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의 형이상학
체계라기에는 너무 유연하고, 구조라기에는 너무 역사적이고, 복잡성이라기에는 너무나도 경험적인, 사변의 형이상학이 아닌 실증의 형이상학. 그것이 현대의 형이상학이다.
사변의 형이상학은 초월론적 종합과 초월론적 주체가 만들어내는 마술적 순환으로부터 유출하는 것이다. 사유의 존재화, 존재의 사유화, 보편의 개별화, 개별의 보편화. 신은 인간으로 육화하고, 인간은 신으로 승천한다! 이 놀음은 너무나도 아름답지만, 그렇기에 너무나도 환상적이다. 환상은 때론 삶을 숨쉬게 해주는 유용한 휴식처이지만, 영원의 안식처일 수는 없다. 현타는 임시적인 것이지, 최종적인 것일 수 없다. 현타의 극복은 무의미한 말이다. 애초에 그것은 극복의 대상이어서도 안 되니까!
실증은 너무나도 상처 받은, 혹은 오용된 개념이다. 우리가 두 다리를 곧게 펴고 이 땅에 발딛는 순간, 우리는 실증의 인간이 된다. 전자를 받아 들이면서 왜 후자를 멀리하는 것인가? 우리는 두 팔과 두 다리에 의존해야한다. 두 팔과 두 다리, 그것들이 곧 우리 자신이라는 것을 잊어선 안 된다. 계몽의 역사는 실증의 역사이다. 과거 계몽은 항상 작은 틈에서 자신을 발생시키곤 했다. 하지만 그 틈은 좁지 않다. 그 틈은 너무나도 너른 들이라 사실 틈이라고 부를 수조차 없다. 그 들판이 우리가 사는 세상이며, 우리가 딛고 있는 대지이며, 우리가 숨쉬는 대기이다.
왜 우리는 너른 들을 좁은 틈으로 보아왔는가? 우리가 우리의 삶을 에이도스와 에이돌론 사이의 탐구의 길(‘회의주의’란 이 탐구의 길을 의미했던 단어였다! 언어의 변화는 우리가 얼마나 타락했는지 보여준다.)로, 천국과 지옥 사이의 연옥의 길로, 무한과 유한 사이의 비참의 길로, 이성과 감각 사이의 계몽의 길로, 합일과 분리 사이의 결여의 길(라깡의 언어도 실제로는 타락과 도피의 언어다!)로 보아왔기 때문이다. 하지만 삶은 사잇길이 아니며, 양 극으로 정당화되어야만 하는 길이 아니다. 양 극이 삶을 정당화하는 것이 아니라 삶이 양 극을 정당화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순서를 뒤바꿔 생각해온 것이다. 니체가 말한 생명의 무고함은 양 극을 통한 정당화로부터의 자유를 의미할 뿐 그 이상이 아니다. 잘못된 순서가 우리의 눈을 뒤집었을 뿐이다. 필요한 것은 눈을 뒤통수에서 떼어내어(헤겔은 눈을 뒤통수에 단 괴물이었다.) 앞을 향하게 붙이는 것뿐이다. 아니, 우리의 눈은 언제나 앞에 달려 있었다. 그러니 우리가 해야할 것은 단지 우리의 눈을 미래로 향하는 것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