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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류학의 신화, 신화학의 인류

개선비 2020. 6. 26. 17:38

이하 카톡 복붙(미독에게 보내는 카톡)


 

요즘 몸도 너무 안 좋고, 머리도 돌지 않긴 하지만, 그래도 뭔가 책을 한 권 읽었는데 뭐라도 남겨야할 것 같기도 하고, 얼마 전에 미독이 언급했던, 19세기에 이른바 원시 정신에 대한 담론이 증대되었는가에 대한 (언제나 그렇듯) 충분하지는 않지만 그래도 어느 정도의 답을 할 수 있을 듯하여 글을 남깁니다.

 

오늘의 주인공은 디티엔의 <신화학의 창조>입니다. 뭐 근데 이 책의 내러티브는 따라갈 생각이 없습니다. 이 책에 대해서 먼저 평가를 하자면, 이 책은 매우매우 불친절한 저작이고 의도적인지 비의도적인지 모르겠지만, 매우매우 불명료하게 쓰였습니다. 이러한 불친절함이 낳는 효과도 의도될 수 있는 것이기에 디티엔이 의도적으로 이런 글을 썼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은 들지만, 아무튼 전 이런 글은 별로 좋게 평가할 수 없을 거 같습니다. 일단 디티엔 자체가 꽤나 내공 있는 사람일 거 같긴 한데, 항상 암시적으로만 말하고 정확한 테마와 모티프는 밝히지 않고(쉽게 말해 본인이 사용하는 도식을 밝히지 않고) 적당히 암시적으로 진술하기 때문에 뭔 소리하는 것인지 애매할 때가 많습니다. 특히 마지막 장의 경우 새로운 신화 이론이 필요하다고 역설하지만, 모든 언어가 다 비유고 고전어들이라 정말 해당 장은 하나도 도움 안 되는 그런 글입니다. 그래도 도움이 될 만한 통찰을 얻기도 했고, 브루스 링컨의 저작에 비해 참고문헌이 나름 저에게 익숙하여 이 책을 깔아놓고 그냥 제 마음대로 해당 주제를 얘기해볼까 합니다.

 

디티엔도 19세기에 종교, 정신, 신화 따위에 사람들이 매우 열렬히 환호했다는 것을 지적합니다. 우리가 여기서 주의해야할 것은, 이것들이 하나의 언어로 수렴되지 않으면서도 마치 하나의 언어인 것처럼 여겨질 수 있는 주제라는 것입니다. 뭔 소린지 조금 더 풀어보자면 이런 것이죠. 신화, (원시 사회의) 정신, (다양한 사회의) 종교, 따위는 사회라는 새로운 존재자의 등장을 암시함과 동시에 이를 작동시키는 어떤 프로그램을 가리키는 말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러한 말들이 왜 원시”, “미개등으로 뻗어 나갔는지, 그것들이 갖고 있는 의의가 무엇인지를 생각할 필요는 있죠.

 

디티엔이 지적하듯 해당 문제는 계몽주의와 매우 밀접한 상관이 있습니다. 디티엔은 프랑스인답게 프랑스의 고전적인 저자를 토대로 논의를 전개해나갑니다. 그 코르네이유의 조카인, 그 퐁트넬이죠. 퐁트넬은 <우화의 기원>이란 책에서 신화를 다룹니다. 디티엔은 언급하지 않지만, 신화란 말은 18세기 중반 이후에서야 등장한 것으로 보이고(이건 제가 찾아본 게 아니라 정확히 모릅니다), 이전까지는 우화따위로 우리가 오늘날 신화라고 하는 것을 가리켰죠. 그리고 이러한 우화는 한편으로는 교훈적인 이야기 정도로 취급되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그리스도교의 종교에서 벗어난 이교도의 담론이라고도 말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구별에는 당연히 몇 가지 긴장들이 있습니다. 일단 우화라고 불릴 이야기에는 설화나 민담도 포함될 텐데 이게 신화로 퉁 쳐질 수 없다는 문제이고(이 또한 매우 중요한 주제입니다. 뭐가 되었든 정말로 신화란 무엇인가? 뒤메질은 이를 전제하고 연구를 했지만 사실상 사라졌던 학문인 신화학을 다시 창조한 뒤메질 본인조차도 민담과 신화가 어떻게 구별될 수 있는지 모르겠고, 자신이 풀 수 없는 문제처럼 느껴진다고 토로했었습니다), 다른 하나는 그리스도교가 신화랑 뭐가 다른지의 문제일 것입니다. 이러한 긴장을 염두에 두고 좀 더 논의를 진행해보죠. 일단 퐁트넬은 우화에 호의적으로 글을 쓴 게 아닙니다. 항상 그렇듯 기원을 밝히는 저작은 기원으로 돌아가기 위해서나 그 기원을 해부하기 위해 글을 쓰고, 퐁트넬은 후자에 속하죠. 그에게 신화는 그리스도교가 아닌 것, 반도덕적이고 반그리스도교적인 것이었습니다. 이러한 대립은 한편으로 신화 속에 있는 어처구니없는 이야기들의 비합리성과 근친상간 등의 비도덕성 때문에 등장한 것이고, 다른 한편으로는 이를 통해 구별해낼 새로운 도식을 위한 예비 작업인 것이었죠, 퐁트넬의 신화는 신대륙의 미개인들의 신화입니다. 하지만 이러한 미개인들이 야만적이기만 한 것이 아니라, 그리스-로마라는 고대의 인간 삶의 형태(일부러 모호하게 서술합니다)와 유사하다는 게 당대에 문제가 되었습니다. 뭐 이러한 담론은 일단 인지하지 못했던 존재를 이해하기 위해 고전적 저작들을 활용하여 그들을 분석했던 것도 있고, 그들과 유럽의 차이를 부각하는 과정 속에서 유럽의 문명”(일단 이 단어를 쓰겠습니다)이 잃어버린 덕성을 그들이 갖고 있다는 대항 담론이 탄생했기 때문인 것도 있습니다. 그래서 아메리카의 미개인들은 살아 있는, 현재에 존재하는 고대인의 표상을 얻게 됩니다. 이러한 표상은 당연히 실재와 무관합니다. 유럽인들이야 아메리카에서 돈만 뽑아내면 되는 것이었고, 그들이 실제로 그들과 어떤 관계를 맺었는지는 여기서 중요치 않습니다. 그들이 뭔 생각을 했고, 어떤 도식을 발명해냈는지가 중요한 것이죠. 아메리카의 미개인들이 그들이 숭상하던 고대인과 비슷하다는 사태를 어케 이해하냐는 것은 당연히 문제가 됩니다. 이것은 그들이 ‘modern’이란 단어로 표상하던, 과거와는 다른 현대를 어떻게 구하느냐라는 문제와 관련이 있거든요. 중세와 다르다는 의미로 현대를 정의할 수도 있지만, 그것만으로는 중세로부터의 탈피는 정당화가 안 됩니다. 그들은 새로운 질서를 확립해야만 했죠. 그리고 이 과정 속에서 한편으로는 고대 지향적 성향이, 다른 한편으로 고대를 극복하려는 성향이 등장합니다. 그들에게 있어 좋은 것의 원천은 고대였기에, 고대를 지향하는 것은 정당성을 부여해주지만, 고대는 그들에게 있어서 다른 시기고, 돌아갈 수 없는(물리적으로뿐만 아니라 가치적으로도) 질서이기에, 그들은 고대를 극복할 담론도 만들어야했죠. 이런 상황에서 고대와 유사한 것으로 등장한 미개인들을 어떻게 보냐는 문제는, 결국 그들의 현대, 그들의 문명을, 어떻게 그러한 미개인들의 존재에 힘입어 주창되는 반 문명 담론으로부터 지켜낼 것인가라는 문제가 되는 것이죠. 여기서 퐁트넬은 아메리카의 미개인들과 그리스인들이 비슷하다는 것은 인정하면서도, 바로 그렇기에 그들, 즉 고대인을 포함한 그들은 가치가 없고, 우리가 극복해야할 문제로서 표상됩니다. 그들은 그리스도교로 표상되는 종교, 도덕, 법칙 준수가 아닌, 신화, 폭력성, 야만성으로 표상되는 것이고, 그것은 그들의 한계점이기에 극복의 대상이지, 찬양의 대상이 될 수 없다는 논리가 등장한 것이지요. 그렇기에 퐁트넬의 <우화의 기원>은 인간의 어리석음과 무지함, 동물적 특징이 만들어내는 오류를 고발하기 위한 책이자, 유럽 문명과 현대를 지켜내는 장벽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런 계몽적 논의가 도대체 19세기랑 무슨 상관이냐고 물을 수 있을 것입니다. 이제 본격 패달을 밟는 것인데, 이 영역이 매우 어렵습니다. 일단 신화학은 하나의 학문으로 정립했다고 말할 수 없는 요상한 학문 영역이고, 이 영역이 자리 잡고 있는 장소는 폐쇄된 실내가 아니라, 사실상 교차로, 혹은 보이지 않지만, 길이 연결되어 보일 것만 같은 산 너머의 장소 비슷합니다. 뭔 소리냐하면 뭔가 다른 학문과 계속 관련은 맺지만, 실체는 불분명하다는 얘기입니다. 그리고 이 문제를 복잡하게 하는 것은 이것이 한편으로는 문명 담론이, 다른 한편으로는 문명의 기원이라고 여겨질 그리스 문명 담론이 이 문제를 이루게 하지만 대립하는 요소로서 등장하기 때문이죠. 신화를 단순히 정신이상으로 치부하자니 그들의 기원으로 표상될 그리스 문명과 고전을 잃어버리고, 다른 한편으로 이것들을 좋게 치장하자니 야만인들이 문명인을 압도하게 되는, 발등 찍는 주장이 되어버리는 것이지요. 그러니 당연히도 일반적인 신화들과 그리스 신화가 어케 다른지에 대한 논의도 등장하지만, 중요한 것은 이것들이 논의되면서 어떻게 굽이지는지를 확인하는 것이겠죠.

 

퐁트넬의 구도에서 신화와 종교가 대립하고, 미개와 문명이 대립한다고 말했습니다. 하지만 종교담론은 쉽게 그렇게 짜여질 수 없죠. 종교를 극복하려는 담론에서는 오히려 종교가 악의 역할, 정신을 억압하고, 인간을 조이는 역할로 등장합니다. 즉 종교는 그리스도교라기보다는 유대교적인 것으로, 율법주의로, 인간의 정신을 억압하는 폭정으로, 그렇기에 즐거움이라고는 모르고 돈만을 아는 천박한 이기주의로도 표상됩니다. 반대로 신화는 자연과 상호작용을 하며, 자연을 설명하려는 시도로, 창조적 정신을 통해 과학을 탄생시키는 역동성의 원천으로 끌어올려지기도 하죠. 그리고 이러한 구도는 그들의 우방으로 민족-언어학을 가져옵니다. 민족과 언어는 신화를 매개로 합니다. 프랑스로 표상되는 로마적인 전통에 대항하기 위해 범게르만으로 분류될 법한 인간들은 게르만적 신화를 만들어내려고 합니다. 그들은 프랑스에 비해 후진국이지만, 이는 일시적 현상에 불과하며 자신들이 가진 정신성이 있다고 주장하려고 하는 것이지요. 이러한 시도는 한편으로는 게르만족의 기원을 찾으려는 시도들로 연결되어, 초반에는 성서, 그 다음에는 트로이가 그들의 원천으로 지목되었지만, 비교 언어학이 발전함과 동시에 그들은 인도-게르만 어족이라는 새로운 유형, 아리아인이라는 새로운 유형을 마주할 수 있게 되는 것이죠. 그리고 아주 자연스럽게도, 이는 대립항을 가지고, 샘 어족, 샘족이라고 표상되죠. 이들의 대립은 앞에서 언급한 대립을 그대로 가져오고 거기서 변주가 일어납니다. 다만 긍정의 언어는 항상 신화 대신 아리안족으로, 샘족 대신 종교로 표상될 뿐이죠. 그리고 한쪽을 긍정항으로 잡으면 이제 상대 쪽들을 반문명이든 억압이든 안 좋은 것으로서 표상하고, “현대는 이러한 악(디티엔의 용어를 빌리자면 스캔들’)으로부터 보호되어야한다는 도식이 짜여집니다. 여기서 재미난 변주들이 가능한데, 그리스와 로마를 구별하는 방식으로, 소크라테스 이후와 소크라테스 이전을 구별하는 방식으로, 유대교와 그리스도교를 구별하는 방식으로, 로마화 이전의 그리스도교와 로마화 이후의 그리스도교를 구별하는 방식으로 무한히 구별의 논리를 증대시킬 수 있죠. 중요한 것은 가치의 포인트를 어디로 두냐는 것이고, 이러한 구도에 맞춰 반문명, 반현대를 규정하고, 한편으로는 이를 미개부족에게 투사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이를 내부에 투사하여, 세상을 구해낸다는 내러티브라고 할 수 있습니다. 디티엔은 에드워드 버넷 타일러가 꽤나 급진 개신교도였고, 그들이 가진 고유한 이념, 즉 개신교적 백색국가 청사진”, “혁신주의를 원시 문화와 결합하여, 원시 문화의 극복으로서의 백색국가, 문명, 혁신을 주창했다는 진단을 내놓기도 합니다.

 

뭐 이런 논의는 이제 반쪽자리의 답변이었죠. 중요한 것은 레비-브륄과 인류학입니다. 일단 디티엔은 레비-브륄을 글케 강조하지 않고, 재밌게도 뒤르켐 이전으로 레비-브륄을 보지 않고, 뒤르템 이후로 레비-브륄을 다룹니다. 찾아보니 재밌게도 브륄의 본격 야만 정신저술은 20년대 이후에 등장하고, 뒤르켐이 시기적으로 앞서더군요.(그럼 도대체 로이드나 컨퍼드는 왜 이를 역전시켰는지가 궁금해지는데 이건 아직 모르겠습니다) 디티엔의 구도는 매우 특이합니다. 일단 뒤르켐을 오히려 카시러와 엮고, 레비-브륄은 레비-스트로스로 이어질 조류랑 엮습니다. 그리고 불분명하지만 전자를 더 긍정적으로 평가하는 것으로 여겨집니다. 일단 디티엔에 따르면 두 레비의 전략은 자율성 옹호입니다. 레비-브륄은(사실 이전에 이미 등장한 조류이지만) 구송전통과 신화를 엮고, 문자가 없는 곳의 종교로서 신화를 그려냅니다. 그리고 이러한 신화는 그들에게 청각적 체험의 장을, 신성함을 주입하는 독특한 정신 영역으로서 그려집니다. 그렇기에 신화->종교의 테크는, 발전론적 구도가 아니라, 공존 가능할 수 있는, 서로 다른 영역으로서 그려질 수 있는 것이지요. 그러면 뒤르켐-카시러 계는 뭐라고 봤느냐?하면 발전론이긴 발전론이지만, 신화를 부정적인 것으로 그리는 것이 아니라, 정신적 역동성의 원천으로 그리는 것이지요. 어느 쪽에 무게를 두는지로 뒤르켐과 카시러는 구별되지만(이는 디티엔의 구별이기도 합니다), 결국 일원론적 원천과 변형원리에 의해 하나이면서 여럿이란 게 가능해진다는 구도를 따르는 것이지요. 일단 일케 이 도식을 소개하고 인류학의 문제로 넘거가겠습니다.

 

인류학이 왜 중요하냐는 역사학이 왜 중요하냐는 물음과 연결됩니다. 이 두 학문은 유럽이 현대를 표상함과 동시에 등장한 학문으로 한 학문은 공간의 종합을, 다른 학문은 시간의 종합을 상징한다고 할 수 있죠. 역사학이 호고가(好古家:antiquarian)들의 수집품과 수집기술을 바탕으로 이를 종합하여 하나의 내러티브(포칵이나 그래프턴의 용어를 빌리자면 철학”)을 이루어냈듯이, 이제 유럽을 세계 속에 위치하는 작업도 필요했다는 것입니다. 이를 위해서는 한편으로는 민속지들을 수집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이러한 수집을 과학화할 규칙들을 설립할 필요가 있죠. 역사학은 이러한 과학화를 고전학에서 빌려왔고, 인류학도 어디선가 가져왔을 거라고 추측할 수 있을 겁니다.(이는 넘어가겠습니다) 이러한 기술들은 현대를 표상할 중심 가치를 어떻게 뽑아낼 것이냐와 연결되는 작업이자, 기존의 질서를 흔들, 즉 반문명 담론을 만들든, 다른 국가에 귀속되어 있는 문명성을 자신의 국가로 탈취하든 가치를 흔들 언어로서 필요했던 것이라고 할 수 있죠. 원시 문화, 원시 정신을 다루는 텍스트들이 중립적인 학문이길 추구하려고 해도, 그들은 이러한 구도에 말려들어갑니다. 그들의 언어 자체가 이에 동원될 수 있는 원천이 되고, 그들의 학문이 사람들에게 중시될 수 있는 원천이 바로 그러한 욕망이니까요. 막스 밀러와 같은 인물이 샘어족vs아리안어족 구도를 깨기 위해 존슨 박사의 삼원 도식, 즉 알타이어족을 추가하는 도식을 따랐어도, 그의 책에서 알타이어족은 들러리와 같고, 항상 두 어족의 특징적 대립이 그려지고, 이러한 대립이 가치를 포함하는 방식으로 재도식화된 것을 생각하면 그러할 수밖에 없는 것이기도 합니다. 세계에 대한 파편적 지식들이 증대되는데, 이들이 그들의 유형 구별 논리를 안 따르면 그것도 이상한 것이겠지요.

 

뭐 여기에 몇 가지를 더할 필요가 있을 겁니다. 디티엔은 고전학 백그라운드의 사람이고 그래서 두 개 장을 아예 고전학 문제로 귀속시킵니다. 학문이란 것 자체가 뮈토스와 로고스의 싸움이었고, 이러한 뚝배기 깨기작업 속에서 플라톤이 뮈토스와 로고스를 종합한, mythology란 단어를 창안했다는 것은 매우 중요한 일이죠. 디티엔의 책 제목은 한편으로는 이러한 “mythology”를 가리키고, 다른 한편으로는 이러한 창안이 고전학적 “invention”과 결합되어 있음을 암시합니다.(그런 점에서 번역된 책 제목은 정말 개병신같습니다) 뭐 여기서 고전학 안에서의 구송문화vs문자문화 담론, 고전학이 왜 신화의 문제랑 관련 있는가는 앞의 설명으로 퉁치도록 하고, 학문이란 것 자체가 하나의 신화 제작이자, 기존의 제작과는 다른 제작이라는 주장은 꽤나 중요하다고 봅니다만, 이를 가능케 하는 철학을 어디서 구할지는 디티엔도 링컨도 모르죠. 굉장히 느슨한 답, 전자는 그냥 뭔가 알 수 없는 주술적 언어로 이론의 탄생을 요청하고 후자는 주석 달기라는 답을 내놓을 뿐이죠. 전 철학이 필요한 이유가 이것이라고 봅니다. 디티엔이 카시러(참고로 번역본에는 카시레르로 등장합니다)를 중시하는 것은 제 주장에 동의, 즉 카시러가 그러한 작업을 수행하려고 했다고 평가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만, 역시나 확신할 수 없는 글쓰기로 꼬리를 감춥니다. 디티엔의 이러한 불명료함은 니체에게 너무 명료하다고 불평한 바그너를 떠올리게 만들면서 다시 절 빡치게 하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