니체와 역사서술
요즘 갑자기 몸이 안 좋아져서 논문을 진행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얼른 회복해야할 텐데, 나을 만하면 다시 아프고, 나을 만하면 다시 아픈... 그런 악순환에 빠져 있습니다.
공부한 것들을 정리해볼 겸, 이래저래 적어 보았는데, 나름 선생님께서 관심 가질 만한 것들이 있어 공유해봅니다. 니체에게 있어 왜 “역사”가 중요했는지, 그리고 역사를 중요시하는 그의 입장이 루소와 플라톤과 어떻게 연결되는지를 설명하는 글입니다.
니체는 자신의 작업들이 매우 개인적인 것이라고, 자서전 같은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물론 니체의 저작 중에서 “자서전”이라고 부를 수 있는 것은 <에케 호모> 뿐이죠. 하지만 니체는 다르게 얘기합니다. 당연히도 자서전이 아니고, 자서전일 수 있도록 의도하고 쓴 책들이 아니지만, 돌이켜보니 그것들이 결국 자서전이었음을 인정할 수밖에 없다고 말하거든요. 중요한 것은 자서전이냐 아니냐가 아닙니다. 니체에게 그것들은 당연히도 자서전인 것이거든요.(본인에게 그렇게 보인다는데 어쩌겠어요ㅋㅋ) 니체에게 정말 중요한 문제는, 그 책들이 개인적인 것에 “불과”하지 않을 수 있는지였습니다. 이는 니체가 루소의 후기 저작들을 의식하고 고민하는 문제라고 전 생각합니다. 저나 니체나 루소의 후기 저작을 퇴폐라고 부를 수밖에 없거든요.(뭐 이건 개인적인 취향이니 이해해주시길 바랍니다ㅋㅋ) 니체는 자기 자신을 위한 책은 의미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런 것은 말할 이유가 없고, 남길 이유가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이죠. 정말로 말할 이유가 있는 것만을 말해야한다고 니체는 느끼고, 그것이 자신에게 중요한 규범이었음을 명시하죠.(<인간적인> 2권 서문 첫 문장입니다.)
그런데 저 기준이 무엇인지 어떻게 알겠습니까? 자서전이 아니라고 해서 자동적으로 어떤 책이 자기 자신을 위한 것 이상이 되진 않거든요. 니체가 저 물음을 던지는 것은, 그것들이 결국 자기 자신을 위한 책이었다는 깨달음 때문이고요. 니체는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은 자신에게 필요한 책이었다고, 너무 힘들었고 너무 절망적이었던 그 시절 자신이 삶을 견딜 수 있기 위해 써야만 했던 책이었다고 고백합니다.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을 그래서 니체는 “위기의 기념비”라고 부릅니다. 하지만 이 책이 니체 자신을 위해 필요한 책이었다면, 내놓을 이유가 없는 것이죠. 물론 돌이켜 생각해보니 내놓을 이유가 없는 책이 된 것일 수 있습니다. 하지만 니체는 그런 식의 변명을 내놓을 수 없습니다. 말할 이유가 없다면 말하지 않아야한다는 규범을 얘기한 것도, 이 책이 자신에게 “위기의 기념비”임을 고백한 것도,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을 다시 출판하며 덧붙인 서문을 통해서 한 것이거든요. 그 자신이 병 들어 있었다고 깨달았다고 고백한 것이 1881년 <아침놀>이었고, 그가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을 다시 출판하며 서문을 덧붙인 것이 1886년이니 변명이 불가능합니다. 오히려 니체는 저 책들이 개인적인 경험 이상이라고, 그렇기에 다시 내놓는 것이라고 말하고 싶어 합니다.(물론 명시적으로 “말합니다.”하지만 이는 희망이니...)
니체 연구자들은 니체를 세 시기로 나눕니다. 초기, 중기, 후기로 나누죠. 초기에 속하는 저작이 <비극의 탄생>과 <반시대적 고찰>이고, 중기에 속하는 저작이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과 <아침놀>, 그리고 4권까지의 <즐거운 학문>, <즐거운 학문> 5권부터 후기 저작으로 분류하곤 합니다.(왜 중간으로 분류하는지는 설명하자면 복잡하니 넘어가겠습니다.) 하지만 전 이런 세 시기 분류법이 이상하다고 생각합니다. 니체는 위기 이전과 위기 이후를 얘기하거든요. “위기Krise”는 결정국면을 뜻합니다. “Kritik”과 비슷한 말이었거든요, 위기란 용어가 의학에 사용되면서 생과 사를 가르는 결정적인 시기를 뜻하게 되었고, 그것이 사회/국가/민족이라는 신체로 유추되지만, 본래 의미는 결정적인 시기였고, 니체는 그렇게 사용합니다.(부르크하르트가 그렇게 사용하거든요. 뭐 19세기에는 오히려 이런 용어가 더 일반적일 수도 있을 것 같다 생각합니다.) 당연히도 이런 위기가 당연하게 인식되는 것은 아닙니다. 부르크하르트가 위기를 말했던 것도, 지금이 위기인지를 알 수 있기 위해서 역사를 연구해야한다고 주장하면서였습니다. 그러니 니체가 지나고서야 위기였음을 알게 되었다고 말하는 것이고요. 중요한 것은 그것이 왜 위기이고, 그가 그것을 극복해냈다고 생각하는 근거입니다.
니체는 자신이 병에 시달리고 있었고, 그래서 너무 힘들었고, 그래서 너무 외로웠고, 그래서 너무 절망적이었다고 고백합니다. 그는 그것을 이겨냈다고 말하죠. 근데 힘든 게 끝난 것도 아니고,(니체의 신체적 질병은 더 심해지고 있었죠.), 외로움이 끝난 것도 아니고,(그는 이제 바그너와 결별하고 인정받는 이들 사이에 서 있지 못했습니다. 교수 생활도 끝났고요.), 절망이 끝난 것도 아니었습니다.(요걸 설명해야겠군요.) 그가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이 자신에게 “필요”한 책이었다고 얘기한 것은, 견디기 위해 생각할 수 있는 이상 덕분이었습니다.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을 쓸 때, 저 책에서 말해지는 “자유사상가”를 상상하는 일이 즐거웠노라고 니체는 말합니다. 그 즐거움 덕분에 견딜 수 있었다고 말하고요. 그런데 저런 상상은 끝나지 않습니다. “초인”, “차라투스트라”, “착한 유럽인”, 심지어는 자기 자신(에케 호모!)이 계속 상상되거든요. 그는 견뎌내기 위한 즐거운 상상을 멈춘 적이 없습니다. 계속 상상하죠. 심지어 의식적으로 고안하고, 명시적으로 드러내면서요. 그렇다면 위기는 끝난 것이 아닐 겁니다. 그런데 왜 그는 위기가 끝났다고 말하는지, 그리고 그것들이 자기 자신을 위한 것이었다면, 왜 그것들을 말하고 있는지 의문이 들 수밖에 없습니다. 예상외로 이걸 이해하기 위해서는 플라톤을, 그리고 니체의 플라톤 비판을 이해해야합니다.
호메로스의 서사시 첫 단어는 매우 의미심장하고, 의식적으로 선택된 단어입니다. 서사시 전체를 관통하는 주제어이고, 그것이 주제어인 덕분에 무사 여신들에게 바로 그것을 노래해달라고 요청할 수 있는 것이죠.(한 단어로 요약되지 않는다면 요청이 웃겨지죠. <일리아드> 전체를 노래한 다음에서야 무사여신에게 그것을 노래해달라고 요청하게 될 테니까요.) 마찬가지로 플라톤 대화편에서도 첫 단어는 의미심장합니다. 그것이 전체를 어떻게 관통하는지는 매우 모호하고 불분명하지만요. 지금 제가 얘기하고픈 것은 <폴리테이아>입니다. <폴리테이아>의 첫 단어는 “내려오다”고요. 레오 스트라우스는 플라톤 대화편에서 첫 단어가 중요하다고 주장함과 동시에, <폴리테이아>의 첫 단어가 동굴의 비유를, 동굴 밖으로 나가 이데아 세계를 본 현자가 다시 동굴로 내려오는 것을 가리킨다고 주장했습니다. 이 주장 자체는 이상하지 않습니다. 다른 것을 의미하진 않을 것 같거든요. 하지만 문제는 저게 어떻게 말이 될 수 있는지입니다. <폴리테이아> 초반부에서 소크라테스는 “내려오는 길”에 사람들에게 “붙잡혀” <폴리테이아>에서 이야기되는 대화에 참여하게 됩니다. 스트라우스의 주장처럼 소크라테스가 이데아를 보고 온 진정한 현인이고, 그가 동굴 안 사람들에게 붙잡혀 철인 통치 비슷한 것을 하고 있는 것이라면, <폴리테이아>는 모순에 빠집니다. <폴리테이아>에서 말해지는 이상 국가의 모습과 일치하지 않거든요. 철인(들)은 통치하고 싶어 하지 않습니다. 만약 그들이 통치하고 싶어한다면 진정한 철인이 아닌 것이고, 그러면 철인왕이 될 수 없죠. 그래서 철인왕을 세우기 위해서는 철인들이 통치하도록 강제해야만 합니다. 문제는 이것도 역설에 빠진다는 것입니다. 철인은 진정한 현인이고, 그들이 정말로 통치하고 싶어하지 않고, 정말로 현명하다면, 그들을 강제하는 일은 불가능해야만 합니다. 멍청한 인간들에게 사로 잡혀 하고 싶지 않은 일을 하게 된다면, 그들은 진정한 철인이 아닌 것이죠. 때문에 철인왕 자체가 역설적인 제도입니다. 조건적으로 불가능하거든요. 플라톤은 이 문제를 매우 심각한 것으로 다룹니다. 정확히 말하자면 그는 애초부터 이상국가를 기이한 것으로 묘사합니다. <폴리테이아>의 4권과 5권이 희극체로 서술된 것도, 이상국가를 묘사하기 전에 소크라테스가 듣는 이들에게 웃음을 참지 못하게 될 것이라고 경고하는 것도 다 이런 이유 때문이죠.(사실은 그래서 <폴리테이아>의 이상국가가 어떤 의미를 가질 수 있는지가 더 중요한 문제입니다. 이건 모범으로서의 이상국가가 아니거든요.) 플라톤이 이 문제에 대해서 어떤 답을 내놓았는지와 무관하게, 니체는 바로 이 문제에 집중하고, 이것이 진정한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이성을 통한 탐구는 결국 이상을 그리는 일이라고 니체는 말합니다. 그런데 이상을 추구하다보면, 현실을 외면하게 된다고 니체는 진단합니다. 이상은 아름답습니다. 현실은 엿같고요. 그러니 현실을 외면하고 싶게 됩니다. 그냥 저런 멍청한 짓거리들에 관심을 끄고, 자신은 아름다운 가상들을 관조하고 제작하는 일에 집중하고 싶어진다는 것이죠. 니체는 <반시대적 고찰>에서 바로 이것, 관조에 천착하고 싶어 하는 욕망을 극복하는 일이 철학자가 할 수 있는 일이자, 가르칠 수 있는 유일한 것이라고 주장했습니다. <반시대적 고찰>에서 그것은 진실을 추구하려는 철학자의 의지 속에서만 극복될 수 있고, 그것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현실 속에서 아름다움을 구축해내야한다고 진단되죠. 문제는 그것이 현실적으로 매우 어렵다는 것입니다.
<반시대적 고찰>에서도 얘기되지만, 근대의 지식체제는 앎을 끊임없이, 빠르게 증식해냅니다. 그 속도와 규모는 점점 거대해지고 있으니 그것들을 쫓아갈 수도 없고, 쫓아가는 것도 무의미합니다. 니체는 이런 상황, 즉 앎을 통제할 수 없고, 의미가 부여되지 않은 무수한 앎의 단편들, 사실들이 배회하는 것의 문제를 말합니다. 젊은이들이 가지고 있는 혈기왕성함과 그로부터 비롯되는 직관을 멍청한 오만이라고 깎아내리고, 방대한 백과사전을 읽으라고, 늙은이들의 작업을 쫓으라고 강제한다는 것이죠. 결국 젊은이들은 학문을 포기하거나, 애늙은이가 되는 것이죠. 니체는 이것이 문화를 좀먹는다고 주장합니다.(정확히 말하자면 니체는 독일에는 그래서 문화가 없다고 주장합니다ㅋㅋ) 결국 이런 시류 속에서 인정받을 수 있는 저작은, 그 누구도 화나게 만들지 않는, 부드럽고 상냥하고 섬세하지만, 아무런 내용이 없는 저작, 그 어떤 목표도, 그 어떤 이상도 구상하지 않고, 하던 일이나 정당화하는 맥 빠지는 저작일 수밖에 없기 때문이죠. 니체는 그래서 슈트라우스가 천재 취급을 받고 있다고, 이는 슐라이어마허와 헤겔, 하르트만의 철학이 전제되고 있으니 그런 것이라고 광역기를 날립니다. 그런데 흥미롭게도 니체는 그러니 저런 증식하는 사실들을 쫓지 말고 의미 있는 구라를 내놓자는 부류와도 결별합니다. 그가 “낭만주의”라고 부르며 극딜을 박는 게 바로 저런 부류고요.(바그너와 쇼펜하우어를 저기에 넣죠... 참고로 <반시대적 고찰>의 3권과 4권은 바그너와 쇼펜하우어를 극복의 영웅으로 내세우는 저작들입니다.)
니체의 입장은 매우 역설적입니다. 사실 자체로서의 종합, 사실 자체로서의 총체는 실재하지도 현존하지도 않으니 부정되어 마땅합니다. 그런데 정작 니체는 종합과 총체를 탐구하는 일이 허용되어야만 할 뿐만 아니라, 그런 시도를 적극적으로 추동할 수 있는 조건을 형성해야한다고 주장합니다. 젊은이들의 머리에 방대한 사실들의 목록을 꾸역꾸역 집어넣고, 뭐 하나만 틀려도 딴지를 걸며 백과사전 좀 읽고 오라는 식으로 퉁명스럽게 비난하지 말라는 게, 형성해야할 조건의 기본 중의 기본이라는 것이죠. 그런데 이런 비판(혹은 지적?) 자체는 말이 되는 것처럼 보이지만, 꽤나 역설적인 주장입니다. 결국 저 젊은이들의 이상 추구도, 환상 충족 같은 것이 아니라, “역사학적”이어야 한다고 주장하니 말이죠. 물론 이상 추구와 현실 추구를 시기적으로 구별하면, 둘 사이의 긴장은 풀릴 수 있습니다. 청년기에는 이상을 추구하고, 성년이 될 때, 현실로 돌아오게 된다면 역설이 생기지 않죠. 실제로 니체는 시기적인 구별을 도입합니다. 또한 그의 엄격한 실증성 비판은 청년들을 애늙은이로 만들지 말라는 특정 시기에 국한된 비판입니다. 하지만 니체는 이상을 추구하다보면, 현실을 외면하게 된다고 주장했기 때문에, 시기적으로 분리시키더라도 문제가 발생합니다. 그들이 어떻게 현실로 되돌아 올 수 있는지가 문제되니 말이죠.
현실로 되돌아오는 일은 당연한 게 아닙니다. 철학적으로 해결하기 어려운 문제거든요.(그냥 한다는 식의 해결책이 아니라 철학적으로 해결하려 하면 정말 난감한 문제입니다.) 니체가 의식하는 플라톤 철학의 문제점이 바로 저 것이고, 니체는 저 문제를 극복하는 철학이 진짜 철학이라고 주장합니다. <반시대적 고찰> 3권, <교육자로서의 쇼펜하우어>에서 니체는 자신이 생각하는 진짜 철학(자)를 선언합니다. 그런데 저 책은 여러 모로 문제적입니다. 그리고 이 문제는, 니체가 이후 쇼펜하우어에게 실망감을 느꼈고, 쇼펜하우어의 철학을 비판하게 되었다는 그런 전기적 사실과 별개의 문제입니다. 니체는 실제로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1권 서문에서 저 전기적 사실을 언급합니다. 니체는 저 사실이 별로 중요치 않다고 주장합니다. 지금도 자신은 그때 그려낸 이상적인 철학자 상Bild을 진정한 이상형으로 삼고 있기 때문에 그렇다는 것이죠. 실제로 <교육자로서의 쇼펜하우어>에서 쇼펜하우어의 말은 직접 인용되지 않고, 그의 철학이 구체적으로 제시되지도 않습니다. ‘쇼펜하우어’란 이름이 사용될 뿐, 쇼펜하우어란 인간에 대한 책이 아닌 것이죠. 그렇기에 니체의 주장은 틀린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이것으로는 변명이 부족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가 원래 약속 했던 것은 이상이 아니라 현실이었기 때문이죠. 그는 철학자의 이상형으로서 이상을 그리되 현실을 배신하지 않는, 자신의 삶으로서 모범을 산출하는 철학자를 그려냈습니다. 하지만 이러한 이상으로는 그의 철학은 정당화될 수 없습니다. 이상은 이상일 뿐입니다. 저런 철학자가 가능할 수 있는지가 그가 해결해야하는 문제였고, 그것의 근거와 필연성을 제공하는 것만이 문제를 해결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는 근거와 필연성을 제시하지 않고, 사례로 논증을 하였습니다. 쇼펜하우어가 이를 극복한 사례니 불가능하지 않다는 것이 증명되었다는 식으로 증명한 것이죠. 그런데 쇼펜하우어가 그런 인물이 아니었다면? 그렇다면 아무 것도 해결되지 않은 것이 됩니다. 만약 그가 정말로 문제를 해결하려 했다면, 그것은 정말 쇼펜하우어에 “대한” 책이었어야 합니다. 그것이 아니라 문제였고, 쇼펜하우어에 대한 실망은 정당화되어선 안 되었던 것이죠.
니체는 이 문제를 심각한 문제로 인식하고 있었을 겁니다. 그러니 자신의 책이 개인적인 경험을 넘어서 “역사”일 수 있을 것이라 말하는 것이죠. 그의 책이 자신의 필요를 충족시키기 위한 도구를 넘어서고, 자신의 개인적인 경험을 기록하는 것을 넘어서기 위해서, 그의 책은 “역사”일 필요가 있습니다. 여기서의 역사는 단순히 과거의 사실들, 과거의 사실들에 대한 기록일 수 없습니다. 기록할 의미가 있는 것, 말할 이유가 있는 것으로서의 “역사”인 것이죠. 하지만 단순히 기록할 의의가 있는 것들을 기록해두었다고 해서 “역사”인 것은 아닙니다. 연대기나 연보는 “역사”가 아니니까요. “역사”는 그러한 개별적인 사태들을 하나의 사건으로 종합해낸 작품이죠. 니체는 역사의 이러한 힘, 개별적인 것들을 하나로 조직해내는 힘에 주목한 것입니다. 그의 책이 “역사”라면, “역사”가 가진 힘을 통해 개인들을 엮어낼 수 있을 것이고, 그렇다면 그의 작업은 개인적인 경험을 기록한 것을 넘어설 수 있을 테니까요. 그는 단순한 소통을 넘어서, 개인들이 힘을 모아 시간의 축을 바꿀 수 있기를, 역사적 변혁을 이룰 수 있기를 희망하며, 자신의 작업이 “역사”의 지위를 성취할 수 있기를 희망하는 것입니다. 그는 그렇기에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역사”일 수 있기를 희망한다고, 이후 <도덕의 계보학>에서 자신이 “진정한 역사”를 서술하고 있는 것이길 희망한다고 말합니다. 그의 책은 역사여야 합니다. 그 경우에만 그는 자신의 규범을 지킬 수 있고, 그 경우에만 모순에 빠지지 않을 수 있습니다. 니체가 계속해서 역사를 말하는 것은 바로 이 이유 때문입니다.
니체가 저 문제를 잘 극복해내고 “진정한 역사”를 성취했냐고 묻는다면 전 부정적인 답변을 할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일단 그의 “역사”가 역사학자들에게 절대로 “역사”로 보이질 않을 것을 잘 알기 때문에 쉽게 대답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니체의 노력이 부족했다거나, 방향이 잘못되었다고 생각하진 않습니다. 니체는 자신의 저작들에서 “역사”일 수 있는 서술방식들을 다양하게 실험하였습니다. 하나가 위기를 거쳐 회복하는, 병의 추세를 기록하며, 병의 원인과 그것이 전개되는 과정, 그것이 회복되는 과정을 기록하는 병인과정론적 “역사”입니다.(실제로 저쪽 필드에서 history란 표현을 썼습니다.) 병을 매개로 개인을 뛰어넘는 공통의 과정을 서술할 수 있다는 것이죠. 다른 하는 계보학입니다. 현재를 다른 방식으로 인식하며, 인식 가능한 역사적 추이를 변경하는 정치적 실천 행위로서의 “역사”를 복원하는 것이죠. 이밖에도 성인전적Vita 자서전적 서술,(사실 <에케 호모>는 니체의 Vita 장르 연구의 결과물입니다. 그의 Vita로서의 역사 서술 주목은 아직 연구가 거의 안 된....) 재구성 가능한 단편들을 제시하는 아포리즘 서술 등 니체는 다양하게 실험했고, 자신의 성과들을 독특하게 배열하여 특성 있는 저작들을 완성해냈습니다. 미흡하다면 미흡하지만, 방향 들은 모두 설득력 있었다... 그렇게 평하고 싶네요.(실제로 역사 방법론적으로는 설득력 있는 주장들입니다ㅋㅋ 헤이든 화이트, 폴 벤느, 마크 비버 등의 역사 방법론 논의들을 가지고서는 얼마든지 이게 “진정한 역사”라고 주장할 수 있죠.)
P.S. 키스 안셀-피어슨은 기대했던 것보다 훨씬 더 대단한 사람이더군요. 대가로 여겨지는 것은 다 그럴 만한 이유 있구나...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다만 이 양반의 글쓰기 취향은 좀... 미국 특유의 프랑스 철학풍 글쓰기는 정말 저랑 안 맞는 것 같습니다. 그럼에도 리스펙할 만한 양반입니다. 하이데거, 클로소프스키, 들뢰즈 등의 니체 해석에 맞서는데, 정말 잘 해내더군요. 아마 저는 키스 안셀-피어슨과 같은 자리에서, 다른 방식으로 말하게 될 것 같더군요. 다만 선생님께서 참고할 가치가 있는지는 잘 모르겠습니다ㅋ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