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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이 포 벤데타>에 대한 코멘트

개선비 2020. 3. 30. 13:43

혁명가의 사랑 - 정치와 사랑은 함께할 수 있는가?

 

브이 포 벤데타의 브이는 사랑을 모르는 존재이다. 그는 다신 사랑할 수 없을 줄 알았지만, 이브를 사랑하게 된다. 하지만 그는 그 사랑을 거부한다. 그것은 그에게 속한 것이 아니기에. 그는 사랑할 수 없는 존재로서만 존재할 수 있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그는 왜 그렇게밖에 존재할 수 없는 것일까? 그가 번방의 남자에서 브이로 바뀌었기 때문이다. 그는 한 남자에서, 다른 존재가 되어버렸다. 그날 번방의 남자는 죽고 브이가 태어났다. 제목에서와 같이 그는 복수를 위한 존재이다. 그는 자신을 죽인 존재들에게 복수하고, 새로운 미래가 열리는 것을 위해 존재한다. 그는 오직 그것들을 위해서만 존재한다. 그의 존재는 바로 자기 자신으로서가 아니라, 바로 그가 향한 것, 그가 향한 것을 위한 것으로서만 존재한다. 그는 그렇기에 이념의 화신이다. 그의 존재는 그의 이념, (민주주의) 혁명과 같다. 그는 오직 그 이념을 위해서만 존재하기 때문이다. 그는 그 이념의 대리자일 뿐 다른 그 무엇도 아니다. 그렇기에 그는 죽을 수 없다. 그는 그의 몸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는 총을 맞아도, 칼에 찔려도, 일어나 그가 해야만 하는 일을, 아니 그가 존재함으로써 발생하는 몫을 수행한다. 아무리 총을 쏘아도 죽지 않는 브이를 향해 한 인간은 묻는다. 도대체, 도대체 왜 죽지 않는 것이냐고. 브이는 대답한다. 이 살덩어리 뒤에, 이 육신 뒤에, 이념이 있다고. 그 이념은 죽지 않는다고. 그렇기에 브이는 죽지 않는다. 그는 오직 이념의 화신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바로 그가 이념의 화신이기 때문에 그는 사랑할 수가 없다. 그는 이념의 화신이기 때문에, 한 인간일 수 없다. 그는 구체적인 개별자, 한 남자로서 이브 옆에 있을 수 없다. 그는 구체적인 개별자, 한 남자가 아니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그는 이브와의 사랑을 거부하고, 죽음을 향해 나아간다. 이념은 죽지 않는다고 말하지 않았던가? 그렇다. 이념은 죽지 않는다. 총과 칼에, 육신의 부서짐에는 죽지 않는다. 하지만 이념은 죽는다. 그 이념이 실재가 될 때, 혹은 그 이념이 자신의 일을 끝마쳤을 때. 혁명을 위한 이념의 화신은, 혁명의 완수와 함께 사라진다. 더 이상 그 이념이 존재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는 죽을 수밖에 없으며, 죽어야만 한다. 구시대와 함께, 자신이 향해 있는 미래에 자신이란 이념은 존재할 수 없기에. 그렇기에 그의 주검은 구시대를 상징하는 건물과 함께 폭발한다. 구시대를 폭파시키는 브이라는 이념, 혁명이라는 이념은 구시대와 함께 폭발함으로써 소멸한다. 미래에 그의 자리는 없고, 설사 남더라도, 그는 그 누구도 아닌 존재이게 될 것이기에.

 

누구도 아닌 존재가 된다고? 그렇다. 브이가 누구였냐고 묻는 물음에 이브는 다음과 같이 답한다. 몬테 크리스토 백작이었던 존재, 아버지였던 존재, 어머니였던 존재, 나의 친구였던 존재... 당신이었던 존재, 였던 존재, 그리고 우리 모두였던 존재. 그는 구시대 속에서는 모두였다. 바로 다음시대로의 이행, 혁명이 바로 그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제 혁명은 완수되고, 그는 과거로, 아니, 과거완료로, 영원한 과거 속에 남는다. 오직 기억으로서만, 대과거로 기억되는 존재로서만. 혁명의 막바지에 우리 모두는, 구시대의 모두는 브이로서 혁명을 완수하기 위해 한 자리에 모인다. 그들 모두 가면을 쓰고 브이로서 존재한다. 하지만 혁명이 완수되는 순간, 그들 모두는 가면을 벗고 그들 자신으로 돌아간다. 그렇다, 브이는 오직 가면으로서만 존재했고, 모두가 그의 가면을 벗음으로써 그는 사라진다. 그는 개별성이 없는 존재이다. 이념의 화신이자, 이념의 상징 그 자체였기에, 그는 혁명 과정에서는 그들 모두였지만, 혁명과 함께, 그 어느 누구도 되지 못한다. 그는 보편의 관점에서는 모두인 이념이지만, 개별의 관점에서는 누구도 아닌 존재일 뿐이다.

 

사랑은 개별자와 개별자의 만남이자 결합이다. 사랑은 오직 개별적인 것들만 할 수 있는 마법이다. 개별자들이 개별자들의 한계를 넘고 하나가 될 때, 개별자들이 개별자라는 한계 속에서, 그들의 한계를 넘어설 때 사랑이 솟아오른다. 브이가 번방의 한 남자일 때, 진정한 사랑을 가졌던 한 인간은 자신의 사랑을 남겼다. 그녀는 브이가 어떤 존재일지라도, 그가 어떤 개별자라도, 그가 남자든 여자든, 그가 백인이든 흑인이든, 그가 크리스찬이든 무슬림이든, 단지 그가 그 자신이라는 이유 하나만으로 사랑한다고 고백한다. 누군지도 모르고, 앞으로 만날 수도 없고, 함께 울고, 함께 웃을 수도 없고, 키스할 수는 없지만, 그녀는 인간 모두에게, 하지만 전체가 아니라 바로 그들 한명 한명에게 사랑을 고백한다. 진심으로, 열렬히. 그녀는 사랑하는 존재로서 존재한다. 그녀는 사랑 앞에 당당했고, 사랑 앞에 진실했다. 사랑이 그녀를 가족으로부터 쫓겨나게 만들었고 사랑이 그녀의 육신을 멸하게 만들었다. 그럼에도 그녀는 사랑으로서 살았고, 사랑으로서 죽었다. 그녀는 고결하다. 사랑하기에, 아니, 사랑이기에. 모든 개별성을 포용하는 것, 그것이야말로 사랑이다. 사랑을 통한 하나됨은 그렇기에, 차이를 소거하지 않는다. 그렇기에 사랑은 이념이 아니다. 그것은 삶이지, 삶과 다른 이념이 아니다. 그것은 육신에서 피어나는 것이지, 육신과 다른 것이 아니다. 그것은 총알로 뚫을 수 없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육신과 육신의, 개별자와 개별자의, 차이와 차이의 이끌림(sympathy; 나는 이 말의 오래된 쓰임을 말하고 싶다)이다. 이유는 중요하지 않다. 우리는 다른 존재와 이끌린다. 무조건적으로. 사랑은 그렇기에 복수도 모르고, 혁명도 모른다. 그것은 어떤 것을 위한 것이 아니다. 그저 자신인 것이다.

 

번방의 남자는 그녀의 사랑에서 피어나는 고결함 덕분에 삶을 이어갈 수 있었지만, 화마 앞에서 그녀의 사랑을 놓쳐버렸다. 그렇게 번방의 남자는 죽어버렸다. 화마 앞에서 그 남자는, 남자도 여자도, 백인도 흑인도, 크리스찬도 무슬림도, 그 어떤 것도 아닌 존재가 된다. 그의 살은 타들어가, 그의 모습은 그저 살덩이가 된다. 그의 육신이 그저 껍데기라는 것, 그저 살덩이라는 것, 그것은 화마가 남긴 상처이자, 그가 사랑이 아니라 이념이 되면서 생긴 상처이다. 그렇다. 그의 육신이 그저 살덩이기만 한 것은, 그가 이념이기만해서이다. 이렇게 혁명과 사랑은 멀어진다. 사랑은 이념을 없애고(사랑의 그녀는 기억한다. ‘사상이란 단어가 두려웠다고), 이념은 사랑을 없앤다. 정치와 사랑은 그렇기에 함께할 수 없다.

 

그렇다면 우리는 무엇을 선택해야할까. 영화는 사랑을 선택하는 것처럼 보인다. 이브. 최초의 여자, 선악과를 따먹음으로써, 신에게 복종하길 거부함으로써 처음으로 사랑을 깨우친 존재, 그녀는 브이를 넘어선다. 모두가 브이를 이념으로만 볼 수 있지만, 그녀는 그의 사라져버린 육신을 발견해낸다. 그녀는 115일을, 화약 음모 사건이 아닌 한 남자를 기억한다. 모두가 인간이 아니라 이념만을 기억한다. 인간은 실패하고, 체포되고, 처형되고, 잊혀지니까. 하지만 그녀는 망각을 넘어선다. 잊혀진 것을 기억해낸다. 신념이 아니라 인간을, 사건이 아니라 한 남자를 기억함으로써. 브이는 육신이 없다. 하지만 번방의 남자는 육신이 있었다. 그녀는 브이에게 그저 도구이기만 했던 그 흔적기관에서, 번방의 남자를 발견했고, 그를 사랑하게 되었다. 브이 자신도 잊고 있었던 그 남자를. 그렇다. 인간은 이념에서도 인간을 들여다 볼 수 있는 것이다. 인간이기에. 고결하기에. 사랑하기에. 사랑으로서 존재하기에. 브이의 사건은 성공했다. 하지만 이 영화는 슬픈 영화일 수밖에 없다. 우리 또한 인간이기에. 사건도 이념도 아닌 인간을 먼저 볼 수밖에 없기에. 브이의 성공이 아니라 번방의 남자의 실패를 먼저 보기에. 한 남자를 기억하는 한 여자를 보기에. 그녀가 사랑하는 한 남자를 보기에. 그렇다 우리는 인간이고, 인간이기에 우리는 사랑으로서 존재한다. 닮은 것이 닮은 것을 먼저 보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