을 발휘하는 것이 아니라, 소소할 수 있는 다양한 문제들을 모으고 해결하는 것으로 보자는 얘기고, 여기에 기술들을 어떻게 활용할 것인지를 보자는 것이죠. 발전하는 기술은 <넛지>에서 보여주듯 재미난 방식으로 사람들의 판단 능력을 보조하는 데 사용할 수 있습니다. 단순히 무의식적인 결정을 내리는 것으로 이끌지 않고, 성찰하게 만듦으로써 판단 능력을 보조할 수도 있고요. 이럴 때 사용되는 것은 하이데거 식의 존재의 목소리에 응답하는 게 아닙니다. “검은 숲에 오두막을 짓고 사는 것도 아니고 말이죠. 성찰은 시간에서 벗어나는 명상 속에서 이뤄지는 것이 아닙니다. 세넷은 사유가 다양한 단계의 반복 작업 속에서 이뤄진다고 말하죠. 그는 다양한 기술이 어떻게 활용되고 활용될 수 있는지, 그래서 그것을 어떻게 적용해야하는지를 고민해야 성찰이 가능하다고 말하는 겁니다. 나 혼자, 철학자인 나 혼자 깨우치면 되는 문제가 아니란 소리죠. 그는 이 점에서 필라레테스가 진리를 얻는 것보다, 제도를 좀 더 낫게 확립하는 에우노미우스가 가능성이 높다고 말하는 게 아니라, 설사 필라레테스가 진리를 얻어도 문제는 해결되지 않기에 에우노미우스가 중요하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아렌트와 달리(여기서 세넷은 아렌트를 직접 호명합니다) 민주주의 문제는 시민에게 너무 많은 것을 요구해서가 아니라, 시민에게 너무 적은 것을 요구해서라고 말합니다. 여기서 요구되어야할 것은 책임 따위가 아닙니다. 요구될 것은 바로 시민들의 판단 능력이죠. 더욱 나은 판단을 위해서는 시민들의 판단 능력이 필요하고, 그들에게 판단의 기회와 장소를 제공하는 것이 정치가의 일이란 얘기입니다. 이러한 입장에서 진정한 문제는 단순히 앎의 부재가 아닙니다. 앎이 적재적소에 없는 것이 문제이지요. 그러니 이제 중요한 것은 감히 사유하라!”고 외치는 일이 아닙니다, 감히 사유할 수 있는 시간과 장소를 만들어야 한다는 얘기죠. 이런 맥락에서 미독이 세넷에서 미국 좌파, 니스벳 등으로부터 발견되는 지능 담론의 낌새를 파악한 것은 적절한 것일 겁니다. 그런 논의가 실제로 필요하니까요(제가 맨날 강조하지만 헬조센식 주입식 교육은 매우 큰 장점을 갖고 있습니다. 미국 좌파들이 단순히 안 당해봐서 찬양하는 게 아닙니다)

 

여기서 바로 세넷은 아렌트와 작별을 합니다. 자유주의가 아니라 사회주의를 말합니다. 예술이 아니라 장인을 말합니다. 아렌트에게 사유는 전문적인 능력입니다. 그것은 정치가들의 임무입니다. 그들은 민중의 삶을 고려하고 인간의 조건을 탐구함으로써 사유를 실현하여 정치를 이룩합니다. 기술은 그 자체로 좋은 것도 나쁜 것도 아니지만, 그들의 통찰 덕분에 좋은 것이 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세넷은 여기서 이런 구도를 거부합니다. 그에게 있어 성찰은 다양한 활동 속에 내재되어 있습니다. 누군가의 전문 직종일 수 없습니다. 어디에서나 성찰은 있어야만 합니다. 정치인의 임무는 다양한 성찰을 수용할 수 있는 제도를 설계하고 이러한 성찰을 반영하는 것이지 그들 자신이 성찰을 독점하는 것이 아닙니다.(저는 여기서 분업보다 독점이란 단어를 쓰고 싶습니다) 자유주의는 옳습니다. 불완전한 정원을 가꾸는 것이 정치라고 말합니다. 하지만 자유주의는 불완전한 정원을 가꾸는 방법을 잘못 이해하고 있습니다.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불완전한 정원을 가꾸는 한 명의 정원사를 기르는 것이 아니라 어디에나 있는 불완전한 정원들을 우리 스스로가 돌보는 것이지요. 그렇기에 사회주의가 듀이 식 실용주의가 중요합니다. 우리는 잊고 있지만 공산주의는 수공업자들의 것이었습니다. 맑스와 앵겔스는 수공업자(장인)들로 이루어진 공산당을 위해 <선언>을 적은 것이지, 그들이 먼저 공산주의자였던 것은 아닙니다. 사회주의의 역사가 과학적 사회주의 때문인지 무엇 때문인지 결국 장인들의 손이 아니라 프롤레타리아트와 이들을 이끄는 혁명가의 손으로 넘어갔지만 모두가 그런 것은 아니었습니다. 윌리엄 모리스가 사회주의자라면 그것은 그가 손을 중요시했기 때문입니다. 그는 맑스와 앵겔스의 <선언>과 다른 것을 수공업자들의 목소리로 들려줍니다. 그에게 있어 사회주의가 중요한 것은 우리의 삶 때문이고, 이는 단순히 자본주의라는 거대한 체계의 문제만은 아닙니다. 모리스에게 중요했던 것은 일을 한다는 체험이었습니다. 자본주의가 나쁜 것은 다른 것이 아니라, 노동 현장에서 체험의 기회가 사라졌기 때문이고, 자본주의가 극복된다는 것은 다시 노동을 체험으로, 즐거움 속에서 한다는 것을 뜻한다는 것이지요. 모리스에게 인간의 삶은 노동 속에서 체험되는 것으로 충만해지는 것이고, 이를 위해 일과 예술이 하나 된, 하지만 그것이 구시대로 돌아가지 않는 사회가 사회주의-공산주의의 실현이었습니다. 세넷은 모리스와 듀이 속에서 이러한 것을 강조합니다. 한편으로 일과 예술의 융합, 다른 한편으로는 일과 정치의 융합. 하지만 이 둘은 결국 노동 환경 속에서 자신의 일을 성찰하며 자신의 삶을 변주할 수 있을 때 가능합니다. 세넷은 제도의 목표에 노동 환경의 개선을 넣되, 체험을 통해 계몽을 위해, 이러한 계몽을 통한 발전을 위해 넣습니다.(단순 구시대로의 복귀를 뜻하지 않습니다) 세넷이 불평하듯이 문화는 한편으로는 고도의 예술을, 다른 한편으로는 관념적 신념만을 뜻하곤 합니다. 세넷은 이것이 잘못된 사고이며, 우리가 다루는 문화를 포괄하기에 협소한 개념이라고 지적하고 싶어 하는 것이죠. 그는 문화가 단순히 자연과 대립되고 물질과 대립되는 그런 것이 아니라, 물질들도 포섭하고 정신도 포섭하는, 한편으로는 사고의 도구이고, 다른 한편으로는 사고의 주체임을 보이고 싶어 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구원은 모든 물질과 모든 자연과 단절하는 특정한 종류의 성찰(철학), 특정한 종류의 활동(예술)로부터 이뤄지는 것이 아닙니다. 도구도 사유하기에 도구가 가진 특징으로 정신의 편향이 생기는 것이고, 이는 도구의 성격을 분석해야한다는 주장으로 이어질 수밖에 없는 것이죠. 그리고 이러한 분석들은 특정한 직업군의 것이 아니라, 자신의 활동을 이해할 수 있는 수많은 사람들을 통해서만 이뤄질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는 우리가 구원 받기 위해서 신이 필요하다고 주장했던 사람에게 탈피했듯, 신의 빈자리를 다른 방식으로 채우려는 시도에서도 탈피하자고 주장하는 겁니다. 이렇게 그는 예술--정치-철학을 연결합니다. 부분적으로 연결되어 있는 수많은 단위체들을 연결하는 새로운 여러 가지 방식들을 고려하면서요. 비용은 줄이고 연결은 늘리는 방식을 찾기 위해 말이죠.(이런 비유는 저에게 메타볼리즘 건축을 연상시킵니다. 도시에 적합한 건축은 오히려 자연을 닮아 있죠. 얼마 전에 언급했듯 인류세의 통찰은 저에게 있어 그저 자연이 문화에 영향을 끼치듯 문화도 자연에 영향을 끼친다는 건전한 상식 그 이상이 아닙니다) 그에게 있어 사회주의, 모리스를 통해서 얻을 수 있는 사회주의는 바로 이것입니다. 맑시즘, 과학적 공산주의, 유물론적 역사철학 그런 게 아니라요.

 

일단 제가 할 수 있는 얘기는 다한 것 같습니다. 세넷은 기술에 대한 비판이 기술 중 특정한 종류, 핵무기 개발과도 같은 특수한 종류에만 국한되어 이미지화되는 것을 경계하면서, 가장 아래의 수준부터 가장 위의 수준의 기술까지를 계속해서 접속하려는 시도를 하고 있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에게 있어 기술은 인간이 만든 하나의 괴물이 아니라, 다양한 존재들이고, 많은 곳에 숨어 있고, 많은 곳에 드러나 있거든요. 그런 관점에서 기술 자체를 옹호하는 시도로 실용주의를 그리고 아마도 그 이름만을 가져온 것일 수 있습니다. 그는 로티와 번스타인 다음은 자신이라고 주장하지만, 제가 생각하기에 세 실용주의자의 공통점은 이름이 리처드란 것뿐이거든요. 뭐가 되었든 그는 실용주의를 관념으로 가져오지 않고, “객관주의와 상대주의를 넘어서”(요것이 번스타인의 업적이죠)는 용도로 가져오지 않고, 다양한 기술들과 생활들이 교차하는 곳들을 보려고 하는 것 같습니다. 그리고 아마 2권에서 다룰 내용은 그가 말한 희망”, 광기로 빠지지 않게 판도라의 상자 속에 봉인된 희망이 어떻게 기술에 의해 세상으로 나와 문제를 일으키는지 보여주는 것인 것 같고, 3권은 이러한 문제를 경계하기 위한 태도들을 다루는 것 같습니다. 뭐가 되었던 세넷은 계몽을 여기로 이끄는 하나의 이미지를 만들기 위해 <장인>을 쓴 것 같습니다. 이것이 아렌트의 <인간의 조건>에서 벗어나, 사변적으로 고대 그리스라는 정신적 장소에서 파악되는 인간의 조건이 아니라, 현장에 입각해서 탐구될 수 있는 인간의 조건탐구로 이어질 수 있게 말이죠. 그는 <장인>을 통해 디드로에 대한 하나의 이미지를, 샤르댕의 정물화와 허쉬먼이 탐구한 상인들에게서 발견되는 고요한 만족의 이미지를 부여하려고 합니다.(저에게 있어 디드로는 전혀 다른 이미지인데 말이죠. 그는 의도적으로 달랑베르와 루소라는 인물들 사이에 있었던 인간 디드로를 지우고 정물화를 그리려고 합니다) “고요한 열정아마도 세넷의 계몽은 이 하나의 단어로 집약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리고 이것이, 제가 해석하는 계몽주의, “행복을 위해 상상력을 극대화하라”, “하지만 그 상상력이 광기에 치닫지 않을 수 있도록 한계를 그어라라는 금언을 따르는 저의 계몽주의와 어떤 점에서 비슷하고 어떤 점에서 다른지는 고민해볼만한 문제죠. 뭐 근데 세넷이야 저랑 달리 철학사가가 아니고 쓸데없는 논쟁들에서 벗어나 조금 더 실용적인 논의를, 그런 논의만을 요청하는 것으로 보입니다.(그에게 과거는 무엇일까요? 정당성의 원천 이상일까요?) 반자본주의 구호 따위가 아니라 지금 여기에 가능한 해결책을 위해서 말이죠.

 

뭐 끝내기 전에 한 가지 덧붙이고 싶은 게 있습니다. 세넷이 말하듯 오펜하이머는 핵무기 개발 이후 죄책감에 시달렸습니다. ‘아메리칸 프로메테우스라는 별명답지 않게 그는 계속해서 뒤를 돌아봤죠. 그런데 정말로 핵은 나치를 없애기 위해 등장한, 하지만 나치만큼 끔찍한 괴물일까요? 핵무기 투하에 대해서 서유럽에는 사용하지 않고 일본에만 썼다면서 인종차별적 논의를 끌고 오는 작자들도 있지만 전 이런 것들은 중요치 않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그런 게 회의에 남아 있으니 그들이 연구하는 거고 그것들은 연구할 만하지만 정말로 중요한 것은 다른 문제거든요. 태평양 전쟁은 상륙전이었고, 상륙전은 큰 희생을 감수할 수밖에 없는 전장입니다. 미국의 청년들은 이미 많이 갈려죽었고, 일본이 항복하지 않는다면 얼마나 더 갈려나갈지 아무도 쉽게 예측할 수 없었습니다.(당대에는 최저 10만인가? 최저 100만인가 무튼 졸라 죽을 거 같다고 예측했었습니다) 그러니 미국은 소련의 공조를 계속해서 요청했고, 그들이 같이 위험을 감수해주길 부탁했던 것이었죠.(이때 소련이 일찍 동부전선에 투입되어 협조하게 되었다면 냉전 양상이 많이 바뀌었겠죠. 갈등이 크지 않았을 수도 있고요) 이런 상황에서 원폭은 투하된 것이고 이것이 예상치 못하게 항복도 받아내게 해줬습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원폭이 그래서 좋은 무기였다는 것이 아닙니다. 원폭 이전에도 항복을 위해 전략폭격을 시행했고(전략폭격을 처음 전장에 도입한 것은 일제니 여기에 욕을 할 생각도 없습니다) 전략폭격으로 죽은 희생자가 원폭 희생자보다 많다는 것도 그 자체로 중요하지 않습니다. 중요한 것은 이 문제기 원폭 사용=악 도식으로 요약될 만큼 단순하지 않다는 것입니다. 원폭을 만들지 않았고, 그래서 미국이 일본 본토에 상륙전을 감행했고, 그래서 미국의 청년들이 수십만이, 백만 이상이 갈려죽었어야 악은 탄생하지 않았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은 아니란 소리입니다. 원폭 투하에 의해 생긴 희생자의 열배 이상의 민간인이 전략폭격으로 죽었어야 악은 탄생하지 않았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은 아니란 소리고요. 문제는 복잡하니 한 기술을 하나의 척도로 이해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세넷은 원폭 개발진이었으나 죄책감을 느끼지 않았던 한 기술자, 자신의 장인적 탁월함에 부끄러움을 느끼지 않았던 한 명의 기술자에 대해 매우 부정적으로 서술하지만, 전 이것 또한 공정하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세상일은 복잡하고 해당 문제에 대해 그런 반응을 하는 것 또한 충분히 예측 가능한 차이들이니까요.(수백명의 사람 중 몇몇이 그렇게 생각한다는 게 그렇게 이상한가요?) 뭐가 되었든 문제를 복잡하게 보자는 소리는 가불기의 주장이고, 이를 위해 많은 분석을 가져오는 것은 항상 도움이 되는 소리 같습니다. 분석 없이 가불기를 쓰려는 놈들은 밴을 때려야하지만요. 뭐 꼭 하만을 염두에 두고 하는 소리는 아닙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