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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소는 소외를 말했는가? (확장)

개선비 2024. 12. 7. 12:08

과거 글(https://cynicaldog.tistory.com/241)을 확장한 것


 

『불평등 기원론』과 소외 개념의 기원에 대한 계보학적 비판

 

독자여, 당신께서 이 마지막 저작을 관대하게 수용할지라도
당신이 맞이하게 될 것은 나의 그림자뿐일 것입니다.
나로 말하자면, 더 이상 나는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장 자크 루소, 「달랑베르에게 보내는 편지」 서문 中

 

 

1.

  루소는 어디에나 있지만 어디에도 없다. 과천과학관의 어느 한 모퉁이에서 ‘장 루소’라는 약간의 의문이 들 수밖에 없는 이름으로 어린이들을 위한 즐거운 과학 교육을 설파하는 존재로 우리를 맞이하듯이, 루소는 예기치 않은 곳에서 약간은 의문이 들 수밖에 없는 모습으로 우리를 맞이하곤 한다. “소외” 개념의 선구자로서의 루소 또한 이와 비슷하다. 루소를 소외 개념의 선구자로 생각하는 일은 너무나도 자연스러운 일인 것 같다. 소외를 말하는 이 모두 루소를 소외 개념의 역사 속에서 다루면서도 이를 정당화하려하지 않고, 그 누구도 정당화를 요구하지 않는다. 모두가 당연하게 루소가 소외를 말한 선구자라고들 생각한다. 그럼에도, 혹은 이상하게도, 루소는 ‘소외’라는 단어를 말한 적이 없다. 그는 우리가 오늘날 소외를 말하기 위해 사용하는 ‘alienation’이라는 단어를, 유의어일 수도, 동음이의어일 수도 있는 “양도”라는 의미로만 사용했다. 물론 의미 사용의 차이따위야 사소할 수도 있다. “소외”든 “양도”든 결국 루소가 같은 단어를 사용했고, 이를 비판했다면 같은 의미로 사용한 것 아니겠냐고 퉁명스럽게 답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렇게는, 루소를 소외의 아버지로서 여길 수 있냐는 의혹을 일축할 수 없다. 그가 사회계약의 조건으로 자신을 전적으로 “양도”하는 것을 선포한 순간 그가 말하는 양도alienation는 절대로 “소외”를 의미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루소가 소외의 선구자란 상식은 오류에 불과한가? 그렇지 않은 것 같다. 다행히도, 루소를 소외 개념의 선구자로 다루는 이들 중 그 누구도, 루소가 ‘alienation’이라는 단어를 “소외”라는 의미로 사용했다고 말하지 않는다. 루소가 소외를 말했다면, 그것은 ‘소외’라는 단어를 통해서가 아니라, ‘악’으로, ‘타락’으로, ‘자연으로부터의 이탈’로 말했다는 것이다. 그들 모두 루소가 ‘alienation’이라는 단어로 소외를 말하지 않았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렇다면, 약간의 의문이 들 수밖에 없는 방식으로 우리가 루소를 마주했지만, 문제될 것은 없을 수도 있다. 루소가 ‘소외’라는 단어를 소외의 의미로 사용하진 않았지만, 그는 ‘악’, ‘타락’, ‘자연으로부터의 이탈’로 소외를 말하고 있었으니 크게 문제될 것은 없다. 루소는 여전히 소외의 선구자로 남는다. 루소가 ‘소외’라는 단어로 소외를 말하지 않았다는 사실은 루소의 사상을 소외 이론의 전사前史로 다루는 중요한 근거가 될 것이다. 어쨌든, 혹은 결국에는 루소는 소외 이전의 소외 이론가이다.

  그럼에도 한 가지 의문이 남는다. 루소가 ‘alienation’을 통해서 소외를 말하지 않았다면, 도대체 무엇을 근거로 루소가 소외를 말했다고 주장할 수 있는가? 그가 말하는 ‘악’, ‘타락’, ‘자연으로부터의 이탈’이 우리가 말하는 ‘소외’와 같은 것을 가리킨다고 볼 근거는 무엇인가? 심지어 우리들이 한 목소리로 말하는 ‘소외’조차 같은 것을 가리키는지가 불분명할지언대……. 약간의 역설이 남는 것 같다. 루소가 소외를 말했는지를 말할 수 있기 위해서 우리는 소외가 무엇인지 알아야만 한다. 하지만 우리는 소외가 무엇인지 알지 못 한다. 물론 우리가 소외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는 것은 아니다. 그럼에도 우리는 소외가 진정 무엇인지 알지 못한다. 우리가 아는 것은 소외가 무엇인지에 대한 논쟁 뿐이다. 그러니 우리가 아는 것에 비추어 루소가 소외를 말했는지 따져볼 수밖에 없다. 우리는 소외로 여겨질 법한 여러 것들을 루소에게 투영해보는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가 말하는 것들 중 오늘날의 용법과 비슷할 만한 것들을 찾아내고, 그가 우리와 같이, 혹은 우리처럼 말했다고 선언하는 것말고는 다른 방법은 없는 것 같다.

  우리는 우리가 이미 알고 있는 것들을 통해서 루소를 볼 수밖에 없다. 그런데 이것이야말로 루소가 거부하고자 노력했던 일 아닌가? 그는 피해망상이라고 의심될 정도로 자신이 오해 받고 있다고 의심했다. 그의 모든 저작이 어떤 의미에서는 그가 의심하는 자신에 대한 오해에 대한 해명이라고 할 수 있을 정도로. 우리가 우리가 이미 알고 있는 것들을 통해서 그를 바라본다면, 그의 의심은 진실이 되고, 의혹은 사실이 될 것이다. 결국 그의 경고처럼 우리가 보는 것은 그의 그림자에 불과한 것이 될 것이다. 그렇다면 어쩌란 말인가? 루소가 의심했던 것처럼 루소는 다른 이들에게 오해 받았다고, “소외” 개념의 역사에서도 마찬가지였다고 말해야만 하는가? 그것이 오해였다면 어쩔 것인가? 소외 개념의 역사에서 루소의 이름을 지워야할 것이라고 말해야만 하는가? 아니면 오해는 피할 수 없는 것이라고 말하며, 우리 모두 자신만의 루소를 해석할 권리를 가지고 있다고 말할 것인가? 그것도 아니라면, 루소 따위가 소외를 말했는지에 대해선 신경 끄고, 우리는 우리의 정원을 가꾸면 되는 것인가?

  모두 정당한 선택일 수 있다. 시간의 이빨에 갉혀 원래의 모습을 거의 알아볼 수 없게 된 글라우콘 석상을 발견할지라도 문제될 것은 없을 수 있다. 원래의 모습을 알아보아야만 할 이유가 없다면 있는 그대로 그것을 남겨두어도 될 테니까. 심지어 그것이 글라우콘 석상이라고 말할 이유도 없을 수 있다. 그저 모퉁이에 덩그라니 서있는 한 괴석으로 여기며 가던 길을 가도 이상할 것 없다. 우리가 루소로부터 “아직” 혹은 “미처” 말하지 못한 것을 발견할 이유가 있을 이유는 무엇인가? 적어도 “소외”에 대한 오늘날의 논의를 위해서. 우리를 강제할 필연은 없을 것 같다. 그럼에도 이유가 아주 없지는 않을 것 같다. 애초에 루소가 소외 이론의 선구자로 꼽히고 있는 현실이 아무런 이유 없이 실현된 것은 아닐 것이기 때문이다. 그는 분명 우리가 아는 소외와 관련된 논의를 하였을 것이다. 덜 정교하고, 덜 섬세하게 논했을지라도, 그의 미약한 고찰이 이후의 철학자들에게 전수되어 창대한 논의를 촉발했을 것이다. 그렇다면 루소가 어떻게 소외의 기원이 될 법한 논의를 다루었는지를 다루는 것은 의미가 있을 것이다. 어느 수학자가 말했듯이, 우리는 우리가 풀고 있는 문제들이 정말로 어떤 문제인지를 깨닫기 위해 그 문제들이 과거에 어떤 문제였는지를 다시 볼 필요가 있다. 마찬가지로, 소외가 정말로 무엇인지를 알기 위해서, 소외라는 단어가 없던 시절에 소외라는 개념이 탄생하는 순간을 탐구할 필요가 있다. 우리는 소외가 어떻게 말해지기 시작했는지를 탐구할 필요가 있다. 이것이 강제될 필연은 아닐지라도, 적어도 이러한 탐구에는 변명이 강제될 필요는 없을 것 같다.

  문제는 방법이다. 과거의 모습을 알아볼 수 없게 된 석상의 원래 모습을 어떻게 알아볼 수 있겠는가? 우리에게 보이는 것은 지금의 모습 뿐일지언대……. 여기서 우리는 루소의 조언을 따를 필요가 있는 것 같다. 그는 자신의 오해에 맞서 자신의 올바른 모습을 내놓지 않는다. 그는 자신에 대한 모든 것을 솔직히 털어놓으려 한다. 이렇게 토로된 혼란스러운 모습들이 루소의 본질로 선포되지 않는다. 모든 것은 독자에게 맡겨져있다. 독자들은 자신이 알고 있던 루소에서 벗어나게 될 것이다. 하지만 그것이 루소가 제시한 자신의 모습으로 고정될 이유는 없다. 그는 혼란스러운 모습의 루소와 자신이 알고 있던 루소를 비교하며 또 다른 루소를 알게 될 것이다. 이것이 루소의 참된 모습이라고 선언할 수 없겠지만, 미덕과 악덕만으로 꾸며진 사교계의 루소보다는 더욱 진실할 것이다. 본고의 탐구도 비슷한 방법을 따를 것이다. 나는 루소에 대한 오해에서 시작할 것이다. 우리에게 친숙한 오해된 루소에서 시작하여 그와 비슷한 것들을 비교하며 탐구를 진행할 것이다. 이때 루소와 오랫동안 비교되어 온 홉스를 중요한 비교항으로 삼을 것이다. 그러면서도 루소 안에서 비교의 최종적인 근거를 찾아내며 끝마칠 것이다. 이러한 방법에 따른다고 할지라도, 시간의 이빨에 갉아 먹혀 알아볼 수 없게 된 석상을 성공적으로 복원해낼 것이라고 보장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럼에도 나의 작업은 무의미하지는 않을 것이다. 우리는 지금과는 다른 루소를 마주할 것이기 때문이다. 지금과는 다른 루소를 마주하는 것으로는 충분치 못할 수도 있다. 그래서 나는 교훈과 함께 본고를 끝마칠 것이다. 내가 이 글에서 만난 루소에게 우리가 고찰하는 “소외”에 대해 어떤 가르침을 얻었는지를 독자들에게 공유함으로써.

 

2.

  철학에서는 합의보다는 불화가 정상일 때가 많다. 아마도 이는 철학자들이 사용하는 개념어들의 의미를 합의할 수 없어서 그럴 것이다. 모든 철학자은 저마다의 개념을 사용한다는 우스갯소리는 이런 점에서 진리를 담고 있다. 하지만 다툼이 있다고 해서 아무것도 공유하지 않는 것은 아니다. 다툼은 많은 것을 공유하기 때문에 가능해진다. 아무것도 공유하지 않는다면 다툴 이유조차 없다. 불화가 혼돈을 의미할 이유는 없다. 오히려 모두가 공유하는 무엇인가를 발견하기 어려울 때면 오히려 우리는 불화에 의지해서 관계를 추적하는 것이 도움이 된다.그러니 불화에 낙심할 것은 없다. 다툼을 가능케 하는 공통의 전제는 우리에게 많은 교훈을 줄테니까. 소외 또한 이러한 일반론에서 벗어나진 않는 것 같다. 소외에 대해서는 많은 이들이 논쟁을 벌이고 있지만, 그들 모두가 동의하는 전제가 있는 것 같기 때문이다. 소외 개념을 인간 본성론에 근거하여 제안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 그것이다. 이러한 문제의식 때문인지, 그들은 소외 개념의 선구자들이 인간 본성론에 근거하여 소외 개념을 규정했고, 그래서 실패했다고, 자신들은 그들과 같은 실수를 반복해서는 안 된다고 목소리 높이곤 한다. 그렇게, 루카치, 마르크스, 헤겔, 그리고 루소 또한 이러한 “반면교사”의 예로 말해지곤 한다. 그런데 정말 그러한가? 다른 이는 몰라도 루소는 인간 본성론에 근거하여 소외를 말한 것 같지 않다. 그는 오히려 인간 본성론에 근거하여 문제를 진단하고 비판하는 일을 그 누구보다 거부하는 것처럼 보인다. 루소가 인간 본성론에 근거하여 문제를 진단하고 비판하는 일을 거부했다고 말할 수 있는 근거는 무엇인가? 루소는 본인 입으로 자신의 작업이 인간 본성으로부터 연역된 것이라고 말하지 않는가?(p.98) 도대체 무엇을 근거로 루소 본인의 주장을 무시하고서 그가 인간 본성론을 거부한다고 선언할 수 있는가?

  인간 본성론에 근거한 진단과 비판은 어떤 것일까? 아마도 이런 것이 좋은 예가 될 것이다. 자식을 낳고 기르는 것이 인간의 본성에 부합하는 일이라고, 그러니 결혼하여 자식을 낳지 않는 사람은 본성에 부합하지 못하는 삶을 살고 있다고. 인간 본성론에 근거한 진단과 비판은 인간 본성을 통해 특정한 삶의 양태를 규범화한다. 그리고 이러한 삶의 양태에 부합하지 않는 삶을 문제적인 것으로 진단한다. 그렇다면 루소가 이런 식의 진단과 비판을 하고 있는지 살펴보자. 얼핏보면 루소 또한 이와 비슷한 진단과 비판을 하는 것처럼 보인다. 루소가 말하는 자연인이 인간의 본성에 부합하는 규범적인 삶의 양태에 해당되고, 이러한 삶의 양태로부터 어긋나는 것들이, 악, 타락, 자연으로부터의 이탈 따위로 문제적인 것으로서 진단되고 비판되기 때문이다. 그런데 약간 이상한 점이 있다. 자연인의 삶이 본성에 부합하는 삶의 양태라는 주장을 루소가 하고 있는지 불분명하다는 것이다.

  루소가 인간의 본성으로 여기는 것은 인간의 능력들인 것 같다. 자기애amour de soi와 연민pitié, 그리고 좀 더 추가하자면, 자유와 완성가능성perfectibilité이 루소가 인간의 본성으로 말하는 것들인 것 같다. 그런데 만약 이것들이 루소가 말하는 인간의 본성이라면, 자연인과 문명인 모두 인간의 본성에 부합하는 삶을 살게 된다. 자연인의 삶 또한 인간의 본성이 실현되는 하나의 양태에 불과하고, 문명인의 삶 또한 마찬가지이다. 그렇다면 인간 본성에 부합하는지 여부를 통해 루소가 자연인과 문명인의 삶을 비교하고 문제를 진단하고 비판한 것일 수는 없다. 문제가 되는, 소외를 겪고 있는 문명인 또한 본성에 부합하는 삶을 살고 있기 때문이다. 정확히 말하자면, 문명인은, 바로 그 본성 덕분에 문명인으로서 살고 있다. 자유와 완성가능성이 인간이 문명인일 수 있게 하기 때문이다. 루소가 제안한 인간의 본성은 문명인을 배제하기는커녕 바로 그 문명인의 가능 근거인 것이다. 그러니 루소가 인간 본성에 근거하여 자연인에 규범성을 부여하고 문명인을 비판하고 있다고 진단해서는 안 된다. 오히려 우리는 루소가 어떻게 그러한 작업을 수행할 수 있는가를 물어야만 할 것 같다.

  루소는 분명 인간 본성론에 근거하여 자연인에게 규범성을 부여하고 있지는 않다. 하지만 그가 자연인에게 규범성을 부여하고 있다는 것이 거짓은 아닌 것 같다. 그는 분명 자연인이 선하다고 말하며, 문명인이 악하다고 말한다. 이러한 루소의 진단은 우리에게 익숙한 루소의 모습을 드러내주는 것 같다. 성선설의 주창자로서의 루소가 그것이다. 실제로 루소는 성선설을 주장하고 있는 것 같다. 그는 분명 인간은 본래 선하다고 말한다. 루소는 성선설을 주창했다. 그렇다면 우리는 성악설의 주창자와 함께 루소를 다루어야만 하지 않을까? 다행스럽게도 루소 본인도 그렇게 말하고 있는 것 같다. 루소는 홉스가 인간의 천성이 다툼에 있다고 진단했다고 말한다.(p.51) 그렇다면 비교가 정당할 것이다. 오히려 문제는 다른 데에 놓여 있다. 홉스야말로 인간 본성론에 근거한 정치 담론을 무너뜨린 인물이었다는 게 그것이다.

  홉스에 따르면 고대인들은 인간의 본성에 근거하여 “바람직한 정치체”를 논의했기에 오류에 빠졌다. 인간이 있어야만 할 모습이 아니라 있는 그대로 바라보야만 한다고, 그래서 바람직한 정치체가 아니라 있는 그대로의 정치체를 논의해야만 한다고, “바람직한 정치체”란 이상은 단순히 편견에 불과하다고, 자신이 살고 있는 왕정체가 자신에게 마음에 들면 군주정이라고 부르고, 마음에 들지 않으면 전제정이라고 부르는 것과 다르지 않다고 홉스는 말한다. 그렇기에 홉스는 감히 다음과 같이 말할 수 있었다: 자신의 『시민론De cive』 이전에 “정치학civil philosophy”은 없었다고. 그렇다면 루소는 어떻게 홉스를 비판할 수 있겠는가? 홉스는 인간의 본성 따위를 말한자가 아닐지언대……. 홉스의 선언이 망상에 불과한 것이었거나, 루소가 홉스를 오독했다고 비난해야만 하는가? 그래야만 할 것 같지는 않다. 루소의 비판을 다시 살펴보자. 루소는 홉스가 인간의 본성이 악하다는 주장했다고 말하지 않는다. 루소는 홉스가 인간을 다투는 존재로 진단했다고 말한다. 사소해보이지만, 이 차이로부터만 말해질 수 있는 많은 것들이 있다.

  홉스는 인간이 다투는 존재라고 진단했다. 이것이 본성론과 어떤 점에서 다를 수 있는가? 두 가지 점에서 다르다. 하나는 홉스의 진단이 규범을 내포하는 것이 아니라는 점이고, 다른 하나는 이러한 인간의 특성이 조건적이라는 점이다. 홉스는 인간이 다툰다고 말하지, 다투어야만 한다고 말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는 인간의 다툼을 막고자 한다. 그는 인간이 모여살 경우 서로에 대한 신뢰가 성립하기 어려울 수도 있다고 지적한다. 그리고 신뢰의 결여로부터 다툼이 극대화될 수도 있음을 지적한다. 홉스는 이러한 가능성에 근거하여 인간을 다투는 존재라고 규정하고 있는 것이며, 인간이 함께 살면서도 어떻게 다투지 않을 수 있는지를 고찰한다. 그는 특정한 조건에서 유발되는 갈등을 극복할 수 있게 돕는 도구로서 “사회”를 제시한다. 그렇기에 홉스가 인간 본성론에 근거하여 자신의 정치학을 정당화하고 있다는 주장은 잘못된 것이다. 그는 자신의 주장처럼 과학적인 정치학을 주창하였다.

  그렇다면 루소는 어떤 점에서 홉스가 잘못되었다고 진단하고 있는 것인가? 루소에 따르면 홉스가 그 자체로 거짓된 추론을 한 것은 아니다. 홉스가 상정한 조건에서는 홉스의 주장이 옳을 것이다. 사람들은 그가 주장한 것과 같은 방식으로 사회계약을 맺어야만 할 것이다. 하지만 그것만이 가능한 사회계약의 전부가 아닐 것이다. 푸펜도르프가 상정한 조건에서는 푸펜도르프의 주장이 옳고 홉스의 주장이 틀릴 것이다. 왜냐하면 푸펜도르프가 상정한 조건에서는 홉스의 주장과 달리 대담함보다는 소심함에 의해 사회계약이 이루어질 것이기 때문이다. 조건이 달라지면, 계약이 달라진다. 루소는 선대의 사상가들의 잘못을 고발한다. 하지만 루소는 그들의 추론 자체가 틀렸다고 비난하지 않는다. 그들은 옳게 추론하였다. 하지만 그들의 추론을 정당화하는 조건을 그들의 계획에 따라 그들 마음대로 설정하였다. 그들은 그들의 논리에 따라 설정한 조건에 ‘자연’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이것이 그들의 오류이다. 그들은 사회상태에 대해서는 잘못보지 않았을지라도, 자연상태에 대해서는 잘못보았다. 정확히 말하자면, 그들은 자신들이 본 사회상태의 직전 상태만을 자연상태의 전부라고 주장하였기에 오류를 범했다. 그들이 말하는 자연상태는 사회상태로 진입하기 직전의 자연상태일 뿐이다. 하지만 우리가 보아야할 것은 그 여러 사회상태들을 가능케 할 순수한 자연상태의 모습이다. 다종다양한 불순한 자연상태로 이행될 수 있을 순수한 자연상태야말로 진정한 의미에서의 자연상태이다. 그렇기에 그들은 틀렸다. 그들은 자신들의 속셈에 따라 자연상태를 한정하였기에 오류를 범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만 하는가? 순수한 자연상태라는 것을 어떻게 추론할 수 있는가? 루소는 이렇게 생각한 것 같다. 모든 사회적인 관계들을 제거한 상태야말로 순수한 자연상태일 수 있다고. 루소가 「불평등 기원론」에서 그려내는 순수한 자연상태의 모습은 이러한 추론에 잘 부합한다. 그가 그려내는 자연상태는 매우 기이하다. 그는 여러 탐문 보고들을 인용하지만, 적어도 한 가지 점에서는 그러한 탐문 보고들을 체계적으로 배신하고 있다. 그는 순수한 자연상태 속 인간이 홀로 살아가는 존재라고 말한다. 하지만 그 어떤 탐문 보고들도 사회를 이루지 않는 인간을 보고하지 않는다. 그는 이러한 보고들을 존중하고, 더 많은 탐구를 요청하지만, 바로 이 점에서는 그들의 보고를 부정한다. 그는 인간이 홀로 살아갈 수도 있다고 주장하며, 그들이 보고한 인간은 이미 순수한 자연상태로부터 이탈한 인간일 뿐이라고 역설한다. 루소의 이러한 주장은 궤변처럼 보인다. 하지만 그가 순수한 자연상태를 사실이 아니라 이론적인 가설로서 주장하고 있음을 고려한다면, 그의 주장이 그렇게 이상하게만 들릴 것 같지는 않다. 그는 모든 사회적 관계로부터 박탈한 상태로부터 논의를 시작하려고 한다. 역사에 따라 변천하는 상황들로부터 벗어난 순수한 자연상태에서부터 논의를 시작하려는 것이다.

  루소는 역사에 따라 변천하는 상황들로부터 벗어난 순수한 자연상태에서부터 논의를 시작하려고 한다. 루소의 선택은 어떻게 정당화될 수 있는가? 도대체 이러한 작업이 필요한 이유가 무엇인가? 정확히 다시 묻자면, 홉스나 푸펜도르프가 틀린 근거는 무엇인가? 그들은 분명 자연상태에 대해서는 실수했을 수도 있다. 하지만 사회상태에 대해서는 그들이 옳게 진단한 것이 아닌가? 이에 대해서는 사회성에 기초한 사회계약론에 대해 조금 더 상세히 들여다 볼 필요가 있다.

 

3.

  자연상태에 대한 논의는 사실 이론적인 논의였다. 자연상태를 말한 법학자들은 사회라는 개념을 규정하기 위해서 사회와 대비되는 자연상태를 상정하고, 사회로의 진입을 매개하는 요소들을 탐구한 것이었다. 바로 이러한 탐구를 통해서 그들은 사회의 본질을 담지할 수 있는, 사회의 “목적”이라는 것을 규정해낼 수 있었다. 자연과 사회를 다르게 하는 것, 자연으로부터 사회로 이행하도록 인간을 강제하는 것, 자연보다 사회를 우월하게 하는 것이 바로 사회의 본질이자 목적일 것이기 때문이다. 홉스는 인간이 본성적으로 악하다고 주장하지 않았다. 그는 인간이 모여 있을 경우 다툴 수도 있다고 진단했을 뿐이다. 푸펜도르프의 사회성socialbility이 홉스에 반해 인간의 본성을 선하게 만든 것이라고들 하지만 이 또한 진실에 부합하지 않는다. 공포로 인해 싸우려고 들든 공포에 질려 벌벌 떨든 모두 인간의 본성이라기보다는 인간의 특성이며, 인간이 함께 살기 때문에, 혹은 함께 살기 위해서 생겨나는 사회적 성향이기 때문이다. 한 연구자가 지적하였듯이 홉스는 ‘사회성’을 말하지 않았지만 “사회성”을 논의의 중핵으로 삼은 것은 바로 홉스였다.

  홉스의 자연상태는 이미 사회적이다. 심지어 그가 그려내는 자연인은 소유 개념을 갖고 있고, 도덕적인 판단을 수행하며, 법을 따르려고 한다. 애초부터 그들이 사회계약을 맺으려고 할 수 있는 것은 바로 이러한 자연상태의 조건과 그들의 선지식 덕분이다. 그들은 자신의 소유를 지키고 싶어하고, 도덕적인 판단을 확인하고 싶어하며, 법을 따르고 싶어한다. 그들이 사회계약을 맺는 것은 바로 이들의 욕망을 그저 꿈에 불과한 것이 아닌 사실로 확정하고 싶어서이다. 결국 사회계약으로 변화하는 것은 오직 그들의 사회성의 실효성일 뿐이다. 홉스는 정치체를 성립할 조건을 다룸으로써 인간들이 자신들의 자연적인 본능을 어떻게 사회적인 규범으로 변환시킬 수 있는지, 혹은 변환시켜야만 하는지를 다루었던 것이다. 그는 인간의 본성에 호소하지 않는다. 그가 전제하는 인간의 본성은 인간이 소유욕을 갖고 있고, 도덕적 판단을 수행할 수 있다는 사실 정도이다. 그는 이러한 사실에서 비롯되는 불편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사실에 부합하지 않고 자연을 넘어서는 것을 창안할 필요가 있다고 진단한다. 인간의 소유욕이나 도덕 판단의 내용은 객관적이지 않음에도, 그것을 확정시키는 효력을 가진 기구를 세움으로써 객관화할 때에만 진단된 불편을 극복할 수 있다는 것이다. 바로 그러한 이유에서 국가는 자연적인 존재가 아니라 인공적인 존재이며, 환상에 기초한 의제상의 인격이다. 이는 허구의 존재인 것이다. 홉스는 그의 주장처럼 인간 본성론을 체계적으로 부정하고 인간이 가진 능력에 맞춰 정치에 대한 과학을 세우려고 하였다.

  그렇다면 루소는 여기에서 무엇이 문제가 된다고 진단한 것일까? 루소 또한 홉스에게 많은 것을 동의할 것이다. 루소 또한 사회계약을 말한다. 그리고 그가 『불평등 기원론』에서 말하는 사회계약은 홉스의 것과 비슷하다. 인간은 소유권을 알게 되고, 그렇기에 사회계약을 결심한다. 루소가 비판하는 것은 이렇게 사회계약을 맺게 된 인간의 모습이 인간의 모습 전체를 대변할 수 있을 거란 추정이다. 설혹 인간이 그와 같은 방식으로 사회계약을 맺게 되었을지라도, 이러한 계약은 우연적인 변화들에 힘입어 가능해진 것이다. 그것을 맺게 만든 변화들이 없었더라면, 혹은 다른 변화들이 있었더라면, 우리는 다르게 사회계약을 맺었을 것이다. 루소는 「불평등 기원론」의 작업을 통해 인간의 완전가능성을 복원하려고 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는 인간이 자신을 변화시킬 수 있는 존재였다면, 변화하기 이전의 모습은 변화한 이후의 모습과 너무나도 다를 수도 있다는 진실을 우리에게 상기시키려고 한다. 그는 우리가 지금 보고 있는 인간의 모습들, 인간의 차이들을 무화하고, 인간이 얼마나 다른 존재가 될 수도 있는지를 다시 상상케 한다. 과거의 것이든 미래의 것이든 말이다. 그럼으로써 그는 우리가 지금 본성처럼 여기는, 전제들 또한 무화시킨다. 지금 우리가 갖고 있는 것, 우리의 권리와 법에 대한 이해와 도덕과 문명에 대한 이해를 무화시킨다. 그는 우리가 지금 믿고 있는 판단의 기준들을 믿을 수 없는 것으로 추락시킨다.

  루소의 비판은 근본적이다. 그는 홉스의 사회계약론이 가장 중요한 것을 설명하지 않는다고 지적한다. 홉스의 사회계약에서 인간은 변화하지 않는다. 변하는 것은 권리의 실재성뿐이다. 인간은 사회계약 이전에도 소유의 권리를 알고, 이후에도 소유의 권리를 안다. 홉스의 논의에서 인간은 변하지 않는다. 루소는 이것을 비판한다. 사회계약은 인간을 변화시킨다. 정확히 말하자면, 인간이 변화했기에 사회계약이란 것이 가능해진다. 사회계약은 변화를 변경 불가능한 것으로서 인정하는 계기에 불과하다. 그전에 인간은 자신의 모습을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바뀌었고, 바뀌 모습을 자신의 진정한 모습으로 받아들였다. 그들은 사회계약을 인정하고 자신뿐만 아니라 자신의 후손들을 그것의 굴레에 종속시켰다. 도대체 어떻게 이런 일이 벌어질 수 있는가?

  루소는 다음과 같은 것을 설명하려고 한다. 어떻게 우연적인 변화를 본성의 변화처럼 여길 수 있는가? 다시 말해, 우연적인 사건들에 의해 야기된 본성 안에서의 변화들이 어떻게 규범력을 가지면서 마치 본성인 것처럼 목소리를 낼 수 있게 되는가? 어떻게 우리는 본성에 의한 변화를 본성의 변화인 것처럼 여길 수 있는가? 우리는 어떻게 현재의 상황을 정당한 것으로 여길 수 있는가? 이러한 의문들에 대한 답은 자기편애에 놓여 있다. 

 

4.

  루소에 따르면 인간은 비교하는 능력을 갖고 있다. 바로 이 비교능력에 의해 인간은 자기편애에 빠질 수 있다. 그는 다른 사람들과 자신을 비교하면서 자신과 다른 사람들의 차이를 발견할 수 있다. 그렇게 그는 순수한 자연상태에서는 아무런 의미를 갖지 않았던 자신의 차이에 의미를 부여하며 이를 계발할 수 있게 된다. 이는 많은 유용함을 낳을 수도 있다. 서로의 차이에 기반해 인간은 서로 협력하고 더 많은 이익을 누릴 수도 있다. 하지만 이것은 고통을 낳을 수도 있다. 사람들과 비교하며 자신의 부족함을 의식하게 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순수한 자연상태에서는 절대로 의식할 일 없었던 차이에 근거하여. 루소는 이렇게 인간이 비교하며 자기애와 구별될 수 있는 자기편애를 갖게 된다고 진단한다. 만족의 기준을 순전히 자기 자신에 놓지 않고, 비교된 자기에 놓게 될 수 있기 때문이다. 남들에게 자신이 어떻게 보이는지를 신경 쓰게 되고, 마땅히 받아야할 대접이란 것을 욕망하게 된다. 그는 자연인과 다른 만족의 기준을 갖게 된다. 양적으로나 질적으로나. 그는 더 많은 것을 욕망하게 된다. 그는 자신뿐만 아니라 상상된 자신을 위해서도 욕망을 품게 된다.

  그런데 자기편애가 사회계약과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자기편애가 없다면 사회계약은 불가능하기 때문에 상관이 있다. 사회계약은 분명 “나”가 맺는 것이지만, “나”를 넘어선다. 그저 나의 일이기만 하다면, 사회계약은 변덕과 함께 사라질 것이다. 하지만 사회계약은 철회될 수 없는 종류의 계약이다. 그것은 자신의 후손까지 모두 집어삼키는 계약이어야만 한다. “나”가 사회계약을 맺는 것이 아니라면 누가 사회계약을 맺는가? “우리”가 맺는다. 사회계약은 공통의 이익을 향해 있다. 사회계약이 지향하는 공통의 이익은 추상적이다. 내가 얼마 간의 이익을 얻고, 네가 얼마 간의 이익을 얻는지를 따지는 계약이 아니다. 이는 “우리” “모두”에게 좋은 것이라고 말해진다. 이렇게 말해지는 “우리 모두”는 구체적인 인간들을 넘어선다. 그렇기에 이것이 후손에게까지 귀속될 수 있는 것이다. 이는 자기편애와 함께 “상상된 나”처럼 상상된 “우리”이다. “나”는 바로 이처럼 상상된 “우리”에 자신을 귀속시킴에 따라, “우리”로서 사회계약을 의지할 수 있게 된다. 그는 사회계약을 제안한 교활한 인간과 같은 걸 욕망할 수 있게 된다. 그런데 어떻게 우리에 자신을 귀속시킬 수 있는가? 자기편애는 자신을 상상하는 능력이라고는 할 수 있겠지만, 그것이 “우리”를 상상하는 능력일 수 있겠는가? 이에 답할 필요가 있다.

  “우리”란 무엇인가? 이를 단순히 특정한 몇몇 인간을 통칭하는 기술적인 표현으로 본다면, 우리는 그 어떤 존재론적 함의도 내포하지 않는다. 이는 나의 안경과 에펠탑과 안드로메다 은하의 합처럼 그 자체로 하나의 무엇인가를 의미하지 않는다. 여러 존재를 공共-지시하는 기술적인 표현인 것이다. 그런데 “우리”는 기술적인 공-지시 표현을 넘어선다. 공-지시로는 말해질 수 없는 것들이 “우리”로는 말해지기 때문이다. “한 사람은 약하지만 우리는 강하다”거나, “우리는 하나다”라는 말은 공-지시를 넘어선다. 이때 말해지는 “우리”는 나의 안경과 에펠탑과 안드로메다 은하의 합과 달리 분배적이지 않은 방식으로, 포괄적으로 말해진다. 때문에 “우리”로 말해지는 것들 중에는 “우리”의 존재를 경유하며 말해지는 것들이 있다. “우리”는, “우리”를 이루는 구성원들은 통칭하는 것을 넘어서, 바로 그러한 공동체의 존재를 상정시키기도 한다는 것이다.

  “우리”는 실재하는 것으로 말해지기도 한다. 중요한 것은 그것이 실재하는 것인지도, 그것이 실재하는 것으로 여겨진다는 것도 아니다. 어떻게 그것이 그렇게 여겨질 수 있는가이다. 루소의 자기편애는 이러한 작용을 설명하는 도구이기도 하다. 루소의 자연상태는 자연인의 삶에서 타인의 존재를 지워버린다. 물론 그의 자연인은 연민의 감정을 느낀다. 하지만 인간인 연민을 느낄 수 있다는 것이 연민을 느낄 대상을 필요로 한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루소의 자연인은 혼자서도 완전하며, 타인의 존재를 필요로 하지 않는다. 그가 타인을 마주하는 것은 우연 때문이지 그의 필요 때문인 것은 아닌 것이다. 이것이 왜 중요한가? “우리”라는 것을 인간이 상정하게 되는 원인이 바로 타인의 존재에 대한 필요에 놓여 있기 때문이다. 다른 이들을 필요로 함에 따라 그는 “우리”라고 부를 법한 것을 말할 이유가 생긴다. 적어도 그의 존재가 자신의 삶에 기입된다는 점에서 그렇다.

  그런데 누군가를 필요로 한다고 해서 그와 자신의 합에 존재를 부여할 이유는 없다. 루소가 그려내는 자연상태에서처럼 두 성별의 개체가 서로의 욕정에 불타올라 교합한다면, 둘은 서로를 욕구한다는 점에서 서로를 필요로 할 것이다. 하지만 루소가 옳게 그려내듯이, 그들의 욕구가 교합과 함께 해소된다면 서로의 존재가 필요하다고 말할 이유는 없어진다. 적어도 “우리”라고 말할 것에 존재를 부여한다면, 그것은 이러한 필요의 지속에 근거하여, 그러한 필요의 지속이 자신의 존재만큼 확고하고 지속적이라고 생각할 수 있을 때일 것이다. 루소는 이러한 과정을 자세히 서술한다. 그는 인간들이 서로서로 관계 맺음에 따라 서로를 필요로 하게 되는 것을, 특히 그것이 시간의 누적에 따라 점진적으로 막대하게 되는 과정을 서술한다. 조그마한 차이가 시간의 누적에 따라 커진다는 1부 마지막의 진단은 이렇게 2부의 줄기를 이루게 된다. 서로가 서로가 됨에 따라 그들의 차이가 인식되고, 서로의 차이에 맞는 관계를 발전 시켜나간다. 그러한 차이들은 점점 강화되고, 그들의 차이가 강화됨에 따라 서로의 차이는 무화될 수 없게 된다. 이제 그들은 서로가 없이는 생존할 수 없게 된다. 바뀌는 것은 생존의 조건만이 아니다. 그들은 다른 의미에서도 서로가 없이는 살 수 없게 된다. 그들은 자신의 존재 자체를 타인 속에 두게 된다. 자신의 존재를 타인 없는 삶에서가 아니라 타인들 속에서 찾게 된다. 그는 자연상태의 고립을 벗어나, 그 자신의 존재를 사람들 사이에 두게 된다. 다시 말해 그는 자신이 아닌 것들을 자신을 이루는 일부로 여기게 된다. 그는 자신에 대해서 혼동하게 된다.

  이러한 변화가 사회계약을 가능케 한다. 사회계약은 “우리”에 대한 상상에 의존적이다. 그런데 우리에 대해 “상상”하는 것이 사회계약을 가능케 하는 것은 우리의 존재를 상상하기 때문만은 아니다. 자신을 “우리”에 귀속시킬 때에만, 그리고 이러한 귀속을 본질적인 것으로 여길 때에만 사회계약은 가능하다. 사회계약은 홉스가 진단했던 것처럼 자연적인 사실들을 사회적인 규범으로 치환할 때에만 가능해진다. 그런데 이러한 치환이 가능하기 위해서는 바로 그 자연적인 사실들을 자신들에게 필수적인 것으로, 나아가 자신의 생명을 바칠 만큼 자신에게 본질적인 것으로 치환할 수 있어야만 한다. 그럴 때에만 돌이킬 수 없는, 그리고 영원하기까지 한 사회계약은 가능해진다. “나”의 삶보다 “우리”의 삶이 더 크고, 더 길고, 더 가치있다고 여길 때에만, 사회계약이라는 영원히 돌이킬 수 없는, 자신의 후손들 모두가 종속되는 약속에 동의할 수 있게 된다. 바로 이 필요, 바로 이 존재가 영원할 것이고, 영원해야만 한다고 느낄 때에만 사회계약은 가능케 되는 것이다. 이는 사람들 사이에 자신을 놓고 비교하기 시작할 때에 시작된 작은 변화가 오랜 시간에 걸쳐 커졌을 때에만, 사람들 사이에 자신을 놓지 않고서는 자신을 느낄 수 없게 되었을 때, 자신을 비교하게 되는 사람들이 구체적인 개개의 인간을 넘어서 추상적인 단어가 되고 그 단어를 통해 말해지고 있는 것이 허구란 것을 생각하지 못하게 되었을 때 가능해진다. 이는 인간의 존재를 변화시킨다. 인간의 조건을 본성으로 치환하는 기적을 행한다.

 

5.

  우리가 “우리”가 됨에 따라 사회가 시작한다. 그런데 이것만으로는 부족한 것 같다. 루소는 사회계약이 기만이었다고 말한다. 그에 따르면 사회계약은 속임수였다. 사람들이 사회계약을 동의할 수 있는 것은 “우리”에 자신을 맡기는 덕분이다. 그렇기에 사회계약은 어떤 의미에서는 기만이라고 할 수 있다. 그것은 실재가 아니라 상상을 지향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것만으로는 사회계약이 기만이라는 것이 설명될 수 없다. 사회계약에 동의할 수 있게 하는 “우리”가 된 것은 중립적인 것일 수도 있기 때문이다. 지구의 축이 바뀌는 격변에 의해 자연인들이 고립된 삶을 살 수 없게 된 것처럼, 혹은, 야금술의 발견으로 사람들 사이의 의존성이 극대화된 것처럼, 사회계약이란 사태는 그 자체로 인정해야만 할 변화일 수도 있다. 홉스 또한 이렇게 생각한 것일 수 있다. 물론 사회계약은 앞의 두 격변과는 다른 종류의 격변일 것이다. 앞의 격변과 다르게 사회계약은 환경이 아니라 인간의 본성이 바뀌는 변화를 의미하기 때문이다. 앞의 것들은 본성은 변하지 않은 채 인간들이 고립에서 벗어나서 다른 삶을 시작하게 만든 원인이었다면, 사회계약은 이러한 변화를 자신의 본성으로 삼음으로써 그러한 원인을 변경불가능한 것으로 고정하는 변화다. 당연히도 이러한 변화들 사이에서의 차이는 구별될 필요가 있겠지만, 후자의 변화를 전자의 변화와 구별한다고 해서 후자의 변화를 전자의 변화와 달리 거부할 수 있는 근거가 생기는 것은 아니다.

  환경적 변화를 자신의 본성으로 삼음으로써 야기되는 본성상의 변화를 분석한다고 해서 그것을 거부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이를 분석함으로써 그러한 본성상의 변화를 설명하거나 정당화하게 될 수도 있다. 홉스가 그랬던 것처럼. 홉스는 전쟁을 피하고 평화를 추구하라는 자연법을 사람들이 의지하고 있다고 진단하지 않는다. 자연법은 그저 이성의 귀결일 뿐, 의지의 목표가 아니다. 그렇기에 사람들이 이성을 의지하게 만들어야만 한다. 홉스는 이러한 논리에 따라 이성을 의지하게 되는 인간들의 모습을 그려내고 그 안에서 사회계약으로의 이행을 연출해내고 있다. 이것이 문제될 것은 없다. 사회계약을 기만으로 판단할 근거가 없다면, 우리가 사회계약에 동의할 법한 동기를 제공해주는 가설적 역사로서 『불평등 기원론』을 재구성하는 것이 나을 수도 있다. 루소라고 다르게 생각할 이유가 무엇이겠나? 그럼에도, 루소는 다르게 생각한 것 같다. 그는 사회계약을 근거 없이 기만으로 치부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어떻게 그가 그럴 수 있었는지가 설명될 필요가 있는 전부이겠지만 말이다.

  루소에 따르면 인간은 사람들과 관계를 맺으며 사람들 사이에서 자신의 존재를 느끼게 된다. 그리고 이에 따라서 사회계약에 동의할 수 있는 “우리”와 자신을 동일시하게 된다. 그런데 이러한 논리에 따른다면, 『불평등 기원론』의 “우리”가 아닌 다른 “우리”에 자신을 동일시할 경우 우리는 사회계약을 맺지 않을 수도, 다른 사회계약을 맺을 수도 있다. 루소가 『불평등 기원론』의 역사를 우발적으로 그려낸 까닭은 여기에 있다. 누적된 차이가 다를 경우 우리는 다른 존재가 되었을 것이며, 지금과는 다른 세상에서 살고 있었을 것이다. 우리는 분명 다른 존재였을 수도 있다. 하지만 이러한 가능성이 현재에 대한 비판 근거를 제공해주는 것은 아니다. 다른 가능성들의 존재는 우연적인 요인의 차이에 이루어진 결과상의 차이일 뿐 그 어떤 의미상의 차이를 제공해주지 않기 때문이다. 그저 과거의 사태들이 다르게 흘러갔다면, 다르게 되었을 것이라는, 원인의 차이에 의한 결과의 차이를 되풀이하는 것에 불과할 수도 있다. 이는 비판의 효력을 제공해주지 않는다.

  그렇다면 비판의 효력을 제공해주는 것은 무엇인가? 아마도 비교가 하나의 방법을 제공해줄 수 있으리라. 우리가 다른 결과를 상상하며 지금 상태와 비교한다면 우리는 무엇이 더 나을 것이라고 상상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무엇이 더 낫다고 상상할 수 있게 된다면, 못한 것에 대해 비판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것으로도 “비판”이라고 말할 수 없을 것 같다. 돌이킬 수 없는 지나간 과거가 바뀌길 희망하는 일과 다르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는 이미 돌인 것을 앞에 두고, 그것이 돌이 아니었길 희망하는 일과 다르지 않을 것이다. 설혹 그것이 가능할지라도 문제가 해결되는 것 같지도 않다. 다른 가능성을 상상할 수 있다고 해도, 그리고 그것들을 비교해서 어떤 것이 다른 것보다 나았다고 판단할 수 있다고 해도, 그 판단이 올바르다는 것은 보장되지 않는다. 심지어 루소에 따르면 그러한 판단을 올바를 수 없다고 여기는 것이 올바르다. 루소에 따르면 사회계약이라는 변화에 우리의 본성이 바뀌었다. 그리고 이러한 변화에 의해 우리는 우리 자신에 대해서 이전과는 같은 방식으로 사고할 수 없게 되었다. 우리는 현재의 사회들 속에서만 우리 자신을 느낄 수 있다. 우리가 느끼는 모든 것은 지금의 사회를 경유한 것들이다. 우리가 어떤 것이 다른 것보다 더 낫다고 판단할 수 있게 돕는 모든 기준은 현재의 사회 속에서 형성된 기준이다. 그렇기에 이 기준들로는 근본적인 비판은 불가능하다. 지금의 사회와 다른 사회를 상상할 수 있을지라도, 그것들을 가능케 하는 기준들은 지금과 다르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결국 그 사회를 가능케 한 “우리”는 지금의 “우리”와 크게 다르지 않다. 모습만 바뀐다고 해서 본성이 바뀌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다른 “우리”를 상상할 수 있고, 다른 “우리”에 근거하여 지금의 사회계약을 비판할 수 있는가? 근본적으로, 자기편애에 빠진 비교를 구원할 방법은 무엇인가? 루소는 아이러니하게도, 비교에 답이 있다고 말한다. 비교는 우리를 기만에 빠지게 만들 수도 있다. 하지만 우리가 무엇인가를 알기 위해 사용할 수 있는 도구는 비교뿐이다. 루소는 묻는다. “어떻게 한 존재를 무엇과도 비교하지 않은 채 오직 그 자신 안의 관계만으로 잘 규정할 수 있겠”느냐고. 결국 우리는 비교를 통해서만 한 존재에 대해서 이해할 수 있게 된다. 그런데 비교는 우리를 “자기편애(amour-propre)의 이중의 환상에 사로잡”는다. 우리는 비교 때문에 자기편애의 환상에, 자신이 인식하려는 존재에 대해서뿐만 아니라 자기 자신에 대해서도 잘못된 환상을 품게 된다. 어떻게 이 이중의 환상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자신에 대해 가지는 이 불완전한 인식이 우리가 다른 사람들을 알려고 할 때 쓸 수 있는 유일한 수단”이다. “우리는 자신을 모든 것의 척도로 삼”을 수밖에 없다. 문제는 비교 때문에 생겨났지만, 비교를 통해서만 극복되어야만 한다. 우리는 잘 비교해야만 한다. 문제가 생긴 이유를 잘 검토해보자. 우리는 비교를 통해 이중의 환상에 빠진다. 그런데 이 이중의 환상은 독립적인 문제가 아니다. 우리는 자기 자신을 왜곡함으로써 타자를 왜곡하게 된다. 그렇다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우리는 자기 자신을 먼저 잘 이해해야만 한다. 어떻게 자기 자신을 더 잘 이해할 수 있겠는가? 루소는 “자신의 마음을 알기 위해서라도 타인의 마음을 읽는 것에서 시작”할 필요가 있다고 말한다. 그렇기에 그는 “[사람]들이 적어도 하나의 비교항(pièce de comparaison)을 가지고 자신을 측정하는 법을 배울 수 있도록, 그래서 각자 자신과 더불어 타자 하나는 인식할 수 있도록”, 타자 루소라는 비교항을 제시하려고 한다. 루소에 따르면, 더 잘 비교하기 위해서는 자신을 알아야하고, 자신을 잘 알기 위해서는 특별히 비교할 만한 비교항을 통해 자신을 비교해야만 한다.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더 나은 비교를 위한 비교항이 제공되어야만 하는 것이다. 그의 자서전을 위한 기획에서는 “루소”가 비교항이었다. 그렇다면 「불평등 기원론」에서 제공하는 비교항은 무엇인가? 자연인이 바로 그것이다.

  잘 알려져 있는 것처럼, 루소는 자연인에 규범성을 부여했다. 그가 자연인에 규범성을 부여했다고 해서 그가 우리에게 자연인이 되라고 요구한 것은 아니다. 루소는 네 발로 걷고 싶어하지 않으며, 그럴수도 없다고 말한다. 그렇다면 자연인에 규범성을 부여한다는 것은 무슨 의미인가? 그것은 현재의 사회를 평가하는 기준을, 여러 사회들을 상상하며 그들 사이를 비교하는 기준을 자연인에게 맡기라는 의미이다. 루소의 자연인은 모든 사회적 관계로부터 분리되어 있는 존재이다. 그는 우리가 본성에 따라 욕망하는 것들을 욕망하지 않는다. 그는 사회적 관계도 욕망하지 않고, 사회를 이루어야만 누릴 수 있는 모든 재화들을 욕망하지 않는다. 이렇게 고립된 존재로 상정한 자연인은 그 자신만으로도 완전할 수 있다. 루소는 이 자연인을 기준으로 삼는다. 비교해야할 것은 다른 사회이기 전에 자연인의 삶이어야만 한다. 그리고 이 자연인의 삶에 비추어서 사회를 평가해야한다. 자연인의 입장에서 사회로 나아갈 것인지를 평가해보야만 한다. 여기서 자연인의 입장에서 평가해야만 한다는 것은 중요한 열쇠가 된다. 자연인은 사회의 모든 결과를 욕망하지 않는다. 그것들을 욕망하지 않는 이에게 사회가 어떤 매력을 가지는지를 평가해야한다. 우리는 이미 사회의 결과물들을 욕망하고 있다. 사회를 평가할 때, 그 결과물들 사이에서만 우리는 평가한다. 루소는 이러한 습관을 넘어서서 그것들을 욕망하지 않을 때 그것들이 어떻게 보일지를 상상해보라고 요청하는 것이다. 우리가 그것을 욕구하지 않는 고립된 존재일 때, 지금 상태에 만족하고, 희망이든 공포이든 미래를 생각하지 않을 때에도 평가와 비교의 대상이 되는 사회를 욕망할 수 있는지를 묻는다. 루소의 자연인은 모든 사회적 요소가 박탈된 존재이기에 이것만이 중립적인 기준이 될 수 있다. 모든 가치는 바로 이 기준에 따라 재평가되어야만 한다.

  루소의 자연인은 사실에 근거한 것이 아니다. 한편으로 이는 이론적인 가능 근거로서 제안된 것이다. 하지만 이것은 현재를 설명하기 위해 도입된 가설적 존재로 자신의 실재를 그치지 않는다. 사회계약에 동의한 것이 그것에 동의한 “우리”를 상상하고 그것과 자신을 동일시한 일 덕분이었던 것처럼, 우리는 자연인과 우리 자신을—비록 사회계약을 가능케 한 “우리”만큼 강렬하게 동일시될 수 없겠지만—동일시해볼 수 있다. 설혹 가설에 불과하더라도, 우리는 자연인에 우리 자신을 동일시해봄으로써 우리 자신의 삶을 다르게 볼 수 있다. 지금의 삶이 정말로 나 자신을 위한 것인지, 그리고 다르게 사는 게 지금보다 더 나은 삶인지 따위를 상상하고, 비교하고, 판단할 수 있게 한다. 루소의 자연인은 현재를 설명하기 위한 것에 그치지 않고, 현재를 정당할 수 있게 만드는 근거일 수도 있다, 현재를 부정할 수 있게 만드는 근거일 수도 있다. 현재를 정당화하든 부당한 것으로 판정 내리든, 그러한 판단을 가능케 하는 초월론적인 근거로서 자연인은 요청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루소가 자연인에 대해서 사실에 호소하길 포기하고 상상만으로도 족하다고 주장하는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니다. 이는 우리가 현재에 대해서 긍정이든 부정이든 어떠한 평가를 할 수 있다는 사실을 문자 그대로 받아들일 수 있게 하는 유일한 가능 근거이기 때문이다. 이는 일종의 초월론적인 주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는 『순수이성비판』의 주체처럼 이성에 의해 사유가 강제된 것이지만, 그것과는 달리 감성에 따라 상상을 승인해야겠지만 말이다.

 

6.

  루소는 우리가 우리 자신을 어떤 존재로 생각하는지에 따라 우리가 어떤 존재인지가 결정된다고 진단하였다. 이는 루소만의 생각이 아니다. 이는 홉스가 통찰한 인간 사회의 본질이기도 했다. 그럼에도, 루소는 홉스의 모방자라기보다는 새로운 사상의 창안자였다. 그에게 중요한 것은 우리가 우리 자신을 상상함으로써 우리가 된다는 사실이나, 우리가 어떤 존재로서 우리를 상상하는지에 따라 우리가 다른 존재가 된다는 사실이 아니었다. 그에게 중요한 것은 우리가 어떤 우리를 상상해야만 하는지였다. 이러한 논의를 가능케 하는 근거를 확보하기 위해 그는 우발성을 통해 다른 상상의 가능성을 확보했고, 자연인을 통해 비교와 평가의 기준을 설정했다. 그는 상상에 불과할지라도 우리가 어떻게 올바른 기준을 세울 수 있는지를 고민했다. 그렇기에 그는 사회 이론의 선구자라기보다는 사회 비판의 선구자였다. 바로 이 점에서 그는 홉스의 모방자로부터 이탈한다.

  그렇다. 루소는 사회 비판의 선구자였다. 그것이 도대체 소외 개념과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드디어 이 질문에 대답할 수 있는, 혹은 대답해야만 하는 시간이 되었다. 루소는 소외를 말했는가? 그는 분명 소외를 말했다. “악”이든, “타락”이든, “자연으로부터의 이탈”이든, 루소가 분석한 자기편애에 빠져 자기 자신을 잃은 이는, 올바르게 “소외에 빠진 이”라고 말해질 수 있다. 그는 우리가 오늘날 ‘자기 자신으로부터의 소외’로 말하는 사태를 겪고 있다. 루소는 오늘날 자기 자신으로부터의 소외라고 진단되는 사태를 그 누구보다 먼저 진단한 선구자라는 점에서 분명 소외의 선구자이다. 이것이 사소한 사실인가? 이것이 우리의 상식을 확인하는 것에 불과한가? 그렇지 않다. 루소의 논의는 오늘날의 소외 이론에도 빛을 비춘다. 오늘날의 소외 이론가들은 소외가 심리적인 현상이 아니라 사회적인 현상이라는 것을 주장하고 싶어한다. 하지만 그들은 심리적인 사태와 사회적인 사태가 어떻게 연관을 맺는지에 대해서 제대로 설명하고 있지 못한다. 한편으로는 사회 구조적인 문제에 대한 연구가 있고, 다른 쪽에서는 소위 “소외되었다”라고 말해질 법한 상황들에 대한 현상적인 기술이 있다. 하지만 사회 구조적 문제와 우리의 마음이 어떻게 연결되는지에 대해서는 아무도 입을 열지 않는다. 그럴 수밖에 없다. 소외를 경험하는 사람들이 사회 구조적 문제를 정확하게 인식하고 이를 느끼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루소의 사회 비판은 사회와 우리의 마음 사이의 연관이라는 문제를 야기하지 않는다. 그에게 사회는 사회 속에서, 사회에 적합한 존재로서 상상된 “우리”이다. 우리가 사회의 구조를 학문적으로 인식하고 있지 않을지라도, 우리 안에 이미 사회가 들어와 있다. 그렇기에 소외를 “사회적 문제”로서 진단할 수 있다. 그는 사회 속에서 자신을 잃었기에 소외되었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이는 심리적인 문제로 환원되지 않는다. 우리가 우리 자신을 상상하는 방식은 사회의 실재적 현상이기 때문이다.

  오늘날 소외 이론가들은 자기 자신으로부터의 소외와 타인으로부터의 소외, 타인과 구별되는 비인간들로부터의 소외를 구별한다. 그것들이 개념상 구별될 뿐만 아니라 독립적이며, 어떤 것이 다른 것보다 근본적이라고 평가될 이유가 없다고 생각한다. 그들은 옳게 구별하고 있다. 자기 자신과, 타인과, 타인과 구별되는 비인간들은 다른 것들이니까. 하지만 그들은 옳게 진단하고 있지 않다. 소외를 말하기 위해서는 한편으로는 사회가 다른 한편으로는 자신이 전제된다는 것을 옳게 보고 있지 못하기 때문이다. 자기 자신에 대한 것이든, 타인에 대한 것이든, 타인과 구별되는 비인간들에 대한 것이든, 결국 올바른 관계를 맺지 못하고 있다는 진단은, 그러한 관계들을 가능케 하고, 고정시키고, 욕망하게 만드는 사회와 무관할 수 없다. 그리고 사회를 경유하여 무엇인가가 잘못 되었다고 진단하기 위해서는 자기 자신을 돌이켜봐야만 한다. 우리는 어떻게 자신으로부터 벗어나 지금의 “우리”가 되었나, 그리고 어떻게 “우리”로부터 벗어나 “나”를 되찾고 다른 “우리”가 될 것인가, 이 두 물음 없이는 그 어떤 긍정도 부정도 불가능하다. 그러니 이렇게 말할 수 있을 것 같다. 자기 자신으로부터의 소외가 가장 본질적이라고. 우리는 다른 것과의 관계를 평가하기 위해서도 자신으로 돌아갈 필요가 있다. 그렇기에 우리는 루소로부터 다시 시작할 필요가 있다. 루소야말로 “소외”를 제대로 포착하였다. 소외를 말하기 위해서는 우리는 자기 자신에 대한 앎으로부터 시작해야만 한다. 자기 자신으로부터의 소외로부터 시작해야만 한다. 『불평등 기원론』이 그랬듯이.

  『불평등 기원론』은 현재 사회에 대한 거부와 다른 사회의 가능성에 대한 상상을 가능케 한다. 그것은 올바른 사회에 대한 절대적인 기준을 요청하지 않는다. 단지 우리 사회의 모습을 결정한 우연적인 원인들을 필연적인 것으로, 절대적인 것으로 숭배하길 거부할 뿐이다. 현재 사회에 대한 부정만큼이나 현재 사회에 대한 긍정 또한 자연인에 기초해서 평가될 때에만 올바른 평가라는 것을 지적할 뿐이다. 이미 만들어진 자신으로부터 탈피하여, 만들어질 수 있는 “나”를 상상하는 일의 도덕적으로나 정치적으로나 중요하다고 지적할 뿐이다. 만들어질 수 있는 “나”를 상상하기 위해서는 지금의 나로부터 탈피하여 자신을 새로 시작해보는 상상이 필요하다고 지적할 뿐이다. 우리가 아닌 것이 잘못되었다고 말하기 위해서 “우리”가 무엇인지를 먼저 탐구해야만 한다고 지적할 뿐이다……. 소외를 말하기 위해서는 루소처럼 사유해야한다. 본고가 이를 잘 보였을지는 모르겠으나, 나는 진실로 이를 믿기에 이를 지금과 같은 방식으로 내놓는다. 본고가 가치 있는 비교항일 수 있기를 바랄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