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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을 긋는다는 것. 명암을 만든다는 것.

개선비 2020. 3. 3. 12:08

선을 그어 보아라. 선을 긋는 것을 상상할 때 우리는 흰 바탕에서 솟아오르는 검은 섬을 떠올린다. 주어지는 것은 흰 바탕이고, 우리가 만드는 것은 검은 섬들인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상상은 근본적으로 잘못되었다. 흰 바탕을 만들기 위한 노고가 잊혀 졌기 때문이다. 흰 바탕은 그 자체로 주어지지 않는다. 우리는 검은 바탕에서 시작하며, 검은 바탕을 깎아내어 흰 바탕을 만드는 것이다. 흰 색은 항상 정제를 필요로 한다. 그것은 판화에서처럼 검은 바탕에 대한 폭력으로 획득된, 최상위의 인위성이다. 우리는 흰 드레스와 흰 케이크의 역사를 들여다봄으로써 이러한 진실을 목격할 수 있을 것이다. 흰 색은 폭력의 극대화, 권력의 정점을 상징하는 색이다. 그것은 그 자체로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극도의 잔혹성을 통해 형성되는 종류의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흰 바탕을 떠올린다. 그것도 아주 쉽게. 그것은 우리의 상상이 폭력에 기반하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가 상상을 통해 떠올리는 흰 바탕은 차이들이 상상적으로 극대화 된 공간이라고 말할 수 있다. 흰 바탕은 모든 차이가 무화할 정도로 거대한 시선에서 보는 하나의 관점이며, 그 관점 속에서 모든 차이는 무화됨으로써 하나의 관점을 가능케 하는 공간이 탄생한다. 태초에 세상은 혼돈, 즉 검은 무한이었지만, 신으로 인해 세계가 흰 무한이 된 것처럼. 하지만 그 속에는 모든 것이 동등할 정도로 차이를 지닐 수 있다. 공통의 척도가 존재하지 않으니, 모든 것이 무차별적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무관심의 무한이며, 차이 없는 무한한 차이다. 차이를 내적으로 극대화하자 결국 차이는 소멸하는 것이다. 하얀 무한의 관점, 그 속에서 모든 것은 의미를 잃고, 우리는 세 번 헛되도다!”를 외칠 수밖에 없다. 욥의 노래, 힌두 신화 속에 등장하는 아이의 입 안에서 바라봐지는 세계가 바로 이것이리라. 그 속에는 우리의 이해와 관심이 무한의 관점, 차이의 극대화의 관점에서 소멸되어 버린다. 그것은 우리를 무관심으로 이끈. 그렇기에 우리는 그 속에서 세 번 헛되도다!”를 외치게 되는 것이다. 이 무관심의 무한이 주는 공포에서 우리는 신을 직시하는 것이 금기가 되었던 이유를 발견할 수 있다. 신을 바라본 자는 그의 빛에 눈이 멀뿐만 아니라, 몸 또한 불타버린다. 제우스의 형상을 본 세멜레처럼 죽음에 이르는 것이다. 그렇다 신은 무관심의 무한이며, 인간은 그 속에서 죽음에 이른다. 인간이 죽는 이유는 단순하다. 신은 무관심하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우리는 절망에 빠지고, 그렇기에 눈이 멀고(인식의 불가능) 몸은 불탄다(욕망 성취의 불가능). 그렇다면 우리는 절망에 빠져야만 하는 것일까? 그렇지 않다. 우리는 하얀 무한에 의해 죽음에 이른 세밀레로부터 태어난 디오니소스를 가지고 있다. 디오니소스를 마주함으로써 우리는 잊혀진 무한, 신 이전의 무한을 마주할 수 있다. 그는 의미심장하게도 12주신이면서도 인간이기도 한 존재이다. 그는 신이기만 한 것이 아니다. 그는 인간이며, 신의 무한을 거역할 수 있는 방법을 가르쳐준 진정한 프로메테오스적 존재인 것이다. 그는 우리에게 검은 선을 가르쳐준다. 신이 만든 무관심의 흰 바탕을 장식할 수 있는 검은 선을. 그는 우리에게 우리의 이해와 관심을 창조하는 법을 가르쳐준다. 신이 가르쳐준 흰 색이 아닌, 신이 억눌러 없애버렸던 검은 색을 통한 창조를. 그렇다 우리가 만들어내는 세상이라는 것, 우리가 만드는 현실이라는 것이 신의 관점에서는 헛된 것”, “가상”, “환상이다. 하지만 이에 굴복하여 우리가 베단타 수도승 마냥 모든 것을 부정하며 살 필요는 없다.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환상이며, 그 환상이야말로 바로 우리의 힘, 우리의 무, 신의 부재로서, 선의 부재로서의 우리의 실존으로부터 비롯된, 바로 우리 자신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죄책감 없이 우리의 환상을 직시해야만 한다. 그것이야말로 신에게서 온 것이 아닌 우리에게서 온 것이기 때문이다. 진정한 나는 바로 무관심의 흰 바탕이 아니라, 관심의 검은 선에 있다. 우리는 신이 폭력을 통해 소거한 검은 색을 다시 불러일으킨다. 흰 바탕에 하나의 폭력을 선사하는 것이다. 폭력에 대항한 폭력. 이것이야말로 신에 대한 복수인 것이다. 우리가 우리의 이해의 관심을 쫓는 것을 악으로 두지 않는 것은 신에 대한 복수이다. 신이 지우려고 애쓴 존재의 충만함. 극도의 관심들을 위한 복수이다. 하지만 이것이 우리를 죄악에 물들게 하지는 않을 것이다. 검은 무한으로 되돌아가는 것은 신에 대한 복수이기도 하지만, 단지 귀소 본능이기도 하니까. 우리가 태어난 고향은 흰 무한이 아니라 바로 그 검은 무한이었을 테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