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테고리 없음

표현하기의 어려움

개선비 2019. 8. 5. 12:23

0. 사소한 에피소드

모든 스터디에서 관찰될 수 있는 일반적인 사태. 공유되는 것은 텍스트지만, 다뤄져야할 것은 텍스트의 기원이라는 역설. 기원은 공유될 수 없고, 표현은 무화될 수밖에 없다는 역설. 결국 누군가는 표현하지만, 그것은 받아들여질 수 없기에 시간 낭비일 수밖에 없고, 누군가는 텍스트를 얘기하지만, 그것은 이미 공유되고 있기에 시간낭비일 수밖에 없다.

1. 기원에 대한 숭배

우리는 어떠한 일이든 그것의 기원에 대한 표현에 설레임을 느낀다. 첫 항해, 첫 정원, 첫 키스, 첫 경험, 첫 죽음... 이러한 설레임은 나를 넘어서 우리를 가리킨다. 구약성서가 수많은 사람들을 매혹시킨 것은 우리의 첫 정원에 대한 기억이, 아담과 이브의 기억 속에서 재현되는 광경을 보는 일이 갖는 매력 때문일 것이다. 나의 정원은 에덴 동산으로, 나의 첫 짝은, 이브로 전환된다. 우리는 새로운 모든 것들을 과거 속에 원형으로 집어 넣고 반복하길 좋아한다. 놀라운 것들은 놀랍지 않은 것으로서 가치있게 되고, 새로운 것들은 새롭지 않음으로써 경외를 낳는다. 모든 예언자들이 그들의 고향에서 박해 받은 것은 우리에게 경외를 일으키는 것은 순수하게 무시간적인 과거 속에서만 놀랍고 새롭고 경이로운 것이 나온다는 역설 때문일 것이다.

예수가 아니라면 진정한 기독교인은 없고, 아브라함이 아니라면 진정으로 경건한 이는 없고, 소크라테스가 아니라면 진정으로 지혜를 사랑하는 이는 없다. 우리는 그들이 갖는 순전히 무시간적인, 그렇기에 초시간적인 면모에 매료된다. 반복이 있다면 그것은 천상의 세계의 것이어야만 한다. 시간은 항상 흩날리는 것이기에...

"감히 알려고하라!" 철학자들을 사로잡은 호라티우스의 한 경구, 이것이 무엇을 의미하던간에, 그것이 갖는 전투적인 성격을 우리는 잊지 말아야한다. 왜 앎은 두려움을 낳는가? 그것이 꿈이기에, 그것이 다툼을 낳기에, 그것이 잃어버린 과거를 향하기에, 그것이 현실을 가리는 덮개이기에... 철학자들의 전투적인 성향은 그들이 새로운 것, 예상 밖의 것, 그러니까 천상의 세계 밖에 있는 어떤 것에도 결코 굴복하지 않겠다는 결심에서 비롯된다. 그들은 그러한 결심이 아니고서야 모든 것에 무관심하다. 그렇다. 논리학이란 진부한 말들로 이루어진 학문이고, 철학은 자명성이라는 이름의 우주이다. 철학의 효과는 놀라운 일들을 놀랍지 않은 일들로 전환시키는 것에 집중된다. 자신이 할 수 있었던 말을 남이 하는 것을 목격할 때 관대할 수 있는 것. 그것이 철학이 만들어내는 효과이다.

그러나... 정말로 그러한가? 내가 조금만 더 들여다보았더라면 포착할 수 있었던 것을 놓친 것을... 그것을 놓친 자신에게 관대해질 수 있는가? 나에게 달린 것과 나에게 달리지 않은 것이 동등할 수 있는가? 내가 모든 세계에 살 수 있다는 것을 받아들일 수 있는가? 나는 이 모든 것에 굴복하지 않겠다는 결심으로부터 를 형성한다.

2. 언어라는 기예

기술의 문제와 기술의 문제를 분리하는 것의 어려움. 이를 일치해줄 라는 현상이 가진 근본적 반규정성. 문제는 일치되기 전에 전복되어 버린다. 현상을 다루는 학문의 효과는 항상 문제를 복잡하게 만드는 것에 있다. "사태 그 자체로Zu den Sachen selbst!" 그러나 어디에 사태가 있는가? 사태가 가리키는 방향은 어디인가? 여기서 우리는 사태가 아니라 사태로 가는 길에서 사태를 마주하게 된다. 무엇이 아니었던 것을 무엇으로 만드는 주문, "사태 그 자체로!"는 무엇이 무엇으로서 존재함을 선포하는 주문이다. 빨강에서 이데아로, 좋음에서 쾌락으로, 패턴에서 원리로, 현상에서 기예로... 우리는 문제를 조화시키기 이전에 문제에 빨려들어가버린다.

모든 도구는 나의 연장이다. 나의 연장임과 동시에 나의 분열이다. 그것은 증식된 나이자, 타자에게 저당잡힌 나이다. 도구의 사용, 즉 기예는 불연속으로부터 탈출하기 위해, 자기 필연성의 재림을 위한 것이다. 그것은 경이(Thaumas)를 한갓 불쾌(uneasiness)로 전환시킴으로써 도약을 가능케하는 도구였다. 하지만 그것이 도약을 은폐한다는 점에서, 그것들이 자신의 의지를 갖고 있다는 점에서, 도구는 늘어갈수록 타자는 증식되고, 필연성들은 각각의 세계를 이룬다. 너무 많은 연속들이 있기에 불연속은 재림하고, 자기 필연성이 너무나도 범람하기에 불연속으로 탈출하고 만다. 원시인과 현대인은 결국 고립된 자라는 점에서 완벽한 평행을 이룬다. 자연은 사회가 되고 사회는 자연이 된다. 하지만 우리에게 주어진 자연인 사회는 더이상 옛 경구로서 극복될 수 없다. "가만히 있으라!" "아무것도 되지 말라!" 그것은 붉은 여왕의 저주로 인해 낙원에게 쫓겨난 인간에게는 죽음의 표식에 불과하다. 우리를 가만히 두지 않는 것은 바람이 아니라 역사이고, 떠나가는 것은 부모가 아니라 자신이다. 탈출구는 없다.

어디에 내가 있는가? 어떤 세계든 존립가능하고, 모든 세계가 필연적이라면? 모든 것들이 나에게 침투하기에, 어떤 것도 내가 아니라면? <불평등 기원론>을 거꾸로 쓴 <영원한 평화>에서 우리는 다음과 같은 자기 위안을 발견한다. 역사는 아무것도 아니기에 아무것도 아닐 수 있다. 완전한 기예는 결국 자연이 될 수 있다. 돌아가지 말고 돌아보아라! 칸트의 우둔함 혹은 칸트의 명석함. 칸트의 현명함 혹은 칸트의 순진함. 그렇지만 시간의 화살이 어디로든 향할 수 있다고 믿을 수 있는가?

철학이 처음으로 상대한 기예, 소피스트술은 말하기, 즉 로고스였다. 하지만 철학은 기예에 반대함으로써 자기 자신이 되었고, 기예를 반대하는 기예로서 세상에 등장할 수 있었다. 사랑하지 않는 자를 사랑하는 것이 더 현명하다는 소피스트술에 저항하는 플라톤의 유혹은 또 다른 소피스트술 아니었는가. 우리는 <파이드로스>와 <향연>에서 끊임없는 유혹들의 투쟁을, 갈등한 기술들을 목격할 수 있다.

3. 표현의 부정신학

표현은 그렇기에 모든 세계여도 안 되고, 하나의 세계여도 안 되고, 복수의 세계여도 안 된다. 타협은 불가능하고, 각각의 필연성들을 긍정할 수 있어야한다. 그것은 말이어도 안 되고, 말이 아니어서도 안 되고, 상징이어도 안 되고, 단순한 무의미여서도 안 된다. 그것은 내가 아닌 것이여서도 안 되고, 그것은 오직 나여서도 안 된다. 소통이란 단순한 소음 이상의 것이어서도 안 되지만, 그것이 필연에 입각한 것이어도 안 된다. 자유가 발생할 수 있는 유일한 점을 찾는 것, 세계와 세계 사이에서 하나의 귀퉁이를 찾는 것. 그것은 초월적일 수도, 내재적일 수도 없다. 없는 것이 아닐 수도, 있는 것이 아닐 수도 없다. "하나는 하나"라는 가정일 수도, "하나가 있다"는 가정일 수도 없다.

표현의 부정신학을 넘어서는 일, 그것이 가능한 유일의 과제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