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붉은 다리 아래 따뜻한 물> 찬가

개선비 2022. 8. 30. 11:31

카톡 복붙


 

저번에 <붉은 다리 아래 따듯한 물>을 제가 높이 평가하게 된 이유를 설명하겠다고 말씀드렸는데, 이제야 글을 적게 되었네요. 게으름이 문제입니다...

 

일단 저 영화가 왜 낮게 평가 받는지를 얘기하고 싶습니다. 이마무라 쇼헤이 영화를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모두 <우나기>나 <붉은 다리 아래 따뜻한 물>에 불만을 품을 수밖에 없을 겁니다. <신들의 깊은 욕망>을 이마무라 쇼헤이의 최고 영화로 꼽는 사람이라면 더욱 그럴 수밖에 없고요. 저 또한 <신들의 깊은 욕망>을 최고작으로 꼽는 사람입니다. 그럼에도 전 <붉은 다리 아래 따뜻한 물>이 매우 중요한 작품이란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렇게 생각하게 된 이유를 설명할 필요가 있을 것 같습니다.

 

이마무라 쇼헤이 영화를 사랑하는 사람들이 <붉은 다리 아래 따뜻한 물>에 불만을 품게 되는 것은 아마도 이 영화가 가진 소시민적 성향 때문일 겁니다. <인류학 연습>에서 이마무라 쇼헤이는 욕망 예찬에 그칠 수밖에 없었지만, <신들의 깊은 욕망>에서 그는 욕망의 힘을 신적인 경지로 고양시켰습니다. 덕분에 <나라야마 부시코>나 <복수는 나의 것> 같은 작품이 나올 수 있었던 것이죠. 그런데 <우나기>나 <붉은 다리 아래 따뜻한 물>에서 그는 신적인 것이 아니라 소시민적인 것을 그리고 있습니다. 그러니 화가 나는 것이고 실망을 느끼는 것이죠. 이는 퇴행일 수밖에 없으니까요.

 

하지만 저 지적은 포인트를 놓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붉은 다리 아래 따뜻한 물>에 대한 합리적일 수 있는 비판은 신적인 것을 경멸했다는 비판이기 때문이죠. 극중 두 남녀의 첫 데이트 장소가 그렇습니다. 그 곳은 미나마타 병이 발생한 마을이고, “신들의 마을”이죠. 하지만 영화 속에서 그 곳은 그저 데이트 장소로, 먼 우주에서부터 달려온 입자들이 희미하게 빛을 발하는 신비로운 장소로 그려집니다. 심지어 이마무라 쇼헤이는 이 곳이 바로 그 곳임을, 그들이 개울가를 거닐 때 “신들의 마을”에서 일어났던 비극을 중간중간에 삽입함으로써 드러냅니다. 사실 그 장면들은 스토리에 아무런 역할도 하지 않습니다. 넣지 않았더라도 이상할 게 없다는 거죠. 그런데 뜬금없이 그런 게 들어가 있죠. 누군가가 이 짓거리에 분노를 느꼈다면 충분히 이해가 갑니다. 분명 이것은 모욕 같아 보이거든요.

 

한 가지 명심해야할 것은 이마무라 쇼헤이가 “신들의 마을”을 기록하는 데 가장 어울릴 감독이란 사실입니다. <신들의 깊은 욕망>의 감독이야말로 “신들의 마을”의 감독일 수 있죠. 그 이유는 분명합니다. 어떤 이들은 그곳에서 이러난 사건을 동정으로 그릴 것입니다. 피해자들의 고통을 전시하며 기업의 횡포를 그려내겠죠. 이 또한 가능한 관점일 겁니다. 하지만 동정의 시선으로는 절대로 “신들의 마을”을 그려낼 수 없습니다. 그저 불쌍한 이들만을 그려낼 수 있는 것이죠. 이마무라 쇼헤이가 신들의 마을을 그릴 수 있는 것은 그 마을 사람들을 동정하지 않아서입니다. 그는 아마도 분노를 느낄 겁니다. 기업이 아니라 마을 사람들에게 말이죠. 그들의 무지에 분노를 느끼고, 왜 피해를 입은 자신들이 죄를 지었다고 생각하며 신들을 달래려고 하느냐고 소리칠 겁니다. 하지만 이마무라 쇼헤이가 이렇게 소리쳐도 그들은 바뀌지 않을 겁니다. 그들은 그들이 하던 데로 자신의 가장 소중한 것을 희생시켜서 그 비극을 극복하려고 하겠죠. 멍청하게 말이죠. 이마무라 쇼헤이는 그들을 말릴 수 없습니다. 다른 누구도 마찬가지죠. 그들은 멍청합니다. 고집스럽고요. 이 사실을 받아들이지 않는 사람이라면 그저 동정의 시선을 던질 겁니다. 하지만 이마무라 쇼헤이는 있는 그대로 보죠. 그들의 그 멍청함과 고집을 있는 그대로 바라볼 겁니다. 그리고 그 속에서 진정으로 빛나는 것을 발견해내겠죠. 그들의 멍청함과 고집으로부터 그 누구도 말리지 못할 아킬레스의 영웅성을 발견할 것이고요. 동정의 시선을 거둘 때, 합리성의 기준으로 제단하지 않을 때, 그들이 왜 인간이고 그들이 신일 수 있는지 이해할 수 있게 됩니다. 보통 인간이라면 그렇게 행동하지 않을 겁니다. 하지만 그들은 보통 인간이 아닙니다. 그렇기에 보통 인간이라면 하지 못할 행동들을 창출해내고, 그렇기에 자연사의 반복에 흡수될 보통 인간들을 넘어서 역사를 창출할 수 있는 것이죠. 그들을 합리성이든 이성적 판단이든 그 어떤 것이 부족한 인간으로 보는 멍청이들은 볼 수 없고 해낼 수 없는 그것을 말이죠.

 

이마무라 쇼헤이는 저것을 볼 수 있는 사람이고, 누구보다 저것을 잘 찍어낸 사람입니다. <신들의 깊은 욕망>은 저 진실을 응축시킨 신화적 원형태이고, <나라야마 부시코>나 <복수는 나의 것>은 그것을 적용하여 창출해낸 개별화된 신화들인 것이죠. <신들의 마을>을 누군가가 찍어야만 했다면 이마무라 쇼헤이가 찍었어야만 했고, 그만이 찍을 수 있었을 거라고 전 확신합니다. 그 누구도 이마무라 쇼헤이보다 잘 찍어낸 적 없고, 찍어보려고 시도조차 못한 것들이니까요. 그런데 바로 그 이마무라 쇼헤이가 저 진실을 부정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고, 그것을 모욕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이것이 설명될 필요가 있습니다. 당연히도 이마무라 쇼헤이는 부정하지도 모욕하지도 않습니다. 오히려 그는 그 진실을 더욱 확고하게 말하고 있습니다. 그는 모든 곳에서 저 진실을 발견해낼 수 있다는 것을 보이려고 하고 있기 때문이죠.

 

물론 저런 진실은 아무데서나 발견되지 않습니다. 정말 드문 사건이죠. 이마무라 쇼헤이가 그려낸 영화들은 모두 특유하고, 그것이 흔해빠진 것이 아니란 것을 쉽게 알 수 있습니다. 이마무라 쇼헤이는 그런 영화를 찍었고, 그런 사례들을 찾고 다녔을 겁니다. 그런 그가 다른 얘기를 한 것은 너무나도 빡치는 현실 때문이었을 겁니다. 영화 속 남녀를 보죠.두 사람 모두 멋진 사람입니다. 남자는 성실하고 책임감 있는 사람이고, 여자는 그 누구보다 매력적이고 우아한 사람이죠. 하지만 두 사람 모두 실패했습니다. 남자는 회사에서 짤리고 이혼 당하죠. 여자는 그의 특유함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남자들에게 버림 받고요. 그들은 자신들이 부족하고 이상한 존재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도대체 둘이 무엇이 잘못했고, 무엇이 잘못된 것이지 모르겠습니다. 그들을 그냥 있는 그대로 보면 너무나도 멋진 사람들인데 말이죠. 이마무라 쇼헤이는 그걸 말하고 있는 겁니다. 아마 이마무라 쇼헤이는 불륜 자체에 별 생각이 없을 겁니다. 본인이 불륜을 저지르든 남이 저지르든 별 생각 없었을 거란 얘기죠. 불륜은 그 자체로 아무 것도 아닙니다. 하지만 이 영화에서 두 사람의 불륜은 아름답게 그려지고 있죠. 하지만 이것은 불륜 자체를 미화하거나 불륜 자체를 찬양하기 위해 그들의 불륜을 아름답게 그리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두 사람에게 어울릴 행복을 그려내기 위해서 아름답게 그려내는 것이죠.

 

이마무라 쇼헤이가 저 둘의 데이트를 신들의 마을과 겹친 것은 둘을 대비시키기 위해서가 아니라 둘을 연결하기 위해서였습니다. 우리는 당연히도 비극적인 음악이 흐르고 고통에 소리치는 사람들을 보면서 위대함을 느낍니다. 하지만 그것들이 우리가 바라보아야할 전부가 아닙니다. 모두가 그럴 수도 없고, 모두가 그런 것은 좋은 것일 수도 없습니다. 모두가 불행에 고함치며 신이 되는 세상은 지옥일 수밖에 없거든요. 이마무라 쇼헤이는 신적인 것을 쫓았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이마무라 쇼헤이 본인의 취향이고, 본인이 추구하는 예술이지 모두에게 강요될 소명은 아닙니다. 모두가 그런 영화를 볼 이유도 없고, 모두가 그런 삶을 살 이유도 없습니다. 그게 더 나을 것도 없죠. 이마무라 쇼헤이는 저 진실을 말하고 싶었을 겁니다. 하지만 그걸 단순한 구별로, 분리로 말하는 것은 해답일 수 없습니다. 때문에 이마무라 쇼헤이는 자신이 쫓는 것과 다른 것들 속에서도 버금가는 진실이 있음을 보여주고 싶어 했을 겁니다. 그렇게 나온 게 <우나기>고 <우나기>의 인위성을 극복한 게 <붉은 다리 아래 따뜻한 물>일 거고요.

 

잘못한 게 하나도 없는 이들이 자신을 실패한 인생으로 낙인찍는 것. 어찌보면 이것이 그가 그토록 찬양했던 신들의 모습일 수 있습니다. 합리주의자들은 그들을 그렇게 낙인찍었을 것이기 때문이죠. 이마무로 쇼헤이는 저 진실을 뒤집을 장치들을 고민한 것이고, 그들이 만들어내는 소소한 반전들(비극 용어로서의 반전)도 신화 속의 반전들과 동일한 종류의 힘 덕분에 가능해진다는 것을 지적하고 싶었을 겁니다. 적어도 살아 있고, 거기서 자기 자신을 지키고 있다면 그게 신적인 것과 다르지 않을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줌으로써 말이죠. 어차피 현대 사회에서는 과거 신화에서의 신적인 반전은 가능하지 않습니다. 그것들을 기억하고 전승할 필요는 있겠지만, 그것을 형태적으로 모방한다면 우스꽝스럽겠죠. 모방이 형태가 아니라 정신의 모사를 뜻한다면, 그들을 모방하는 것은 결국 현대에 맞는 것이어야 한다고, 소소하지만 새로움을 가져다주는, 위대하진 않지만 가치를 창출할 수 있는, 신화로 노래되진 않지만 사랑하는 사람들 사이에서 기억될 수 있는 것이어야 한다고 말하는 것이죠. 그래도 그것은 폐퇴가 아니고, 충분히 멋지고, 충분히 신화적이란 것을 말하면서 말이죠, <우나기>에서나 <붉은 다리 아래 따뜻한 물>에서나 그는 굉장히 비현실적인 결말을 그려냅니다. 그냥 끝냈더라면, 이것이 신화란 것을 사람들이 못 알아볼까봐 그렇게 일부러, 보란 듯이 박아 넣은 것이죠.

 

이게 인간 이마무라 쇼헤이의 생각인지는 모르겠습니다. 전 인간 이마무라 쇼헤이는 잘 모르고, 관심도 없습니다. 다빈치를 말하는 발레리처럼 전 제가 정신 속에서 마주한 누군가를 말하는 것이죠. 제 상상 속 이마무라 쇼헤이는 저런 이유에서 후기 작품들을 내놓았을 것이고, 더 오래 살았다면 AV도 찍었을 겁니다.

 

일본 영화계를 아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알 듯이, 일본 영화계는 쓰레기통 같은 곳입니다. 투자자 및 제작사의 입김이 엄청나고, 감독의 권한이라는 것은 없는 곳이죠. 그러니 감독을 꿈꾸었던 이들이 많이들 실패하고, 그들 중 몇몇은 AV를 찍게 됩니다. 그들이 찍어낸 스토리가 있는 성인영화를 보면(명작들이 꽤나 많습니다.) 그들이 느끼는 삶이 어떤 것인지 쉽게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들 자신이 삶을 비하하는 것도 쉽게 알 수 있죠. 이 꼴을 보면 화가 안 날 수가 없습니다.(저 또한 화가 납니다.) 도대체 뭐가 잘못된 것이고 뭐가 나쁜 것이며, 그들의 삶이 어떻다고 스스로가 비하할 이유가 되겠냐 이거죠. 실제로도 그렇지 않습니다. 그들이 비록 영화감독으로서는 실패했어도, 다른 방식으로는 얼마든지 성공할 수 있거든요. 또한 AV가 성인영화인 이상 그들이 감독이 아닐 이유도 없고요. PTA가 <부기 나이트>에서 잘 보여주었듯이, 그들은 멋진 영화인입니다. 멋진 배우들이고 말이죠. 그것을 ‘포르노’로 딱지 붙이며 그 속에 있는 위대함을 못보는 눈 먼 사람들이 문제일 뿐이죠. 이마무라 쇼헤이는 그래서 보란 듯이 그걸 뒤집어 보여주고 싶었을 겁니다. 그의 영화는 보통은 ethnography였죠. 그걸 pornography로 변주해보였을 겁니다. 그렇게 만들어도 그의 작품은 여전히 ethnography라는 것을 보여주면서 말이죠. 현대 예술이 pornography와 다르지 않다는 것은 경멸의 의미일 이유가 없고, 반대로 pornography가 현대 예술과 다르지 않다는 것을 의미할 수 있으니 말이죠. 사실 <붉은 다리 아래 따뜻한 물>은 AV적으로 이미 선구적인 작품이고, 그가 배우들을 찍을 때 발휘해낸 “아름답고” “멋지게” 그려내는 능력 또한 AV 문법에서 최고의 역량이죠. 이마무라 쇼헤이는 본인의 영화가 욕망을 담고 있다는 점에서 AV와 다르지 않다고, 그것이 어떤 것으로 분류되든 탁월하게 해내면 멋진 것이란 것을 보란 듯이 보여주고 싶었을 겁니다. 그리고 실패한 젊은 감독들에게 이렇게 위로하는 거죠. “자넨 그 업계에서 그 정도로 오래 있었으면서도, 왜 이 정도로 못 찍는지 모르겠군.”이라고 도발함으로써 말이죠. 아마도 저 도발이 진정한 위로라는 것을 AV 감독들은 누구보다 더 잘 알아듣고 실험을 추구했을 겁니다. 저 늙은이를 적어도 이 바닥에서는 넘어서겠다고 다짐하면서 말이죠.

 

아무튼 멋진 영화라고 생각합니다. 욕망과 결합된 환상들을 그려낸다는 원초적 의지가 이어져 내려오는 영화고, 그것이 이제 “과학”과 “문명”과 “경제”와 “도시” 따위로 불가능해졌음에도 잃어버리지 않는 환상들을 찬양하는 영화이기 때문이죠. 그것이 소박하고 약간은 낭만적이지만 너무나도 사랑스러운 환상들이란 것은 부정하기 어렵습니다. 맛대가리 없는 밥을 주는 민박집에서 그 남자가 나오지 않는 것처럼, “정말 맛없네요.”라고 말하면서도 투정하지 않고 매번 그 밥을 다 비우며 그 곳에 살고 싶습니다. 그것도 나쁘지 않아 보이거든요. 이마무라 쇼헤이는 이 진실을, 늙은이답게 늙은이들이 젊은이들에게 할 수 있는 꼬장으로 잘 전달해줍니다. 이것이 진심을 담은 조언이고, 애정이 담긴 관심이란 것을 마음이 열린 사람은 분명 알 수 있을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