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이미 크라이너, <집중력 설계자들>
요즘(‘요즘’이라고 하지만, 근 몇 년간) 지쳐서인지 기대했던 것에 미치지 못하는 방학이 되었다.
그래도 읽은 것들이, 기록해두지 않으면 사라질 것들이 있다.
그저 잡다한 기억들을 붙잡고 싶어서 기록한다기보다는, 실제로도 중요할 만한 것들이라 기록해둔다.
먼저 기록하는 것은 가장 최근에 읽은 <집중력 설계자들>이다.
제목만 봐서는 자기계발서 같고, 그래서 관심을 가지지 않았던 책이었다. 집중력 문제를 다루는 <인스피아> 최신호를 읽다가 이 책이 초기 중세 수도사들의 영성생활을 다루는 역사책이란 것을 알게 되었고, 덕분에 읽게 되었다.
일단 이 책에 관심을 갖게 된 이유를 설명할 필요가 있다. 내가 이 책을 읽은 이유는 인스피아에서 이 책을 다룬 이유, 혹은 이 책이 쓰여진 이유로 환원될 수 없기 때문이다. 물론 “집중력”은 나에게도 중요한 주제이지만, 나는 초기 중세 수도사들의 영성생활 자체에 관심이 있었다. 내가 초기 중세 수도사들의 영성생활에 관심이 있었던 것은, “관조” 같은 것이 어떤 활동이었을지 궁금해서였다. 수도사들의 영성훈련에서 꽤나 중요한 부분을 차지할 것은 명상 같은 것이라고 할 수 있는 관조일 것이다. 그런데 관조가 도대체 뭔가? 우리는 관조라고 하면 불교 같은 데에서 수행하는 승려들이 하는 명상을 떠올릴 것 같다. 그런데 이러한 명상이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하는 관조랑 통할 수 있는 것일까? 나는 명상과 관조를 동일시하는 것은 문제적일 것 같다고 생각했다. 이는 명상이 신비적인 활동이고 관조는 지성적인 활동이라 판단해서가 아니다. 명상이란 것도 한 가지만 있는 것이 아니고, 관조처럼 지적 인식 활동을 수행하는 명상도 있다. 내가 문제를 느낀 것은 지적이냐 아니냐는 그런 차이 때문이라기보다는, 지적일지라도 그것이 다른 방식으로 수행되면 다를 것이라는 꽤나 당연한 문제의식 때문이었다. 탄트라를 매개로 하는 명상과 신체의 긴장을 매개로 하는 명상은 다른 것처럼, 지적인 명상이라고 할 때에도 그러한 활동이 매개로 하는, 혹은 대상으로 삼는 것이 다르면, 그것은 다른 활동일 수 있다. 또한 그것이 눈을 뜨고 하는지, 눈을 감고 하는지, 부동의 자세로 하는지, 움직이며 하는지, 말을 하면서 하는지, 침묵 속에서 하는지, 다양한 것들을 연결하는지, 아니면 단일한 것에만 집중하는지에 따라서 달라질 수 있고, 바로 그런 이유에서 아리스토텔레스의 관조가 명상과 다를 수 있고, 구체적으로 뭘하는 것인지가 궁금했다. 이는 꽤나 당연한 궁금증일 것이다. 우리는 책을 보거나 실험을 하면서 고민할 때 탐구한다고 생각한다. 그러니 공부가 즐겁다거나 그것이 인식을 증대시킨다고 말할 때, 당연히 책을 읽거나 어떤 다른 대상과 상호작용을 하면서 뭔가를 하는 것을 생각하게 된다. 그런데 (내가 보기에) 아리스토텔레스는 관조가 그런 활동이라고 말한다. 세상에 대한 우리의 이해가 벽을 보며 명상하는 것으로 포착될 수도 있겠지만, 나는 적어도 그런 것을 믿을 수 없고, 아리스토텔레스 또한 그런 것을 믿을 것 같진 않았다. 경험과학의 창시자로 거론되기도 하는 인물이 아리스토텔레스일지언대 벽보며 명상하는 것을 경험과학 활동이라고 말하는 것은 너무나도 이상했다. 때문에 아리스토텔레스가 관조로 어떤 것을 생각했는지가 궁금할 수밖에 없었다. 그걸 알아야 아리스토텔레스가 학문이란 걸 어떤 것으로 보았는지를 알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하여간 그래서 중세영성 활동의 실제에 관심이 많았다고 할 수 있다. 아마도 아리스토텔레스에 대한 관심에서 중세에 대한 관심으로 넘어간 게 이상하다고 생각할 것이다. 뭐 이런 도약은 나에게는 좀 당연해서 이상할 것도 없긴 한데, 굳이 설명하자면 이렇다. 내가 아리스토텔레스의 관조에 관심을 가진 것은 아리스토텔레스에게 국한된 관심이 아니다. 나는 관조와 인식활동을 연결하는 사고 자체에 관심이 있었던 것이고, 그러한 활동을 매개로 포착되는 지식의 성격에 관심이 있었던 것이다. 그러니 아리스토텔레스뿐만 아니라 그 이후에도, “관조”하고 있는 인물들이 어떤 활동을 하고 있었는지, 그러한 활동으로 어떤 것을 “인식”하고 있었는지, 그러한 인식으로부터 나온 성취물이 무엇이었는지에 대해서 관심을 갖고 있었다고 할 수 있겠다.(나아가 이런 활동들이 “사변”으로 변형되는 것에도 관심이 있다) 그러니 중세 영성생활의 실제를 다루는 책은 지나칠 수가 없었다.
문제는 나의 기대와 저자가 의도한 바 사이에는 꽤나 큰 간극이 있다는 것이다. 나는 당연히도 “수행을 잘 한” 수도사가 언급된다면, 그가 이룩한 “성과”가 무엇인지가 궁금할 수밖에 없다. 도대체 뭘 해야 수행이고, 그것을 잘한다는 것이 무엇인가? 내적 체험이 관조의 성취물이라고 해도, 그 내적 체험을 기반으로 수행의 성취 유무를 말할 수 있다. 불교의 명상이 딱 이렇기 때문이다. 내적 체험 자체가 목적인 명상이라고 좆대로 수행되는 것이 아니다. 명상은 생각보다 더 규율적이고, 그러한 수행을 통해 체험할 수 있는 내용이 꽤나 일관적이다.(명상을 해보면 안다) 그러니 명상을 잘 수행한다면, 그의 내적 체험이 그냥 갑자기 경험하는 것이 아니라 순서와 위계를 가진 일련의 내적 체험들을 경험하게 되는 것을 의미할 수밖에 없고, 그러한 내적 체험들에 순서와 위계를 부여할 수 있기에 명상의 수준이 말해질 수 있게 된다. 특정한 단계에서 더 심화된 내적 체험으로 이행하는지, 아니면 끝으로 향하는 내적 체험으로 이행하는지에 따라 수준을 구별할 수 있게 되기 때문이다. 하여간 수도사들이 수행을 했고, 그것으로 수준 차이를 말하고 있었다면, 당연히도 그것이 무엇인지, 어떤 식으로 평가되었는지가 궁금할 수밖에 없다. 그런데 저자는 이런 것에 대해서는 별 관심이 없었다. 애석하게도.
뭐 그래도 아예 도움이 안 된 것은 아니다. 일단 내가 짐작했던 것처럼 중세 수도사들의 관조 활동을 훈련을 통해서만 성취할 수 있는 특정한 활동이었고, 그들의 활동은 (저자의 표현을 따르면) “동양의 명상”과 달랐다. 그들의 관조는 일종의 마인드 스토밍이라고도 할 수 있었다. 저자가 지적하듯이 그렇기에 그들의 활동은 부단함과 흡사했고, 계시나 통찰과 분심(分心;distraction:성당에서 쓰는 말이다)이 구별되기 어려웠던 것이다. 논문을 쓸 때나 좀 의문이 드는 철학적 문제에 대해서 이따금씩 우리가 이 생각 저 생각을 하는 것처럼, 그들은 성서 구절 같은 걸로 고찰했다고 할 수 있겠다. 전자도 그 주제에서 이탈하여 잡생각으로 흐를 때 그것이 끊겼다고 말할 수 있듯, 후자도 그럴 수 있고, 그럴 때 분심이 들었다고 말했던 것이다.
당연히도 분심을 말할 수 있기 위해서는 정상적인 기도/관조 상태를 상정할 수 있어야만 했다. 모든 생각이 허용된다면, 사유의 시발점이 되는 구절은 없어도 그만인 것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때문에 어떠한 구절로부터 사유할 만한 것들이 무엇인지, 어떤 태도를 취할지, 어떤 고민을 품어야하는지 따위를 조정해주는 가이드라인이 필요했다. 그게 바로 주석들이다. 우리는 주석 없는 성서에 익숙해져있지만, 혹은 주석이 있더라도 문헌학적인 주석만을 기대하겠지만, 중세의 성서는 꽤나 주제 비평적인 주석들이 가득했고, 그것들을 매개로 다른 주석을 덧붙이는 주석 달기 활동에 의해 성서 연구가 진행되었다. 그러니 기도/관조가 독서이면서도 연구일 수 있었던 것일 테고 말이다.
책을 매개로, 그냥 내가 하고 싶은 얘기들을 하게 되었는데, 그래도 책에 대해서 좀 얘기해야할 것 같다. ‘집중력 설계자들’이라는 번역제는 출판사에서 붙인 것이지만,(원제는 The Wandering Mind) 마음대로 갖다 붙인 것은 아니다. 저자 또한 자신의 연구를 현대의 집중력 논쟁에 위치시키기 때문이다. 저자 본인이 <도둑맞은 집중력>과 “주의경제”를 언급하며, 자신의 작업과 연관시킨다. 출판사의 홍보 내용과 다른 게 있다면, 저자가 중세 수도사들을 모범으로 제시하는 것만은 아니란 것이 되겠다. 아마도 저자가 염두에 두고 있을 핵심 주장은, 현대 사회에 주의를 끄는 많은 것들이 있고, 바로 그것들 때문에 주의력이 소실된다는 주장은 문제가 있다는 것일 테다. “디지털 디톡스”는 단기적으로는 효과가 있을 수도 있겠지만, 문제를 해결해주지 않는다는 것을 지적하며 저자는 다른 의미에서 중세의 수도사들을 모범으로 삼을 필요가 있다고 주장한다. 주의력을 소실시키는 원인으로 지목되는 sns가 없었음에도 중세 수도사들은 분심으로 고생했다. 그러니 단순히 sns을 없앤다고 산만함이 사라질 것을 기대해서는 안 된다. 또한 중세 수도사들은 새로운 문물을 그들이 추구하는 활동과 어떻게 조화시킬지를 고민했다. 단순히 신문물을 거부하지 않고 그것들을 그들이 추구하는 활동에 적합하게 사용하는 기술을 고안해냈다. 그리고 그들이 거부하지 않고 자신들의 목적에 맞게 수용한 신문물은 바로 (꽤나 놀랍게도) 책이었다. 앞서 내가 지적한 성서 주석들도 이러한 수용의 성취물이었고, 내가 언급하진 않았지만 그들은 책을 수행에 적합하게 사용할 수 있는 기술인 독서법을 발전시켜냈다. 그러니 저자가 지적하는 것처럼, 책을 주의력을 길러주는 기적을 일으키는 영매 같은 것으로 보는 것은 유치하며,(실제로 책은 주의력을 악화시키기도 한다) 문제를 다각도로 살펴야한다.
여기서부터는 다시 저자가 말하지 않은 것들이다. 주의력이란 것을 말할 때 우리는 결과물을 가지고서만 얘기하는 경향이 있다. 어떤 아이가 집중력이 부족하다는 것은 그 아이가 수업에 집중하지 못하고 그래서 성적이 낮다는 것을 의미하곤 한다. 그런데 애초에 수업에 집중하는 일이나 성적이 그 아이의 집중력으로부터 직결될 이유가 없다. 그 아이가 집중력은 높지만, 특정한 과목에는 관심이 가지 않아서 집중하지 못하는 것일 수도 있고, 수업의 방식이나 환경이나 나이 때문에 집중하지 못하는 것일 수도 있다. 또한 성적은 집중을 잘 못해도 높게 받을 수 있다. 애초에 주의력을 말하고 집중력을 말하지만, 정확히 그 활동이 어떤 것인지에 대해서 별로들 생각하지 않는 것 같다. 남의 말을 고스란히 들으면 그의 말에 집중하는 것이고, 그의 말을 들으면서 다른 생각을 하면 집중하지 않는 것인가? 말하는 바를 이해하는 것은 단순히 그의 말을 고스란히 듣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말하는 의도가 무엇인지, 그가 말하는 내용들이 어떤 것들을 염두에 두고 전개되는 것인지 따위는 그의 말을 고스란히 따라가면 생각할 수가 없다. 적어도 저것들을 생각해야 생각할 수 있으니까! 그러니 말을 다르면서 다른 생각을 하는 것은 그의 말을 잘 드는 것을 의미하기도 한다. 문제가 되는 것은 다른 생각의 경계이다. 상대방의 말을 들으며 자신의 경험과 비교하며 생각하는 것도 꽤나 다른 생각일 수 있겠지만, 이해와 공감을 위해서는 필수적이다. 어디까지가 그 말에 대한 생각이고, 어디서부터가 그 말과 무관한 생각인지의 경계가 집중 여부를 결정한다고도 할 수 있겠다.(이것도 중요하지만 난 여기에 대해서 더 논하지 않겠다)
뭐가 되었든 중요한 것은 무엇인가에 집중한다고 말할 수 있기 위해서는 먼저 집중할 때 도대체 무슨 활동이 이루어지는를 이해해야한다. 흥미롭게도 바로 이러한 문제를 중세 수도사들이 다루었다. 언급했듯이, 그들의 관조는 산만한 사고 연쇄와 구별이 어려웠다. 그들은 분심과 통찰을 구별할 필요가 있었고, 그렇기에 자신들이 집중할 때 도대체 뭘 하는지를 포착하고 싶었다. 그래서 그들은 집중을 함과 동시에 바로 그러한 활동들에 대한 메타 인지 활동을 하려고 했다. 즉. 관조활동과 동시에 관조활동에 대한 메타 관조활동을 수행하려고 한 것이다. 놀랍게도 바로 이러한 활동이 “반성”이었다. 단순히 자신이 한 짓에 대해 한번 생각해보는 것은 ‘반성’이라고 부르기 좀 뭐하다. 행동이 아니라 생각에 대해서 생각할지라도, 그건 다른 생각이지 그 자체로 메타적인 구조를 갖는 것은 아니다.(동시적이냐는 꽤나 중요하다. 단순히 대상으로 삼는 것만으로는 메타적이라고 할 수가 없다. 그것은 다른 체제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들은 반성이라는 표현에 걸맞게 그러한 활동을 수행해냈던 것 같다. 저자가 반성을 별도의 주제로 다루면서 이를 분석하지 않지만 그가 인용하는 문언들에 비추어볼 때 그들은 그런 걸 하고 있었다!
나에게는 저런 것들이 저 책에서 찾을 수 있는 흥미로운 것들이었다.(이것은 집중일까 분심일까?) 나라면 집중력 문제는 걍 적당히만 다루고, 다른 흥미로운 것들을 다뤘을 것이다. 예컨대 호기심 같은 것에 대한 중세적 경멸에 대해 다뤘을 것이다. 보통 근대의 특징 중 하나로 호기심에 대한 긍정이 언급되고 그 이전에는 호기심이 문제적인 것으로 평가되었다고들 말한다. 그런데 중세 시대에 호기심을 비난하는 글들을 보면 그들이 염두에 두었던 호기심은 매우 특수한 종류의 호기심이었다. 책을 읽을 때 책을 안 보고 책의 표지나 두께 따위에나 신경 쓰는 것이나, 주목할 가치가 없다고 여겨지는 특수한 사실들(누가 바람을 폈다느니하는 가십들)에 신경 쓰는 일이 그들이 비난한 호기심이었다. 우리가 호기심 많다고 할 때, 저런 것들을 가리킬까? 당연히도 그렇지 않다. (그렇다면 연예계 가십에 신경 쓰는 일만큼 덕 있는 일도 없을 것이다!) 호기심에 대한 평가 전환을 다루는 연구들이 중세 시대의 호기심 용례에 그렇게 집중하지 않는 것은 사실이지만, 밀도 있는 연구들은 그것이 개별적인 사실들에 대한 관심이었음을 많이들 지적한다. 중세 때 비방받은 것이 뭔지를 섬세히 분석하진 않아도, 문제가 된 호기심이 골동품이나 자연사적 수집품인 것은 분명했기 때문이다. (낮)하늘이 푸르게 보이는 이유 따위에 마음 쓴다고 해서 호기심 많다고 비난하였을지는 꽤나 불분명하단 얘기다.(이에 대한 비난 여부는 맥락이 중요할 것이다. 농부가 저런 일에 관심을 갖는 걸로 칭찬할 사람은 없을 테니까. 또한 저런 자연학적 탐구의 성격을 규정하는 이해틀 따위도 중요할 것이다. 적어도 하늘을 푸르게 보이는 광학적 이유에 대한 탐구는 “관조”일 수는 없을 테니까) 하여간 섬세하게 봐야한다.
설혹 내가 집중력 문제에 집중한다면 조금 다른 식으로 다뤘을 것이다. 집중하고 있는 활동에 대한 인식에 기반하여서만 할 수 있는 얘기들이 있을 테니까. 예컨대, 우리는 박쥐가 된다는 것이 무엇인지 모른다고 하지만, 정작 다른 인간이 되는 것도 잘 모른다. 개개인들의 차이에 대한 신비로운 견해를 전제하지 않더라도, 변호사나 의사처럼 특정한 훈련을 받아야만 수행할 수 있는 활동들은 그들이 받은 훈련을 통해 수행되는 활동들을 이해하지 않고서는 그들이 어떤 것을 하고 있는지를 알 수가 없기 때문이다. 우리는 결과물만을 가지고서 그들이 하는 활동을 안다고들 말하지만, 이는 당연하지 않다. 의사가 엑스레이 사진을 볼 때와 내가 엑스레이 사진을 볼 때 정말 같은 경험을 하고 있다고 말할 사람은 없다.(그런 사람은 멍청이니 상대할 가치가 없다) 그러니 결과만을 가지고서 생각하기보다는 도대체 그러한 결과를 산출해내는 활동을 생각해야 한다. 장래희망이 직업일 필요는 없겠지만, 직업이 장래희망이라도 적어도 그것의 외양이 아니라 내부를 통해 꿈꿔야만 실질일 수 있다는 얘기다. 이게 오늘날 집중력 문제와 뭔 상관이냐고? 상관이 있다. 현대 사회가 집중을 못하게 한다고들 하는데, 도대체 정확히 무슨 활동이 방해받고 있는 것인가? 사람들은 열심히 일하고 열심히 쇼핑하고 열심히 떠들고 있다. 뭐가 잘 안 되고 있나? 연구자라면 행정 업무나 실시간으로 전송되는 메일에 답장하느라 연구에 집중하지 못한다고 말할 수 있다. 애초에 학교에서 집중적으로 연구할 수 있는 시간을 할당할 생각은 없고(이건 “업무 시간”이 아니니까!), 그러니 불평할 수 있다. 이건 실제로 문제고, 이미 연구까지 다 끝난 문제니까.(해결하려고 하는 사람이 없을 뿐) 다른 경우는 어떤가? 정확히 뭘 해야 집중하는 것인가? 집중력이 없다는 아이들에 대해서도 그렇다. 도대체 아이들이 집중을 한다는 게 뭔 의미인가? 집중하고 있는 아이들이 같은 의미에서 집중하고 있기나 한가? 그냥 결과물만 가지고서 평가하지만, 애초에 결과물이 올바른 척도가 아닐 수도 있다. 교육이란 건 의술과 달리 결과를 평가하는 기준이 쉽게 바뀔 수 있다. 그러니 묻는 방식이 잘못되어 결과가 안 좋게 나오는 것일 수도 있다. 게다가 애초에 교육하고 있다고 하는 것들이 교육할 가치가 없는 것일 수도 있다.(난 아직도 도덕 교과과정이 뭔 교육이 되는지 모르겠다) 사소하게, 하지만 실질적으로 방식이 문제일 수도 있고.(교사 개개인의 능력은 천차만별이다. 애초에 교육 개혁이 어려운 건 절대다수의 교사들이 개혁된 시스템을 따를 능력이 없어서이다. 환경도 문제겠지만, 애초에 교사들이 받은 훈련이 그다지 교육에 적합하지 않은 것도 문제다) 오늘날의 집중력 문제에 이보다 더 중요한 문제가 있을지 모르겠다.(어른들이 집중하지 못하는 것도 똑같이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애초에 업무효율이 낮은 것은 그들이 집중력이 낮아서만은 아니다. 그들이 성공하지 못하는 것도 그렇다. 언제나처럼 문제는 개인 수준을 넘어선다)
하여간... 뭘 얘기하기 위해서든 그것을 매개하는 활동을 분석할 필요가 있다.
꽤나 당연한 소리겠지만, 이 원칙을 따르는 사람이 많은 것 같진 않다.
일단 나부터 그렇게 분석해왔냐고 누가 묻는다면 그렇다고 쉽게 답할 수 없을 것 같다.
언제나 그렇듯 우리는 더 잘 생각할 필요가 있다.
하여간 그렇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