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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덕의 계보학>을 하나의 논박서로 해석하기

개선비 2022. 8. 13. 16:08

재미로 써 본 글. 니체에 대한 나의 기본적인 입장을 종합해본 것.


<도덕의 계보학>을 하나의 논박서로 해석하기

- 계보학 방법론의 학문론적 지위를 토대로

 

목차

1. 들어가면서

2. 자연주의적 접근 비판

3. 미학적 접근 비판

4. 니체와 역사학

5. 니체의 역사학 – 자연사

6. 자연사에서 계보학으로

7. 나오면서

 

1.들어가면서

  니체 학계는 격변하고 있다. 1970년대에 뮐러-라이터는 니체의 역설에 대한 임시방편적 해석의 한계를 지적하고 일관적일 수 있는 니체 철학의 체계를 제시해야만 한다고 역설하였다. 1990년대에 존 리처드슨은 그의 기념비적 연구로 이에 응답하였다. 리처드슨의 해석에 대한 동의 여부와 상관없이 그의 저작은 니체 연구에 새로운 시대가 열렸음을 알리는 이정표로 여겨진다. 파편적으로 주장되는 니체의 다종다양하고, 이해하기 어렵고, 서로 모순되는 듯한 주장들에 일관된 체계를 부여할 수 있는 가능성을 선보였기 때문이다. 90년대부터 니체에 대한  분석적이고 체계적인 연구가 시도되었고, 이제 니체 사상에 대해서 비체계적이며 모순적이며 그렇기에 단지 문학적 몽상에 속한다고 주장하는 것은 시대착오적인 것이 되어버렸다. 우리는 이제 그러한 의문들에 대해서 빛나는 연구성과들로 응답할 수 있게 되었다.

  2000년대에 이르러 새로운 변화가 시작되었다. 존 리처드슨은 니체 철학의 일관성을 하나의 체계적인 형이상학으로 제시하였다. 그의 니체 철학은 형이상학이지 도덕 철학은 아니었다. 하지만 니체는 한 명의 모랄리스트이기도 했고, 니체 철학의 중요성을 세상에 알린 것은 많은 사람들을 매혹 시킨 그의 도덕적 가르침이었다. 그렇기에 도덕에 대한 삶에 대한 니체의 가르침을 전하는 수많은 책이 세상에 나왔다. 하지만 라이터가 지적하듯이, 니체의 도덕에 대한 입장을 하나의 체계적인 철학으로 종합하는 시도는 수행되지 않았다. 라이터는 니체의 도덕적 가르침을 하나의 도덕 철학으로 제시하는 그의 기념비적 연구를 통해 니체 연구에 새로운 시대를 열었다. 니체의 도덕 철학을 체계적으로 분석하는 시도들이 라이터의 연구를 매개로 수행된 것이다. 그의 연구서 재판에서 스스로 자부하듯이, 그의 연구는 니체 연구에 새로운 흐름을 만들었다. 니체의 과학 연구에 대한 관심의 중요성을 학계의 상식이 되게 만들었고, 니체 철학에 대한 분석적 연구의 중요성을 알렸다. 이제 니체를 연구하는 조건이 바뀌었다. 과거 홀링데일이 선언한 것과 같은 방식으로, 니체는 철학자이지 다른 어떤 것도 아니라며 다른 학문의 중요성을 무시하는 것은 불가능하게 되었다. 그것은 자신의 무지를 독단으로 숨기는 학문적 게으름이 되어버렸다. 또한 니체의 철학이 가진 모순과 난점을 니체의 개성으로, 문학적 수단으로, 수사학적 효과로 포장하는 것은 불가능하게 되었다. 니체에게 모순이 있다면 그것은 체계적으로 설명되어야만 한다. 이를 설명하지 않는 것은 본인의 해석적 무능이나 니체 철학의 무의미를 뜻할 뿐이다. 더 이상 신비는 없다. 모든 것은 설명되어야 한다.

  라이터의 기념비적인 연구가 학계에 새로운 풍토를 만들었고, 새로운 연구들을 가능케 하였음에도 그것은 해결할 수 없는 문제를 내포하고 있다. 그의 주장처럼 니체는 자연주의자이고, 니체가 수용한 과학에 기초하여 그의 철학을 설명한다고 해보자. 이러한 설명이 아무리 설득력이 있고 합리적일지라도 문제는 해결되지 않는다. 니체가 왜 자연주의를 수용하였고, 니체가 왜 바로 그 과학들을 주목했는지가 설명되지 않기 때문이다. 쟈니웨이가 지적하는 것처럼, 철학에서 중요한 것은 이유이지 증거가 아니다. 우리가 주목해야할 것은 니체가 자신의 철학을 체계화할 때 활용한 과학들, 증거들, 문장들이 아니다. 우리가 진정으로 주목해야 하는 것은 바로 그 체계를 가능케 했으며, 바로 그 체계를 우리가 받아들이게 만드는 이유들이다. 라이터가 주장하는 자연주의와 분석적 해석은 니체 연구에 도움을 줄 수는 있어도 니체 철학의 본질을 꿰뚫을 수는 없다. 라이터의 연구 방식은 이제 현대의 학술적인 연구에서 갖추어야할 기본기일 뿐이다. 니체 연구는 이제 시작되었을 뿐인 것이다.

  문제는 어떻게 시작하는가이다. 쟈니웨이는 성실하고 합리적으로 자신의 정교한 해석을 제안한다. 쟈니웨이의 해석은 탁월하다. 하지만 그것은 우리에게 모범일 수는 없다. 그는 그저 잘 해석할 뿐이다. 쟈니웨이처럼 오랫동안 연구한 연구자만이 쟈니웨이처럼 해석할 수 있다. 그러나 나와 나처럼 젊은 연구자는 쟈니웨이가 아니다. 쟈니웨이처럼 연구할 수도 해석할 수 없다. 니체에 대한 쟈니웨이의 해석이 옳을지라도, 쟈니웨이가 제시하는 해석의 이유가 합당할지라도, 바로 그러한 해석을 가능케 하고 그러한 해석을 따르게 하는 이유를 알지 못한다면 이를 받아들일 수 없다. 니체가 주장하듯 진리는 관점 의존적이다. 자신의 관점에 도달하는 법을 보여주지 않는다면, 그의 관점은 소용이 없다. 문제는 바로 그 관점에 도달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바로 이 문제의식에 입각해 나는 나의 연구를 가능케 하는 관점에 도달할 수 있는 관점을 제시하는 방식으로 서술하였다. 본 연구가 제시하는 해석은 <도덕의 계보학>에 대한 하나의 해석이 아니라, <도덕의 계보학>에 대한 해석을 가능케 하고 의미 있게 만드는 해석이다.

  해석에 대한 해석 가능성을 위해 나는 학문론적인 관점에서 도덕의 계보학을 분석하였다. 계보학이 하나의 학문이기 위해서는 그것은 학문적 지위의 근거를 가져야한다. 계보학에서 서술되는 니체의 주장들은 비학술적이고 몽상에 가까워 보인다. 그것은 데닛이 말한 것처럼 그래서 그렇다는 식의 광인의 횡설수설처럼 보인다. 바로 이러한 횡설수설을 합리적이고 학문적인 것으로서 해석할 수 있게 만드는 것이 무엇인지를 밝히는 것이 본 연구의 목적이다. 이를 밝히기 위해 계보학 방법론이 무엇이고 그것이 왜 중요한지를 설명해야만 한다. 나는 이를 계보학이 니체 철학에서 차지하는 의의를 통해서 설명할 것이다. 이러한 배후 맥락을 밝히는 접근 속에서 간접적으로나마 니체 철학이고 왜 그것이 오늘날에도 의미가 있는지를 보여줄 수 있길 바란다. 이러한 나의 기획이 성공적인지는 독자의 평가에 맡기도록 하겠다.

  본 연구는 계보학 방법론의 학문적 지위를 점검하는 방식으로 진행된다. 2장에서 니체의 계보학을 설명하는 오늘날 유행하는 자연주의적 접근을 두 부류로 나누고 각각을 분석할 것이다. 각 접근의 한계를 밝힘으로써 니체의 계보학을 자연주의적으로 해석하는 것이 오류임을 보일 것이다. 3장에서는 2장에서 얻은 교훈을 바탕으로 니체의 서술을 의미 있게 할 가능성 중 하나인 미학적 접근을 분석할 것이다. 미학적 접근의 한계를 밝히고 니체 철학의 새로운 면모를 제안할 것이다. 4장에서는 니체에게 있어 역사학의 중요성을 보일 것이다. 역사학의 중요성을 통해 니체 철학의 특유한 성격과 이로부터 비롯되는 니체 철학의 핵심 과제를 보일 것이다. 5장에서는 4장에서 제시된 니체 철학의 핵심 과제를 해결하기 위한 니체의 철학적 실험을 제시하고, 니체의 자연사 방법론의 기원과 의의를 밝힐 것이다. 6장에서는 5장의 논의를 바탕으로 계보학 방법론의 기원과 의의를 밝힐 것이다. 니체의 계보학 방법이 현대의 자연주의와 어떤 차이를 지니며 어떤 철학적 의의가 있을지, 그리고 이러한 의의를 통해 본 연구의 의의가 무엇일 수 있는지를 밝히며 글을 마무리할 것이다.

 

2. 자연주의적 접근 비판

  라이터는 니체의 도덕 철학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를 자연주의자로 보아야한다고 주장한다. 그는 자연주의자로서 니체를 이해하기 위해서 자연주의를 규정할 필요가 있다고 주장한다. 라이터에 따르면 자연주의에는 두 가지 종류가 있다. 하나는 존재론적 자연주의이고 다른 하나는 방법론적 자연주의이다. 하지만 이러한 라이터의 구별은 무의미하다. 그에 의해 구별된 자연주의 개념들은 불합리하기에, 규정성 있는 개념일 수 없기 때문이다.

  존재론적 자연주의는 과학에서 상정하는 특정 존재자들의 존재론적 우선성을 주장하는 환원주의적 자연주의이다. 이러한 자연과학을 기초로 한 환원주의는 그 자체로 불합리하다. 과학은 하나가 아니다. 그렇기에 과학에서 규정될 수 있는 존재자의 목록을 임의로 한정하는 것은 무의미하다. 자신이 선호하는 특정 과학에 기초해서 임의로 존재론적인 기초요소를 주장하는 것은 그 자체로 무의미하다. 존재론적 자연주의를 자처하는 철학자가 드문 것은 우연이 아닌 것이다. 자의와 몽상에 기초하고 있다는 것만이 존재론적 자연주의가 갖고 있는 문제는 아니다. 존재론적 자연주의는 논리적인 문제를 함축하고 있다. 몇몇의 기초요소로 우리가 인식하는 세계를 환원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논리적 완전성을 함축하기에 불완전성 정리에 위배된다.

  방법론적 자연주의는 자연과학의 방법론의 우월성을 강조하는 입장이다. 하지만 자연과학의 방법론을 따른다는 규정은 모호하기에 그 어떤 의미도 갖지 않는다. 자연과학에서 사용되는 방법론은 다양하며, 그러한 방법론적 사용이 자연적 존재가 아닌 초자연적 존재에 사용되지 않을 이유가 없기 때문이다. 좀 더 규정적인 방법론적 일치를 주장할 수 있다. 콰인식의 자연주의적 인식론이 그것이다. 콰인이 제안한 것처럼 모든 과학을 포괄할 수 있는 형식 논리 체계를 규정할 수 있다면, 바로 그 형식 논리 체계와 해당 논리 체계에서 양화하는 존재자들만을 존재하는 것으로서 받아들이는 것을 방법론적 자연주의라고 부를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콰인의 비전이 불합리하다는 것은 분석철학의 상식이다. 퍼트넘이 증명했듯이, 그러한 작업은 자신의 작업을 정당화할 수 없으며, 이를 정당화하려고 할 경우 형식 논리적으로 해결할 수 없는 미결정성을 함축하게 된다. 현실 속에 존재하는 과학들과 아무 상관없는 공상에 불과하게 된다는 현실적인 문제는 차치하고서도 방법론적 자연주의는 논리적으로 문제가 있다.

  이처럼 라이터가 제안한 자연주의 분류는 무의미하다. 그런데 이러한 무의미함은 단순히 라이터가 불합리한 자연주의 개념을 제안해서 생긴 문제가 아닌 것처럼 보인다. 크리스티안 엠덴은 라이터의 자연주의 규정이 문제적이라는 것을 인식하고 대안이 될 수 있는 자연주의 개념을 제시한다. 하지만 엠덴의 대안도 문제적이다. 니체 철학이 설사 그가 제안한 실행적 자연주의에 속할지라도, 니체 철학을 이해하는 데 있어 그러한 개념은 별 도움이 되지 않기 때문이다. 쟈니웨이는 이러한 문제를 정확히 인식하고 있다. 쟈니웨이가 지적하듯이 애초에 문제는 니체 철학이 자연주의인지 아닌지가 아니라 니체가 자연주의 철학을 표방한 이유를 이해하는 일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니체는 자연주의자이고, 도덕성을 자연학과 정신생리학으로 설명하려고 시도한다. 이는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문제가 되는 것은 그러한 설명을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이다. 나는 니체의 자연주의를 이해하는 접근법을 설명하고 평가하기 위해, 내가 ‘심리주의적 접근’이라 이름붙인 분류 방식을 제안한다. 본 장에서 심리주의적 접근을 두가지 유형으로 분석하고 그 한계를 보일 것이다. 이를 통해 니체의 도덕 철학에 대한 자연주의적 접근법은 극복될 필요가 있음을 보일 것이다.

  니체는 자신이 심리학자라고 말한다. 니체의 심리학자로서의 면모는 잘 알려져 있다. 니체에 대한 카우프만의 고전적인 연구에서뿐만 아니라 저명한 현대 철학자 로버트 피핀의 최신 니체 연구 또한 니체의 심리학자로서의 면모가 니체 철학의 중요한 특징을 이룬다는 것을 확인하고 있다. 니체는 생물학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진리나 도덕과도 같이 자연적인 것과 대립되는 대상 또한 그 자체로의 본질을 갖고 있지 않으며, 다른 심리적 실재들처럼 신체라는 생물학적인 유기조직체에 기초하여 발생하는 결과물이라고 니체는 지적한다. 니체가 <도덕의 계보학>에서 도덕에 대해 이제는 정신생리학적으로 연구해야한다고 주장하는 것은 우연이 아닌 것이다. 니체가 합리적인 것이든, 정신적인 것이든, 의식적인 것이든, 사유 대상이 아니라, 바로 그러한 사유 대상들을 가능케 하고, 결정짓고, 산출하는 물질적인 토대와 비의식적으로 작동하는 무의식에 주목한 것은 분명하며, 우리가 사유 대상이 아니라 무의식에 주목해야한다고 주장한 것은 분명하다.

  니체의 철학, 특히 니체의 도덕 철학을 심리학적으로 보는 것은 설득력이 있다. 이는 니체가 실제로 수행하는 활동과 일치하는 것처럼 보인다. 니체는 심리학자로서 사유, 종교, 도덕 등을 심리적으로 분석하며, 자신을 그렇게 소개하고 있으니 말이다. 또한 니체가 도덕을 심리학적으로 분석한 것은 그 자체로 철학적 의의가 있는 것처럼 보인다. 이성과 의식에 매몰된 근대 철학의 전통을 허물고, 신체와 정동의 중요성을 강조한 것은 철학적으로 의의가 있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의의는 전통적인 사상들을 망치로 부수는 비판적인 사상가로서의 통속적인 니체 이미지에 잘 부합하며 그 자체로 의미가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니 니체가 제시하는 심리학적인 분석을 철학적 분석으로 보는 것 또한 철학적인 의의를 가지며, 이를 분석하여 니체의 비판을 이해하는 것이 니체 연구에 중요하다고 생각할 수 있다. 바로 이것, 니체의 철학은 전통적으로 옹호되던 관념적인 것들이 심리적인 결과물이라고 폭로한 것에 있다고 주장하고, 니체 철학에 대한 연구는 니체의 구체적인 분석들을 이해하는 일이라고 주장하며 이를 실천하는 해석 전략이 내가 주장하는 “심리주의적인 접근”이다.

  심리주의적인 접근은 자연주의 접근에 속한다. 바로 저러한 심리적인 실재가 자연적인 것에 근거하고 있다고 주장되기 때문이다. 19세기 초반 생리학자인 카바니스는 “신장에서 오줌이 생산되듯, 뇌에서 사유가 생산된다”고 주장하며 정신 또한 생리학적으로 연구되어야만 한다고 주장하며 관념의 생산에 대한 선구적인 과학 연구를 시도한 바 있다. 니체에게 큰 영향을 준 쇼펜하우어는 <의지와 표상의 세계>에서 이러한 카바니스의 생리학을 극찬하며, 카바니스의 생리학은 과학적으로 서술된 자신의 철학이며, 자신의 철학은 카바니스의 생리학을 철학의 언어로 푼 것이라고 선언한다 니체 또한 쇼펜하우어처럼 생리학에 기반 한 철학을 주창한 것이라 이해할 수 있다. 니체의 심리학은 초자연적인 것을 주장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생리학이라는 자연과학에 기초해서 주장되는 것이기에, 이를 “자연주의”라고 주장하는 것은 이상하지 않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니체에 대한 심리주의적 해석은 니체에 대해 철학적으로 유의미한 해석을 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니체 철학을 현대의 연구 성과에 맞춰 자연주의로 해석할 수 있는 것처럼 보인다.

  니체가 심리학자의 면모를 가지고 있으며, 자신을 그렇게 이해하며, 심리학적인 분석을 서술한 것은 분명하며, 이를 거부할 이유는 없다. 하지만 니체 철학의 핵심이 이러한 심리학적인 분석과 이를 통한 폭로라고 주장하는 것은 무의미하다. 만약 니체 철학의 핵심이 심리주의적인 접근을 지지하는 학자들의 주장처럼 바로 이러한 통찰에 놓여 있다면, 니체 철학은 일관성을 결여한 것이 되며, 옳다고 주장될 이유가 없는 무의미한 주장이 될 뿐만 아니라, 새로울 것이 하나도 없는, 즉, 독창성과 고유성이 없을 뿐만 아니라 과거의 주장을 추종하는 시대착오적인 주장이 되어버린다. 이러한 해석은 니체 철학의 가치를 훼손할 뿐만 아니라, 니체의 주장과도 일치하지 않는다. 네하마스가 지적한 것처럼 니체가 심리적인 분석을 통해 폭로하고 해방을 기획했다는 해석은, 연구에 의해 절대로 뒷받침될 수 없는 수준 낮은 해석에 불과하다.

  우리의 정신 작용이 모두 신체라는 생물학적인 유기조직체에 기초한 심리적인 결과물이라는 주장은 자기파괴적이다. 만약 우리의 정신 작용이 모두 신체라는 생물학적인 유기조직체에 기초한 심리적 결과물일 경우, “우리의 정신 작용이 모두 신체라는 생물학적인 유기조직체에 기초한 심리적 결과물”이라는 주장 또한 그러한 작용의 결과물이 된다. 그런데 생물학적 유기조직체는 생리학적인 법칙에 따라 작동하는 것일 뿐 참-거짓을 포착하는 것이 아니다. 때문에 생물학적 유기조직체를 다루는 학문은 참-거짓 개념을 포함하지 않는다. 그런데 어떤 주장이 합당하기 위해서는 참이라고 주장될 수 있어야한다. 따라서 “우리의 정신 작용이 모두 신체라는 생물학적인 유기조직체에 기초한 심리적 결과물”이라는 주장이 합당하기 위해서는 그것이 참이라고 주장될 수 있어야만 한다. 그런데 생물학적 유기조직체를 다루는 학문에는 참-거짓 개념이 존재하지 않는다. 따라서 생물학적인 유기조직체를 다루는 학문을 통해서 “우리의 정신 작용이 모두 신체라는 생물학적인 유기조직체에 기초한 심리적 결과물”이라고 주장될 수는 없다. 생물학적인 유기조직체가 주장하는 개별 주장의 옳고 그름을 가르는 것을 생물학적인 유기조직체를 다루는 학문을 통해서는 정당화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단순히 생물학적인 유기조직체에 대한 학문에 근거하여, 우리의 정신 작용이 모두 신체라는 생물학적인 유기조직체에 의한 산출물이라고 주장하는 것은 그 자체로 불합리한 주장이다.

  생물학적인 유기조직체에 대한 학문에 근거하여, 우리의 정신 작용이 모두 신체라는 생물학적인 유기조직체에 의한 산출물이라고 주장하는 것은 그 자체로 불합리하다. 하지만 단순히 생물학적인 유기조직체에 대한 학문에 근거하지 않을 경우 이러한 주장은 합리적일 수 있다. 인간이 생리학적인 작용을 통해서 판단을 내리는 것이 사실일지라도, 이러한 판단 수행은 자연과 사회 속에서 이루어진다. 따라서 단순히 정신을 신장에서 오줌이 만들어지듯이, 특정한 기관의 작용에 의해서 결정적으로 산출되는 생리학적인 결과물로 보지 않는다면, 이러한 주장은 정당화될 수 있다. 즉 신장에서 오줌이 만들어지는 것 자체는 생리학적인 법칙에 의한 것이지만, 어떤 오줌이 만들어지냐는 것은 각각의 조건에 따라 연구될 수 있다. 고기를 중심으로 섭취했을 때와, 야채를 위주로 섭취했을 때 오줌은 다르게 나온다. 마찬가지로 이러한 조건에 따른 결과의 차이를 비교 검토할 경우, 정신에 대해서도 각 정신의 차이를 설명할 수 있을 것이다. 단백질이 많이 포함된 오줌이 생산되는 조건과 당분이 많이 포함된 오줌이 생산되는 조건의 차이를 연구하듯이, 참-거짓 혹은 참-거짓을 대체하는 개념을 부여할 수 있는 정신 생산에 있어서의 주목할 조건의 차이가 연구될 수 있다.

  정신이 단순히 심리적 결과물이라고 주장하는 것은 그 자체로 불합리하다. 만약 그러한 주장에 기초하여 니체 철학을 해석하는 데 있어 심리주의적 접근을 취하고 있다면, 그러한 연구들은 모두 초보적인 오류를 범하고 있는 그자체로 불합리한 철학을 연구하고 있는 것이 된다. 이는 불합리하다. 초보적인 오류를 범하고 있는 그자체로 불합리한 철학은 무의미하기 때문에 이를 연구하는 것 또한 불합리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접근이 니체 철학을 무의미하게 만든다는 것은 차치하고서도, 니체는 실제로 그러한 주장을 하지 않는 것처럼 보인다.

 

나는 연금술을 믿지 않듯이 도덕을 믿지 않는다. 나는 그것들의 전제를 믿지 않는다. 그렇다고 이러한 전제를 믿고서 행동했던 연금술사들이 한때 존재했다는 사실을 부인하는 것은 아니다. 나는 부도덕도 역시 믿지 않는다. 많은 사람이 스스로 부도덕하다고 느끼고 있지 않기 때문이 아니라 그렇게 느낄 참된 이유가 없기 때문이다. 나는 바보가 아니다. 바보가 아니라면 부도덕하다고 불리는 행동들을 회피하고 이러한 행동에 맞서야 한다는 것, 또는 도덕적이라 불리는 행동을 실천하고, 또 이것을 장려해야 한다는 것을 부정하지 않는다. 그러나 나는 지금까지 생각된 이유와는 다른 이유에서 부도덕한 행동을 피하고 도덕적 행동을 장려하기를 원한다. <아침놀> 103

 

니체는 도덕이 참은 아니라고 주장한다. 하지만 니체는 도덕이 참이 아니라는 사실이 도덕을 거부할 이유는 되지 않는다고 주장한다. 거부되어야할 것은 현재 우리가 도덕을 따르는 이유일 뿐이다. 다르게 생각될 필요가 있을지는 몰라도, 우리가 따르는 도덕 자체는 의미가 있다. 도덕을 따르는 동기나 도덕을 근거 짓는 믿음이 오류인 것이 문제일 뿐, 도덕 자체가 추동하는 행위와 결과는 가치가 있는 것이다. 니체는 전통적인 도덕을 반대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그러한 도덕들을 장려하기까지 한다. 해당 구절에서 확인될 수 있는 니체의 주장에 대해서 어느 정도 거리를 둘 수는 있다. 하지만 다음과 같은 사실은 인정해야한다. 1) 폭로나 부정은 니체의 의도가 아니다. 니체의 목적은 도덕에 대한 새로운 이해이다. 2) 니체는 도덕의 객관성을 부정하진 않았다. 개인들의 자의적인 판단과 다른 객관적인 도덕의 근거를 니체 또한 받아들이고 있다.

  상술한 두 조건을 충족시키는 심리주의적 해석 또한 가능하다. 정신을 단순히 생리학적인 결과물로 보지 않고, 특정한 개체가 놓인 환경 속에서, 조건에 따라 달라지는 결과물을 비교 검토해서 무엇이 더 합리적일 수 있는지를 탐구한다면, 이러한 두 조건을 충족시킬 수 있다. 또한 이러한 접근은 충분히 합리적일 수 있다. 이 경우 니체는 불합리한 주장을 한 것도 아니며, 생리학으로 환원되지 않는 고유한 연구를 수행한 것일 수 있다. 때문에 설혹 그것이 생리학과 다른 것일지라도, 이는 충분히 자연주의적일 수 있다. 환경과 조건 또한 자연적인 것이며, 환경과 조건에 기초한 실험 생물학 연구가 당대에 유행하였으며, 니체는 그러한 연구들을 심도 깊게 연구하며 자신의 철학을 제시하고 정당화하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러한 실험 생물학적인 접근에 기초해서 니체 철학을 심리주의적으로 해석할 경우, 니체 철학은 고유성이 없을 뿐만 아니라, 심리주의적 접근을 그럴듯하게 보이게 만들었던 전통과 편견을 깨부수는 급진적인 비판가로서의 니체라는 이미지는 더 이상 유지될 수가 없다.

  니체가 만약 실험 생물학적인 전제 속에서 생물학적으로 정당화될 수 있는 합리성 개념을 토대로 도덕에 대해 평가했다고 해석해보자. 이 경우 미신에 대한 비판은 쉽게 이해될 수 있다. 미신은 특정한 조건 속에서 산출되는 믿음의 일종이다. 하지만 이러한 믿음은 거짓일 뿐만 아니라 생물학적으로 나쁜 것이다. 그것이 생물학적인 활동에 기여하지 않고, 단순히 고통과 두려움을 유발할 뿐만 아니라, 이러한 고통과 두려움을 토대로 신을 달래는 것과 같은 생물학적으로 무의미하거나 해가 될 수 있을 활동에 집착하게 되기 때문이다. 이러한 분석은 미신뿐만 아니라 종교, 형이상학, 도덕으로 확장될 수 있다. 니체 또한 이러한 작업을 수행한 것일 수 있으며, 이에 기초하여 생물학적으로 좋은 활동들을 주장했을 수도 있을 것이다. 미신, 형이상학, 종교, 도덕은 오류이다. 하지만 인간이 이러한 오류를 범할 수 있는 것은 인간이 미신적인, 형이상학적인, 종교적인, 도덕적인 동물이기에 가능한 것이다. 그러한 믿음들은 오류이다. 하지만 그 오류들은 인간에게 도움이 될 수 있다. 그러한 믿음은 그 자체로는 거짓이지만, 그러한 믿음 덕분에 삶에 가치를 부여하고, 삶을 긍정하게 하고, 발전을 추동할 수도 있을 테니 말이다. 그러므로 다음과 같이 결론 내릴 수 있다. 믿음의 가치는 그 자체의 내용에서 비롯되지 않는다. 그러한 믿음이 가져다주는 결과가 중요하다.

  니체에 대한 이러한 해석은 매우 설득력 있는 것처럼 보인다. 이는 니체의 전통 비판을 이해할 수 있게 하면서도, 이러한 비판 이후의 기준을 제시할 수 있게 한다. 또한 니체는 이러한 식으로 자신의 비판을, 가치 재평가를 주장하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니체가 이러한 주장을 하고 있는 것일 경우 니체는 구시대적인 철학을 반복하고 있는 것이 된다. 이러한 비판과 대안 제시는 18세기 계몽철학에서 비롯된 것이며, 이러한 계몽철학의 비판과 대안 제시는 19세기에는 설득력이 없는 것으로 판명되었기 때문이다. 인간이 미신에 빠지는 경향이 있고, 종교는 이러한 인간의 특성에서 비롯된 것이라는 주장은 고대 때부터 끊이지 않았다. 특히 루크레티우스는 철학을, 죽음에 대한 공포와 죽음에 대한 공포를 이겨내기 위해 등장한 종교라는 광신이라는 양극단에 빠지지 않도록 돕는 기술로서 제시했다. 루크레티우스에 따르면 모든 것은 원자가 만들어내는 우연적인 산물이며, 인간이 믿는 다양한 믿음, 현재의 질서 또한 인간의 광기와 우연이 만들어낸 산물에 불과하다. 그러니 전통이나 다른 사람들의 생각에 빠지지 않고 자신에게 도움이 되는 것을 실천해야한다는 것이다. 루크레티우스의 철학은 근세에 유행하였고, 17세기면 루크레티우스처럼 세속적인 방식으로 세계와 인간 사회를 설명하고 철학의 의의를 정위하는 철학 체계가 등장하였다. 루크레티우스의 철학처럼, 유물론적인 자연관에 기초하여 전통이나 편견과 독립적인, 진정으로 인간 본성에 기초한 철학을 주장하고, 이러한 철학을 통해 현재의 미신과 광신을 타파하고 새로운 사회를 구축하는 비전이 등장한다. 바로 이것이 계몽철학이었다.

  계몽철학은 단순히 추상적으로 선언되지 않았다. 계몽철학자들은 앎에 대한 유물론적인 이론을 제시하였고, 유물론에 기초한 지식론에 기초하여 사회 제도를 설계하였다. 그들에게 있어 앎은 형이상학적인 것이 아니라, 물질적인 활동이었다. 그리고 이러한 앎이라는 활동을 통해 힘 있는 상태를 성취하는 것이 도덕적인 선이었다. 앎과 도덕을 성취하는 것은 개인적으로 가능하지 않다. 미신에 빠진 이들의 방해와 위협으로부터 안전할 필요가 있다. 때문에 이러한 계몽은 사회적이어야만 하며, 궁극적으로 사회적인 개혁을 통해서만 달성될 수 있다. 이러한 개혁 상태에서 인간은 더욱 자신에게 이익이 되는 것을 추구할 수 있다. 미신과 편견에 의해 추동되는 거짓된 믿음으로부터 비롯되는 이익에 반하는 행동을 거부하고, 자신에게 진정으로 이익이 되는 행동을 따를 수 있게 되기 때문이다. 이에 적합한 학문 또한 가능하다. 사람들의 이익을 최적화하는 제도는 이러한 학문에 기초하여 설계될 수 있다.

  계몽철학에서 수행된 연구는 조악하지 않았다. 당대 최신 과학에 기초하여 주장되었고, 심도 깊은 분석이 수행되었다. 니체가 주장하는 종교의 폐단 비판, 사제들의 무능에서 비롯되는 기만적인 주장들, 자기애의 중요성, 사회적 선은 인간들의 이기심에서 비롯되며 이를 받아들여야한다는 사회적인 분석 등은 모두 이 시기에 등장하였다. 이러한 분석은 단순히 그 자체로 주장된 것이 아니라, 과학에 기초한 자연적인 세계관에 기초하고 있었다. 계몽철학자들은 과학자이기도 했으며, 과학에 기초하여 자신들의 철학을 전개하였다. 인간의 믿음이 결국 물질들의 반응에서 비롯되는 것이며, 그렇기에 어떤 믿음이든 그 내용은 그 자체로 참-거짓일 수 없다는 주장은 계몽철학자들에게 상식적이었으며, 이미 100년 전 홉스가 주장한 테제였다. 그러므로 니체가 실험 생물학에 기초해서 기성의 전통과 편견에 물든 도덕을 개혁하려고 했다면, 그 자체는 이미 계몽철학의 것이며, 그와 다른 것이라고는 당대의 과학적 발전을 반영한 것밖에 없다는 결론이 나오게 된다. 이 경우 니체 철학은 독창적이지 않으며, 니체는 계몽철학자들의 모방자에 불과하게 된다. 심지어 19세기에 이르러, 미신과 합리적 믿음의 경계가 불명확하며, 사회와 믿음이 합리적으로 분석될 수 없다는 것이 인식되기 시작한다. 사회현상은 계몽철학이 제시한 방식의 분석틀로는, 인간의 심리와 인간의 심리에 기초한 이익 추구로는 설명되지 못한다는 것이 광범위하게 인식되기 때문이다. 19세기의 사회 연구, 사회학, 정치학, 경제학, 종교학, 집단심리학, 인류학 등은 계몽철학적인 자연성 추구를 극복함으로써 자신들의 학문 영역을 정초하였다. 그들이 분석해야할 사회현상은 자연성 추구로는 달성될 수 없다는 것이 입증되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니체가 저러한 조류를 따른 것이었다면, 그의 작업은 독창성이 결여되어있을 뿐만 아니라 시대착오적인 것이 되어 버린다. 

  실험적 생물학에 기초한 심리주의적 집근, 즉 정교한 심리주의 접근 또한 합리적이지 않다. 물론 이 경우 니체 철학을 지성사적으로 탐구하는 것은 의미가 있을지 모른다. 니체가 중요한 것은 철학적 독창성이나, 철학적 의의가 아니라, 과거의 것을 이후 세대에게 전달했기 때문일 뿐이다. 다만 니체 철학의 현대적 의의 따위는 없을 것이기에, 이를 철학적으로 연구하는 것은 불합리할 것이다. 그러므로 이렇게 결론 내려야한다. 심리주의적 접근은, 소박한 경우나 세련된 경우나 모두 불합리하다. 그것은 니체를 철학적으로 연구할 이유를 제공해주지 않기에, 니체에 대한 올바른 해석일지라도, 그러한 연구를 수행하는 것은 철학적으로 불합리하기 때문이다. 니체 철학의 의의를 기성의 형이상학과 종교에 대한 비판에서 찾는 경향이 있지만, 이를 철학적 의의로 평가하기는 어렵다. 페브르가 지적하는 것처럼, 어느 시대에나 무신앙자는 있었다. 어느 시대에나 있는 무신앙자들은 정신적인 것 일반에 회의적이었으며, 이를 비판하곤 하였다. 하지만 그들의 회의와 비판은 합리적이지 않았다. 전통적인 믿음에 기초해 사회가 작동하는 한 대안적 믿음 없는 비판은 비판이 아니라 비방에 불과할 것이기 때문이다. 망나니의 외침과 다르기 위해서는 근거와 대안이 필요하다. 그것을 충족시키지 못할 경우 이는 아무런 의의를 제공해주지 못한다. 니체가 산 19세기 후반은 더더욱 그렇다. 19세기에 종교는 쇠퇴하고 있었으며, 형이상학 또한 위기에 처해 있었다. 당시 지식인들에게 종교와 형이상학을 비판하는 것은 무의미했다. 이미 쇠퇴하고 있었으며, 이미 믿음의 대상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들에게 있어 중요했던 것은 대안적 종교이자 대안적 형이상학이었지, 기성의 종교와 기성의 형이상학이 아니었다. 따라서 니체를 전통의 파괴자로 이해하는 것은 니체 철학의 가장 중요한 면모를 이해하지 못하게 만든다. 니체가 미신을 비판하고 종교를 비판함에도, 그는 미신과 종교의 중요성을 지속적으로 주장하고, 이를 공정하는 작업을 했다는 현대의 연구에 주목할 필요가 있는 것이다. 따라서 다음 장에는 미신과 종교의 중요성을 철학적으로 근거지을 수 있는, 니체에 대한 미학적 접근을 검토하도록 하겠다.

 

3. 미학적 접근 비판

  니체의 저작이 문학적인 의의가 있다는 것을 부정하긴 어려울 것이다. 또한 니체의 저작이 문학적 성격이 있으며, 바로 그러한 문학성에 근거했을 때만 분석될 수 있는 특징이 있다는 것도 부정할 수 없을 것이다. 하지만 니체의 철학을 해석하는 데 있어 중요한 것은 문학적 정교함이나 문학적 아름다움이라기보다는, 바로 그러한 문학적 의의를 근거 짓는 철학적 의의일 수밖에 없다. 니체의 문학성에 근거하여 니체의 모순을 정당화하는 것은 때문에 두 가지 문제를 갖는다. 하나는 니체의 모순을 체계적으로 이해할 수 있는 가능성을 폐쇄하고, 니체를 진지하게 읽는 것을 방기하게 된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니체가 문학적일지라도, 바로 그러한 문학성을 추동하고, 특정한 방식으로 문학적 저술을 한 근거는 모순을 정당화하지 못한다는 것을 외면하게 된다는 것이다. 한 시인이 말마따나, 니체는 모순적이기에 시인이 아닐 수 있다. 문학이라고 모순을 당연시 하지 않는다. 문학 또한 모순을 문제시하며, 이를 언어의 아름다움 따위로 이를 정당화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니체의 모순, 니체의 문학성을 주장할 뿐, 바로 그러한 문학성 배후의 의의를 이해할 필요가 없다고 주장하는 것은, 철학적으로나 문학적으로나 납득할 수 없는 주장이다. 이를 공공연하게 주장한다면, ‘문학’이 무엇인지도 모른채, 문학이란 이름으로 자신의 게으름과 무지를 정당화하는 지적 게으름의 산물에 불과하다. 따라서 니체의 문학성은 당연시되어야할 것이 아니라 분석될 필요가 있다.

  니체가 문학적인 방식으로 자신의 철학을 전달한 것은 그것이 철학적으로 유의미해서라고 볼 근거가 있다. 이를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문학은 감성에 기초하여 제작된 정교한 구조물이다. 감성에 기초하여 제작된 정교한 구조물로서의 문학은 자연적인 토대에서 인간이 고유한 정신적 구조물을 형성하는 것을 이해할 수 있게 한다. 이러한 구조물의 제작원리는 우리 인간이 어떻게 상상력을 발휘하여 독특한 믿음 체계로 나아가게 되는지를 이해할 수 있게 하고, 오류에도 불구하고 어떤 믿음을 가질 수 있는 이유를 이해할 수 있게 한다. 문학이 바로 그러한 믿을 수 있는 거짓된 이야기의 실례이기 때문이다. 또한 문학은 그러한 구조물을 통해 설득을 성공한다. 문학은 사실성에 기초하여 설득력을 갖는다. 문학은 인간이 설혹 거짓일지라도 어떤 믿음은 가질 수 있고, 어떤 믿음은 갖지 못하는지를 이해할 수 있게 할 뿐만 아니라, 거짓임에도 불구하고 믿을 수 있는 무엇인가를 제공하는 실례이다. 이러한 설득은 형이상학적 실재를 요구하지 않는다. 때문에 형이상학적 실재, 초월적 진리를 주장하지 않는다면 문학적인 설득은 좋은 대안이 된다. 그러므로 니체가 문학적 표현을 취한 것은 철학적 의의가 있으며, 그의 표현이 제공하는 설득력을 문학적으로 분석하는 것은 의미를 갖는다. 그것은 형이상학적 진리를 거부하는 그의 철학관에서 실천 가능한 철학 형식일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문학적 형식을 매개로 그의 도덕 철학이 표현될지라도, 철학적 의의는 그 내용으로 담보될 수밖에 없다. 따라서 그의 도덕 철학이 왜 문학을 요구하였는지, 그의 도덕 철학의 내용과 표현 형식을 일치시킬 수 있는 철학적 관점이 무엇일 수 있는지를 설명하며, 니체 철학을 문학적 작품으로, 그래서 미학적 관점에서 해석해야한다는 주장하는 접근의 의의와 한계를 밝히도록 하겠다.

  니체에게 도덕의 문제는 자아의 문제였다. 그가 라로슈푸코에게 배운 것은 인간의 이타적인 행동이 사실은 이기적인 동기에 근거하고 있다는 통찰이 아니었다. 그가 주목한 것은 이기성이 아니라 자아였다. 니체는 이기적인 행동과 이타적인 행동을 질적으로 구별하는 것은 비판한다. 그에게 있어 이기적인 행동은 이타적인 행동의 변형이며, 이타적인 행동은 이기적인 행동의 변형이다.(니체 인용) 결국 그러한 모든 행동은 그것이 좋다고 판단하는 자아를 매개로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이타적인 행동 또한 이기적인 행동이다. 그런데 그러한 이기성은 그것이 실제로 자신에게 도움이 된다는 의미에서 이기적인 것은 아니다. 실제로 세상에는 그 어떤 이기적인 동기로 해석되지 않는 이타적인 행동도 존재한다. 오히려 이것이 중요하다. 만약 어떤 이타적인 행동이 정말로 도덕적인 종류의 것이라면, 바로 그러한 이타적인 행동은 이타적인 동기에서 비롯되어야 한다. 그런데 이러한 이타적인 동기가 가능하기 위해서는 바로 그러한 이타적인 행동이 좋다고 생각할 수 있어야 하며, 그러한 행동에 동기를 부여할 수 있어야 한다. 니체가 진단하기로 바로 이러한 판단과 동기부여의 가능성을 매개하는 것은 종교나 형이상학이 아니라 자아였다.

  니체가 탐구하는 자아는 유일하고 단일한 실체가 아니다. 한 인간을 바로 그 사람이게 만드는 정체성의 근원이 아니다. 파편적이고 분열적인 다양한 활동들 속에서 그러한 활동들을 유발하고, 지속하게 만드는 매체 불과하다. 하나의 자아란 것은 그렇기에 실체적으로 선언될 것이 아니다. 인간이 수행하는 무수히 많은 활동들 중 어떤 특정한 활동들을 가능케 하고, 지속 가능하게 만드는 특정한 정신적 구조물에 불과하다. 자아란 우리가 감각하는 무수히 많은 것들 중에서 어떤 특정한 것들에 더욱 주목하게 만들고, 그래서 지각하게 만들고, 이에 대해 체계적으로 반응하게 만드는 활동 원리라 할 수 있다. 그것은 실체는 아니지만, 바로 그러한 행위를 가능케 함으로써 그렇게 자신을 드러낼 수 있다.

  이러한 자아론은 니체 철학의 인식과 실천의 바탕에 깔려 있다. 니체가 말하듯, 모든 것을 감각하는 것은 불가능하며, 특정한 것만을 감각할 수밖에 없다. 인간은 왜곡 없이 세계를 마주할 수 없다. 중요한 것은 왜곡인지 아니냐가 아니라 어떤 왜곡인지이다. 어떤 방식으로 왜곡할 것인지를 결정하는 것이 바로 자아다. 자아는 인간이 왜곡하는 방식들과 그러한 왜곡 속에서 경험되고, 실천될 수 있는 행위인 것이다. 때문에 자아는 여럿이다. 이는 모두가 다른 자아를 가지고 있다는 의미에서 그러한 것이 아니라, 특정한 방식의 왜곡, 특정한 방식의 경험, 특정한 방식의 실천 각각에 해당되는 자아가 있다는 의미이다. 니체에게 있어서 자아는 여럿이며, 여럿일 수밖에 없다. 각각이 각각의 의지를 갖는다. 이타적인 행동이나 이기적인 행동은 그렇기에 본질적으로 다르지 않다. 그것은 행위 자체로는 중요치 않다. 니체가 직접 말하듯, “중요한 것인 어떤 행동인지가 아니라 누가 행동하는지”이다.

  무수히 많은 자아가 있고, 그러한 자아들은 자신의 방식에 맞는 지각과 경험과 실천을 의지한다. 하지만 모든 것이 가능한 것은 아니다. 바로 그러한 자아들 사이에서 경쟁이 일어나며, 이에 의해 지배적인 자아가 형성된다. 여기서 지배적인 자아는 유일할 이유도 없으며 모든 것을 지배할 이유도 없다. 모든 지각과 모든 경험과 모든 실천을 지배하진 않지만, 적어도 생존이 가능할 정도로 일관성을 부여할 수 있으면 된다. 생존은 그 정도로도 충분하다. 하지만 특별한 활동은 그러한 모호한 지배조직 상태에서는 불가능하다. 인간의 특별한 활동은 독특한 방식의 지배 속에서만 가능하다. 니체가 주목한 사태, 이타적인 행위의 출현은 바로 이러한 지배적인 자아의 형성을 가리킨다. 다른 이들의 행위와 말을 통해 이타적인 행위를 추동하는 자아가 전염된다. 심지어 명민하고 강한 정신의 소유자들조차도 그러한 자아에 지배받게 된다. 바로 이러한 지배를 가능케 하는 자아가 어떻게 형성되고, 어떻게 전염될 수 있는지를 다루는 것이 미학적 접근이다.

  니체는 독자들에게 자기 자신이 되라고 요구한다. 네하마스가 분석하듯 이러한 요구는 역설적이다. 니체는 자기 자신이라는 허상을 배제한 철학자로 알려져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네하마스가 지적하듯 니체는 자아를 실체가 아니라 내적인 다수성을 조직해내는 도구이자 원리로 보았으며, 이러한 관점에서만 자기 자신이 되라는 니체의 요구를 온전하게 이해할 수 있다. 이는 니체 본인의 주장과 잘 일치한다. 니체는 주체를 부정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것은 언어적 특성에서 비롯되는 미신이다. 하지만 바로 이 미신이 일반적으로 유통되고 있다는 점에서 이 미신은 하나의 현실을 이룬다. 중요한 것은 주체라는 개념이 미신이라는 사실이 아니라, 그것이 현실로서 존재한다는 것이며, 그것의 효과를 활용해 어떤 가치를 창출해내냐는 것이다.

 

주체라는 원자는 없다. 그럼에도 주체의 지배는 증대하기도 감소하기도 하고, 그 중심이 계속해서 유동하곤 한다. 알맞은 구조를 갖추지 못한 주체는 부분들로 분열한다. 주체는 허약한 주체를 파괴하지 않고 그것을 변용하여 자신의 부분으로 복속시킴으로써, 일정 부분 그것과 새로운 통일체를 이룩한다. 주체는 ‘실체’가 아니다. 간접적으로, 즉 자신과 다른 것을 자신의 부분으로 복속시킴으로써 자신을 초월하는, 자신을 보존하고 증대시키는 노력이다. (의지 488)

 

실체로서의 주체를 부정한다고 해서 현상으로서의 주체를 부정할 이유는 없다. 번개라는 현상의 주체는 없을지라도 그러한 활동은 분명히 있다. 그러한 활동에 하나의 이름을 붙이는 것은 거짓이고 허구이며 미신일지라도, 이러한 왜곡은 피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유용하다. 중요한 것을 이를 조직해내는 힘이다. 니체는 이를 인간에게도 적용한다.

 

영혼을 영원하고 보이지 않는 불멸의 것이나 단자로 생각하는 믿음을 과학에서 추방해야만 한다. 그럼에도 ‘영혼’이란 단어를 과학에서 제거할 이유는 없다. (중략) 영혼에 보다 새롭게 세련된 가설을 세울 수 있는 길은 열려 있다. ‘죽게 마련인 영혼’, ‘다양체적 주체로서의 영혼’ 및 ‘충동과 감정의 사회적 구조로서의 영혼’과 같은 개념은 과학의 분야에서 그 정당한 권리를 인정받아야 한다. (선악 12)

 

이처럼 니체는 인간 자신에 대한 인식에서도 주체라는 개념을 인정한다. 그것이 문제적인 것은 이에 대한 불필요한 미신, 가치 없는 미신일 뿐이다. 인간의 영혼, 인간의 자아라는 개념 그 자체는 문제가 없다. 다만 이를 위해서는 “다양체적 주체로서의 영혼”을 받아들이고, 이를 조직하는, 여러 자아들을 하나의 통일체로 조직해내는 것이 중요하다.

 

하나의 것이 필요하다. 인격Persone에 하나의 양식Stil을 부여하는 것은 희귀하고 위대한 예술이다. 이것은 자신의 본성의 모든 장단점을 조망한 다음에 예술적 목적에 적합하게 조화함으로써 하나하나가 예술과 이성으로 표현되며, 심지어는 약점도 눈을 즐겁게 하는 예술이다. 여기에는 많은 제2의 자연이 추가됨으로써 제1의 자연의 일부가 사라지기도 한다. 이것은 오랜 훈련과 매일의 근면을 통해서 이루어지는 일이다. 여기에서 제거될 수 없는 추함은 숨겨진다. 그때 추함은 숭고함을 통해 재해석된다. 모호하며 형태를 갖추기를 거부하는 것들도 보존되어 원경에 배치된다. (중략) 마침내 작품이 완성되면 우리는 하나의 지배적 취향이 크고 작은 모든 것들을 얼마나 많이 지배하면서 하나의 작품으로 빚었는지 분명하게 알 수 있다. 우리의 생각만큼 이러한 취향이 좋은가 나쁜가 하는 것은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 것은 단일한 취향이라는 사실이다. (학문 290)

 

니체는 이러한 통일성을 이룩하는 기술을 ‘예술’로 표현한다. 양식은 파편적인 조각들을 취향의 일관성을 매개로 하나의 통일체로 이룩하는 미적 조직 원리를 의미한다. 니체는 자아(인격)들에 대해서도 이러한 미적 조직 원리를 통한 통일성 달성이 가능하다고 여기고 있다.

  니체가 다수의 자아들을 하나로 통일시키는 조직 원리로 미적인 조직 원리를 제안한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니다. 형이상학적이든 종교적이든 초자연적인 것들을 배제할 경우 개별적인 물질들을 하나로 통일시키는 것은 개별물질들이 가진 고유한 자극반응성sentiment일 수밖에 없다. 물질의 자극반응성에 해당되는 것이 자아들에게는 취향이다. 취향은 다양한 사물에 대한 지각, 경험, 행동을 조직하는 원리를 가리킨다. 예술은 자신의 양식으로 고유한 취향을 길러낸다. 때문에 위대한 예술은 다수의 취향들 사이에서 다른 취향들을 제압하고 자신이 제안하는 취향으로 향유자를 조직해내는 힘이 있다. 이렇게 길러지는 취향을 매개로 공적인 인격을 형성해내는 것이 ‘교양Bildung’ 이념이었으며, 니체가 배우고 자란 신인문주의 조류의 이상이기도 했다. 때문에 니체가 미적인 원리에 기초하여 자아들을 사이에서의 통일성을 획득하려고 시도한 것은 기행이나 실험이 아니라, 근대에 등장한 자연적이고 과학적인 세계관과 일관적이면서도 그러한 자연세계 속에서 형성되는 인간의 고유한 문화 영역을 설명하는 당대 최신의 설명 방식을 채택한 것임을 알 수 있다.

  미적 원리는 중요하다. 하지만 정말로 중요한 것은 니체가 미적 원리를 자신의 철학의 도구로 채용하지 여부가 아니라, 니체가 어떤 미적 원리를 이상적인 것으로, 가치 있는 것으로, 진정으로 의미 있는 것으로 여겼는지를 이해하는 것이다. 니체는 다음과 같은 평가 기준을 제시한다.

 

과거에 살았던 사람을 구원하는 것, 그리고 모든 ‘과거’를 ‘나는 그것을 의지한다’로 재창조해내는 것. 이것만이 진정한 구원이다. (중략) 의지는 우리를 자유롭게 한다. 그런데 이러한 해방자에게 족쇄를 채우는 것은 무엇인가? 바로 ‘과거’이다. 이것이 의지가 이를 갈면서 깊은 슬픔에 잠기는 이유이다. 이미 끝나버린 과거에 대해서 의지는 무기력하다. 의지는 모든 지나간 과거에 분노하는 유령과 같은 것이 되어 버린다. 의지는 과거까지 의지의 대상으로 삼을 수 없다. 시간과 시간의 질투심을 무너뜨릴 수 없다. 바로 이 현실이 의지의 가장 고독한 슬픔의 원인이다. (차라투스트라 2권 20)

 

니체는 진정한 가치는 과거에 대한 의지 가능성에서 창출될 수 있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과거에 대해 의지하는 것이 어렵다고 말한다. 그 이유는 다음과 같다.

 

가장 무거운 무게, 어느 날이나 어느 깊은 밤에 그대의 가장 고독한 공간으로 악마가 몰래 찾아와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고 하자. ‘네가 현재 살고 있고, 또 과거에 살아 왔던 삶을 다시 한 번, 아니 수없이 되풀이해 살아야 한다. 아무것도 새로운 것은 없다. 모든 고통과 기쁨, 모든 생각과 모든 한숨, 너의 삶에서 말할 수 없이 크고 작은 모든 것들이 모두 똑같은 순서로 되돌아올 것이다. 심지어 이 거미와 나무 사이의 달빛, 이 순간이 나 자신까지 포함해서 그대로 되돌아올 것이다. 시간의 영원한 모래시계는 계속 거꾸로 돌면서 회전하고 먼지보다 적은 너도 함께 회전할 것이다.’
그렇다면 그대는 몸을 땅바닥에 내던지면서 이를 갈고 악마를 저주하겠는가? 아니면 ‘너는 신이다. 그보다 더욱 신성한 말을 들어 본 적이 없다’라고 대답할 수 있는 그러한 놀라운 순간을 단 한 번이라도 체험한 적이 있는가? 만일 이러한 생각이 그대를 지배하고 있다면 그 생각이 현재의 그대를 변화시키거나 그대를 파멸시킬 것이다. 모든 것들에 대해서 ‘나는 다시 이것을 원하는가? 수없이 반복하기를 원하는가?’라고 묻는 질문이 그대의 행동에 무거운 무게를 부과할 것이다. 이러한 궁극적인 긍정과 확증, 그 이상의 어떤 것도 원하지 않기 위해 얼마나 자신과 삶을 사랑해야 하는가! (학문 341)

 

과거를 의지하기 어렵다는 니체의 진단은 그가 제안하는 기준의 엄격함에서 비롯된다. 니체는 사소한 것, 무의미한 것, 추악한 것을 모두 포괄하는, 자기 자신과 이 세계 전체를 긍정할 수 있는지를 자신의 평가 기준으로 내세운다. 그는 추상적으로 제시된 세계, 과거, 나를 긍정 가능성을 평가 기준으로 제시하는 것이 아니다. 세부적인 것까지, 그것의 기억 여부나 인식 여부와 독립적으로 그러한 세부적인 것 모두를 포괄적으로 긍정할 수 있는지 여부를 평가 기준으로 제시하고 있다. 영혼회귀라고 불리는 이러한 판단 기준이 우주론적인 것이든 그렇지 않은 것이든, 니체는 과거로 인식될 수 있는 모든 것을 긍정할 수 있는지를 평가의 기준으로 내세운다. 

  니체가 과거를 긍정할 수 있는 조직 원리로 특정한 문학 양식의 미적 원리를 제안하고 있는지는 크게 중요하지 않다. 소설이 과거를 정당화하고, 세계와 자아의 갈등을 조화로 인식하게 하고, 그 속에서 삶을 긍정하는 미적 조직 원리를 추구했다는 사실은 흥미를 유발하지만 그렇게 중요하지 않다. 이것이 중요하지 않은 것은 소설은 하나가 아니며, 소설 장르도 하나가 아니며, 소설의 미적 원리도 하나가 아니라는 이유 때문만은 아니다. 이러한 다수성에 의해 소설이 니체가 그토록 반대한 무아를 정당화하기도 했기에 결국 중요한 것은 구체적인 소설적인지 아닌지가 아니라 구체적으로 어떤 양식적 통일성을 추구했는지를 제시하는 것이라는 지적은 중요할 수 있겠지만, 내가 지적하는 문제는 이것이 아니다. 내가 지적하려고 하는 문제는 니체의 기준은 사실과 역사를 포괄하게 만든다는 사실이다. 사실을 중요시한 소설 조류에서도 모든 사실과 모든 과거를 포괄하라고 요구하진 않았다. 졸라는 자신의 소설을 과학으로, 실험이라 주장한다. 졸라는 세계, 사회, 인간을 이해하고 탐구하는 학문 매체로서 소설의 유용성을 제시하며, 자연주의적인 소설을 기획하지만, 그는 모든 것을 포괄하라고 요구하진 않는다. 그러한 요구는 불가능한 요구이며, 소설에 불필요하며, 탐구를 방해할 것이기 때문이다. 때문에 니체가 제안한 평가 기준이 사실을 포괄한다는 것은 그의 기획을 문학과 다른 것이게 만든다. 그가 긍정하려는 과거가 역사 연구에 의해 영향을 받게 되기 때문이다. 과거에 대한 우리의 인식이 달라진다면, 새로운 긍정이 필요하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영원회귀가 우주론적인 원리인지와 무관하게, 그것이 전체에 대한 긍정을 요구하기에 역사학을 비롯한 여타 세계에 대한 학문으로부터의 영향으로부터 니체의 영원회귀는 자유로울 수가 없다. 그의 영원회귀가 바로 그러한 영향들을 포괄하라고 요구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니체의 도덕론은 사실 독립적으로, 역사 독립적으로, 과학 독립적으로 읽힐 수 없다. 문학적으로, 미학적으로 독해된 니체 철학이 역사와 과학을 포괄할 것을 요구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니체의 도덕 철학을 우화로, 문학적인 구조물로 해석하는 것은 의미가 있음에도, 니체 철학에 대한 온전한 해석일 수 없다. 우리는 니체의 역사학을 진지하게 다루어야한다.

 

 

4. 니체와 역사학

  니체 철학에서 역사학이 차지하는 중요성이 오랫동안 주목받지 못한 것은 사실이다. 젠슨이 지적하는 것처럼 이에 대한 연구서는 적었으며, 역사학의 중요성을 인식한 이들도 역사학의 중요성을 니체 철학 체계 내에서 검토하지 않았다. 때문에 최성철은 <과거의 파괴>에서 다음과 같이 주장할 수 있었다: 니체와 역사학의 관계에 대한 연구는 부재하다; 니체는 역사학에 대해 크게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다; 하지만 그의 철학은 쇼펜하우어 철학처럼 과거를 파괴하는 효과를 가지고 있었다; 니체는 자신의 철학이 가진 이러한 효과를 고려해 모호하게나마 역사학과 역사의 가치를 부정했다. 안타깝게도 최성철의 이러한 진단은 시대착오적이다. 니체가 그의 생애 전반에 걸쳐 역사와 역사학을 중시했다는 전기적 사실을 입증하는 연구가 이미 나왔으며, 그의 역사학이 그의 철학에서 중요하며, 이를 고려하지 않고서는 그의 철학을 일관적으로 이해할 수 없다는 연구가 나왔으며, 니체는 심도 깊은 역사 연구를 토대로 자신의 철학을 정교화 했음을 밝힌 연구가 나왔기 때문이다. 역사학적으로나 철학적으로나 니체 연구에 있어서 역사와 역사학의 중요성을 이제는 부정할 수 없다. 선행 연구의 부재를 불평할 수도 없다.

  니체가 역사와 역사학을 중시했다는 전기적 사실은 부정할 수가 없다. 문헌학은 역사학과 동근원적인 학문이었으며, 니체 시대에 문헌학은 오늘날처럼 개별화되고 독립화되어 고립된 학문이 아니었다. 19세기 독일의, 특히 니체가 전공하였고 그의 경력을 시작한 문헌학 전통은 신인문주의에 기초한 범인문학적인 고대학Altertumswissenschaft 전통이었다. 니체 또한 문헌학을 오늘날의 전문적인 문헌학과 동일시하지 않았다. 전문적인 지식을 다루지만, 그는 전통에 따라 문헌학을 Ars Critica라고 규정한다. 비판의 기예로서의 문헌학은 문헌 연구에 국한되지 않는다. 비코에 따르면, philology는 logos를 추구하는 학문이며, 자연적 법칙으로 환원되지 않는, 인간의 내재성에 의해서 발생하는 질서를 탐구하는 학문이다. 비코에게 있어 이러한 인간학으로서의 문헌학은 역사학과 언어학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양자 모두 역사적 발생 속에서만 이해될 수 있다. 이러한 용법이 보편적이라고 주장할 수는 없어도 특이한 것은 아니었다. 로빈슨이 말하듯 언어학의 역사에서 문헌학, 문법 연구, 논리학 등은 오늘날의 의미로 국한되지 않았으며, 언어와 생각을 가능케 하는 원리와 그 속에서 발견될 수 있는 질서를 다루는 의미로 사용되곤 하였기 때문이다. 니체의 문헌학 연구는 때문에 역사학 연구였으며, 그가 문헌학의 토대가 되는 역사학적 지식의 인식론적인 근거를 고민한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니었다. 니체를 철학 연구로 뛰어들게 만들고, 니체 스스로 자신이 철학을 하고 있다고 생각하게 만들고, 니체가 문헌학은 결국 철학이어야만 한다고 주장하게 만든 것은 역사학적 지식의 인식론적 근거였다. 오늘날 니체 연구에서 주목 받고 있는, 니체의 자연주의의 근거가 된 랑에의 유물론의 역사에 대한 니체의 연구와 니체의 관점주의의 근거가 된 스피어의 급진적 경험론에 대한 니체의 연구는 이러한 맥락에서 이루어진 것이었다. 니체가 문헌학이 철학이라고 주장하게 되고, 철학 연구의 중요성을 강조하게 만든 것은 오직 철학을 통해서만 역사학적 지식이 근거 지어질 수 있다는 니체 자신의 성찰의 결론이었다.

  전기적으로 니체가 역사학을 중요시했다는 것이 니체 철학과 역사 및 역사학의 긴밀성을 증명해주진 않는다. 전기적 사실은 역사적 우연에 의해 유발된 그의 인생 경로와 그것에서 비롯된 그의 괴벽만을 의미할 수 있다. 설혹 니체 철학이 역사학 연구에서 비롯된 그의 문제의식 속에서 태동했을지라도, 니체가 말한 것처럼 기원은 중요치 않을 수 있다. 물론 그럼에도 니체는 기원을 연구했지만 말이다. 결국 우리가 해석해야할 것은 니체가 철학적으로 역사학을 중요시한 그 내적 근거이다. 초기 니체가 오직 미적 원리만을 중시했다는 해석은 논쟁적이지만, 그럼에도 그가 소위 중기에 이르는 시기에 자신이 이전까지 미적 원리에 빠져 있었으며, 그것은 병적인 것이라고 자기비판을 한 것 또한 사실이다. 때문에 니체의 자기비판의 이유를 이해하는 것이 도움이 될 것이다.

  초기에서 중기로의 전환의 계기가 된 니체의 자기비판은 바그너에 대한 비판으로 표현된다. 니체가 제시하는 비판의 핵심은 현실성이다. 니체는 바그너의 음악극이 가진 통합의 힘을 찬양했다. 다수의 음들이 가진 내적 긴장을 하나의 가시적인 선율로 조직해내는 통합의 힘, 다수의 동기들, 다수의 인물들 사이에서 교차적으로 복잡성이 증대되는 극을 하나의 통일체로 조직해내는 통합의 힘, 문학과 음악을 자신만의 하나의 고유한 장르로 조직해내는 통합의 힘, 각각의 다수성을 유지시키면서도, 그것들의 변신과 급변을 조장하면서도, 그것들이 가진 내적 긴장을 하나의 통일체로 조직해내는 바그너의 실력은 니체에게 있어 예술의 이상과도 같았다. 니체가 바그너를 비판하는 것은 음악 내적 측면이 아니라, 그것이 지시하는 현실에 대한 인식에 있었다. 니체가 진단하기로 바그너의 음악은 주어진 현실에 대한 이해를, 그러한 주어진 현실에 대한 긍정을 추구하지 않는다. 바그너의 음악은 오직 아름다운 것만을 추구한다. 바그너의 통합의 힘은 현실에 봉사하는 것이 아니라 환상에 봉사한다. 그래서 위험하다. 바그너의 예술적 탁월성이 가진 힘이 강력하기에, 그의 예술은 사람들을 환상으로 몰아넣는다. 바그너의 환상에 매료된 사람들은 현실을 잊어버린다. 현실과 환상을 구별하지 못하게 된다. 그래서 더욱 위험하다. 참된 철학이 전제되지 않은 예술은 무의미하거나 위험하다. 진정한 예술은 삶에 봉사해야한다. 삶에 대한 예술의 봉사는 단순히 삶을 견디게 하는 것이 아니다. 삶을 견디게 하는 환상 또한 의미가 있지만, 삶에 가치를 부여하고, 예술과 현실 사이의 간극을 긍정할 수 있는 예술이 이보다 우월하다.

  니체의 이러한 예술론은 비극의 탄생에서도 발견된다. 니체는 “앎은 행동을 주저하게 만들고 예술은 우리를 행동할 수 있게 만든다”고 말하며, 예술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그리스인들은 삶은 고통이라는 실레노스의 지혜를 받아들였음에도 명랑할 수 있었다. 이는 그들의 예술적 성취 덕분이었다. 그들은 아폴론적인 서사시를 통해 삶의 고통을 잊는 예술적 환상을 즐겼다. 이는 단순히 현실 도피를 위한 환상이란 점에서 위대한 것이 아니라, 고통스러운 삶을 견디게 하는 힘을 부여하면서도, 절제된 질서를 추구하였기에 위대한 것이다. 그것은 현실적 기능과 미적 양식 모두에서 위대하다. 디오니소스적 서정시 또한 마찬가지이다. 그것은 오리엔트에서는 광기에 불과했다. 그리스인들은 디오니소스적 광기를 통제해내어 하나의 통일적 양식으로 조직시켜냈기에 위대한 것이다. 그리스 예술의 정점이 비극은 바로 이 두 미적 원리를 통합시킴으로써, 주어진 현실에 대해 긍정할 수 있게 만들고, 그렇게 긍정된 현실을 살아가는 힘을 고양시키고, 그러한 현실 속에서 목적으로 추구할 만한 미적 이상으로서의 비극을 제시했다는 점에서 위대하다. 비극의 위대함은 예술과 현실을 긴장 속에서 하나의 통일체로 이룩한 데에 있는 것이다. 때문에 바그너의 예술은 그 원리는 올바를지라도 그 수행에서 빗나갔기에 문제적이다. 예술은 현실을 인식케 하고 그것을 긍정하며, 그렇게 긍정된 현실 속에서 미적 이상을 추구하는 것을 정당화하는, 재귀적으로 정당성을 부여하는 “생태적 원리”를 따라야만 한다.

  니체가 예술을 현실주의적인 관점에서 통합해야한다고 주장하는 것은 분명하다. 하지만 이것이 바로 역사와 역사학의 중요성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현실주의는 다양한 방식으로 성취될 수 있기 때문이다. 니체가 역사와 역사학을 중요하게 여긴 것은 현실을 형성하는 것이 역사라고 판단해서이다. 그런데 역사가 현실을 형성한다는 것은 단순히 현재의 상태가 역사적으로 형성되었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역사가 현실을 형성할지라도, 역사는 중요하지 않을 수 있다. 현재의 상태만을 분석해도 현재를 이해하는 것은 충분할 수 있기 때문이다. 역사적인 경로를 거쳐 형성한 것일지라도, 결국 중요한 것은 현재의 기능이기 때문이다. 20세기 초반에 등장한 공시적인 일반 이론들이 주장한 것처럼 현재를 분석하는 체계적 이론이면 충분할 수도 있다. 니체가 역사와 역사학을 중요시한 것은 그것들이 현재의 상태를 형성했다는 사실로부터 비롯된 것이 아니라, 현재의 상태를 조직하는 것이 바로 역사에 대한 의식에 기초하고 있다는 니체 자신의 진단에서 비롯된 것이다.

  19세기가 역사주의의 시대인 것은 잘 알려져 있다. 특히 19세기 독일의 정치사회문화적인 담론에서 역사만큼 중요한 화두는 없었다. 1871년 제2독일 제국이 선포되기 전까지 독일이라는 하나의 나라는 세상에 없었다. 스탈 부인이 지적하듯, 이는 역설적인 것이었다. 하나의 독일을 가능케 할 구체적인 하나의 국가도, 하나의 국제도, 하나의 법률도 없음에도 독일이란 정체성은 현존했기 때문이다. 스탈 부인은 이러한 하나됨이 부재의 현존을 가능케 하는 상상 덕분에 가능한 것이라고 설명한다. 실제로 그들이 하나인 물리적인 근거도 없고, 정치 사회적인 근거도 없지만, 분명 그들과 다른 이들을 구별할 어떤 정체성은 존재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정체성의 근저에 역사의식이 있었다.

  기억이 개인의 정체성을 담보하고 보존하듯이, 역사는 공동체의 정체성을 담보하고 보존한다. 홉스가 논리적으로 보여주듯 임의의 여러 인간을 묶은 것은 하나의 통일성을 담보해주지 못한다. 국가와 같은 공동체는 임의의 여러 인간을 묶은 것일 수 없다. 내적 통일성이 없다면 국가가 존재한다고 말할 수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하나의 공동체가 가능하기 위해서는 그러한 공동체를 가능케 하는 통일적인 조직 원리가 필요하다. 독일에서는 역사 속에서 형성되는 민족 안에서 살아있는 민족정신 담론이 유행한다. 이러한 민족정신 담론에 기초하여 프러시아 중심의 소독일주의 통일이 성취된 것이 1871년 제2제국의 문화사적인 맥락이다. 프러시아 중심의 소독일주의는 독일 민족정신을 루터에게서 찾았다. 해당 담론에 따르면 종교개혁기에 가톨릭의 폭정으로부터 탄압 받는 프로테스탄트들을 제후들이 보호했듯이, 영국과 프랑스의 경제적이고 문화적인 침략에 맞서 프러시아가 나서야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이데올로기에 입각해 프러시아의 통일전쟁은 프랑스의 억압으로부터 독일을 해방시키는 독립전쟁liberation war으로 정당화되었으며, 비스마르크의 철권통치는 독일인들의 소명인 프랑스와 영국의 경제적이고 문화적인 침략에 맞선 문화투쟁KulturKamp으로 정당화되었다. 이러한 정당화의 뿌리에는 독일 민족의 역사에 대한 특유의 해석이 자리 잡고 있었다.

  니체는 이러한 독일의 문화적 맥락을 잘 인식하고 있었다. 니체는 역사의식의 중요성이 대두되는 것을 인식하였으며, 바로 그러한 시대적 분위기를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 역사학적 지식의 의미에 대해서 고찰한 것이다. 니체는 당대에 유행했던 현재의 정치에 봉사하는 역사를 “기념비적 역사”로 명명한다. 기념비적 역사는 현대의 눈으로 보았을 때 중요한 역사들을 발견하며, 이러한 중요한 역사적 사건의 의의를 현대적 관점으로 해석함으로써, 현대에 의미를 부여하는 활동이다. 니체가 주장하듯이 통일적인 힘을 성취하는 것은 중요하다. 이러한 통일적인 힘을 성취하기 위해 과거를 활용하는 것이 바로 기념비적 역사인 것이다. 현재를 하나로 통일하기 위해서는 서로 다른 인간들을 하나로 조직해내고 정체성을 부여하는 조직원리가 필요하다. 역사는 이에 봉사할 수 있다. 현대인들은 무로부터 나온 것이 아니다. 그들은 선조로들로부터 나왔다. 때문에 현대인들은 선조들에게 존재를 빚지고 있다 인식될 수 있다. 그러니 현대인들이 선조들에게 빚진 존재를 하나의 정체성으로 구체화해줄 역사적인 신화를 통해 그들의 부채감을 역사적인 투쟁의 동기로 빚어낼 수 있는 것이다. 바로 이러한 역사적인 신화를 구축하는 것이 기념비적 역사이다.

  하지만 19세기에 발전하고 있던 역사학 조류 안에는 기념비적 역사와 긴장을 야기하는 역사적학적인 학문의식이 있었다. 이것이 니체가 “호고주의적 역사”로 명명하는 역사의식이다. 호고주의는 학문적인 역사를 성립시킨 토대이다. 과거의 물건에 대한 수집벽을 가리키는 말이었던 호고주의는 본래 학문적 의의와 무관한 기벽으로 여겨졌다. 하지만 호고주의 전통 속에서 역사학 연구가 발전하고, 이렇게 발전된 역사학 연구가 문화적인 혁명으로 이어졌다. 전통에 의해 정당화되는 관습과 제도, 교리 등이 역사적 근거가 없는 꾸며진 것이라는 것이 호고주의에 기초한 역사학 연구를 통해서 폭로되었기 때문이다. 호고주의 전통의 골동품 분석 기술을 덕분에 과거의 사물에 대한 체계적인 분류와 분석이 가능해졌고, 근대의 학문적인 역사학이 탄생할 수 있었던 것이다. 니체는 이러한 호고주의적 역사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과거 그 자체라고 말한다. 이들에게 있어서 중요한 것은 역사학적 진리이지 다른 것이 아니다. 때문에 현대에 봉사하려는 역사는 이들에게 있어 타락한 역사학에 불과하다. 니체는 이들이 사소한 것에 집착하며 역사적 지식의 진정한 의의를 고민하지 않는다고 비판하지만, 그들의 역사학은 무의미하지 않다. 이러한 타락한 역사학에서 비롯되는 광신적인 문화투쟁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는 이들은 바로 호고주의적 역사가들이기 때문이다. 호고주의 역사학자들은 미신과 광신의 침략에 맞서는 보루이자, 미신과 광신의 근본에 있는 역사적 신화를 파괴할 수 있는 천적이다. 니체는 호고주의자들의 정신적 독립성과 힘은 인정하는 것이다.

  니체가 연구하는 것은 역사학적 방법론이 아니다. 역사적 지식을 정당화하는 방법론적인 체계는 니체의 관심이 아니다. 니체에게 중요한 것은 역사학적 탐구의 동기가 되는 것, 즉 과거에 대한 관심의 배후에서 과거에 대한 인식을 추동하는 근거였다. 기념비적 역사와 호고주의적 역사는 정반대의 방형으로 역사적 탐구를 정당화한다. 기념비적 역사는 오직 현재를 역사를 탐구한다. 이는 현재를 위한 조직원리를 제공함으로써 거대한 사건을 가능케 하는 힘을 갖고 있다. 하지만 이들은 역사학적으로 무능하다. 이들의 신화는 거짓일 뿐만 아니라 오류투성이다. 인간의 인식은 모두 거짓이기 때문에 왜곡은 문제가 아닐 수 있다. 하지만 기념비적 역사의 문제는 그것들이 너무 취약한 근거를 자신들의 토대로 삼는다는 데 있다. 호고주의적 역사가 이들의 천적인 것은 우연이 아니다. 이들은 인간 인식이 본성적으로 오류라는 진실에는 무관심하다. 하지만 적어도 이들은 방대한 자료를 수집하고, 이러한 정보의 홍수 속에서 자신들의 진리를 쌓아나가는 힘이 있다. 호고주의적 역사학자들은 기념비적 역사학자들의 환상에 면역이다. 호고주의적 역사학자들은 기념비적 역사학자들이 자신의 근거로 내세우는 역사적 주장의 허구성을 폭로함으로써 기념비적 역사학자들을 근본에서부터 파멸시키는 힘이 있는 것이다. 기념비적 역사학이 원리적으로는 아무리 힘이 있을지라도, 호고주의적 역사학이 있는 한 기념비적 역사학은 현실적으로 소용이 없다. 호고주의적 역사학 앞에서 기념비적 역사학은 무력하기 때문이다.

  니체는 이러한 진단 속에서 진정한 역사학이 될 역사학적 비전을 제시하려 한다. 니체는 이것에 ‘비판적 역사’라고 이름 붙인다. 니체가 제안하는 비판적 역사는 기념비적 역사와 호고적 역사를 종합한 것이다. 이는 호고적인 역사학이 갖고 있는 실증성에 토대를 두면서도, 현재를 위해 봉사할 수 있는 역사학이다. 물론 이러한 종합으로서의 해결책은 무의미하다. 중요한 것은 그러한 종합 속에서 구현되어야할 결정적인 학문 규범을 제시하는 것이다. 니체에 따르면 비판적 역사학은 다음의 조건을 충족할 수 있어야한다. 호고주의 역사학의 가장 큰 문제는 호고주의적 역사학의 성취를 의미 있게 하는 원리가 부재한다는 것이다. 역사적 사실들은 그 자체로 하나의 역사를 이루지 않는다. 파편적인 사건들은 설혹 그것이 사실일지라도 무의미하다. 때문에 단순한 사실을 수집하는 것은 의미를 얻을 수 없다. 파편적인 사실들을 하나로 통일해낼 조직 원리가 필요한 것이다. 반면 기념비적 역사학에는 조직 원리는 존재한다. 문제는 이것이 사실에 근거하지 않고 있다는 것이다. 그것은 사실에 취약하다. 역사적 사실은 기대와 다를 수 있다. 그것이 아무리 힘 있는 조직 원리일지라도, 그러한 조직 원리에 반하는 역사의 사실 앞에서는 무력할 수밖에 없다. 조직 원리와 역사적 사실의 조화, 니체가 추구하는 비판적 역사의 조건은 이것만이 아니다. 니체는 다른 문제를 지적한다. 사실에 부합하는 조직 원리를 발견할 수도 있다. 훌륭한 호고주의 역사학자들이 스스로 입증했듯이 사실에 기반한 통일성 있는 역사서술을 성취해내는 것은 가능하다.

  문제는 그러한 역사서술이 하나가 아니라는 것이다. 인류의 역사를 하나로 묶을 수 있다고 공언한 역사철학은 이미 몰락했다. 인류사처럼 모든 역사를 통일하는 철학적 기반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역사에서 서술되는 대상은 하나의 세계를 이룰 수 없다. 또한 하나의 역사로 서술될 수 있는 것들을 확정하는 것도 불가능하다. 역사학에 적합한 계문강목과속종은 없는 것이다. 정당할 수 있는 역사는 분명 한정적일 것이다. 하지만 정당한 역사들 사이에서 어떤 역사가 진정으로 올바른지를 평가할 수 있는 기준은 존재하지 않는다. 진정한 역사들 사이에서 평가 기준이 없는 것은 문제적이다. 왜냐하면, 역사가 중요한 것은 역사학을 통해서만 얻어질 수 있는 역사적 지식이 현재를 이해하고, 현재를 의미 있게 조직하는 매체여서였다. 역사학은 과거를 연구함으로써 현재를 재조직하고 미래를 불러일으키는 학문인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학문에 근본적인 선택의 근거가 없다면, 역사는 다시 광신과 미신에 기초한 투쟁의 영역이 되어버린다. 그게 아니라면 다시 역사는 파편들로 조각나 버린다. 결국 원점으로 돌아오는 것이다. 비판적 역사라는 기획 또한 기념비적 역사처럼 미신적이거나 그저 파편을 쫓는 호고가적 기벽이 되어버리는 것이다. 엠덴이 진단하듯, 니체는 <반시대적 고찰>에서 정당한 역사들 사이에서의 평가를 가능케 할 비판적 규범을 제시하는데 실패한다. 하지만 니체의 실패는 끝이 아니라 시작이었다. 그는 자신이 수행할 철학을 다음과 같이 표현한다. “역사학적 철학함”

 

5. 니체의 역사학 – 자연사

  니체가 역사와 역사학을 중요시한 것은 물론 당대의 시대 분위기에 대한 인식에 기초하고 있다. 이러한 평가는 또한 단순히 현재를 만든 것이 과거라는 사실에 근거한 것이 아니라, 현재의 인식, 현재의 해석에 있어 과거가 차지하는 지위에 근거하고 있다. 하지만 이것만이 니체가 역사와 역사학을 중요시한 이유의 전부는 아니다. 니체는 <반시대적 고찰>에서 다음과 같이 묻는다. “우리는 어떻게 우리 자신을 알 수 있는 것일까?” 니체는 이러한 물음에 대한 답으로 역사를 제시한다. 이러한 니체의 답은 단순히 우리가 현실적으로 우리 자신을 역사를 통해서 구성하고 있다는 의미가 아니다. 물론 그것은 사실이며, 니체가 살던 당대에는 가장 중요한 답이었기에 의미 있을 수 있다. 하지만 니체가 역사를 답으로 내세운 것은 현실적인 유용성 때문이 아니라 원리적인 필연성 때문이었다. 현재는 과거와 미래와 고립된 채로 존재할 수 없다. 만약 그렇다면 그것은 애초에 현재일 수 없다. 그것은 시간이 아니다. 현재를 가능케 하는 것은 과거와 미래를 연결하는 현재의 활동이다. 과거와 미래를 연결하는 것은 정체성이다. 이는 실체가 아니라 활동으로서 달성되는 효과이다. 그런데 이러한 정체서는 과거를 통해 구성된다. 기억은 한 인간을 하나의 인격체로 만든다. 하지만 이러한 정체성 구성은 인격체에 국한되지 않는다.

  정체성은 범주와 범주에 대한 귀속에 기초한다. 범주에 대한 귀속을 다루는 정신 능력이 판단력이다. 범주에 대한 귀속을 결정하는 판단은 법칙으로 환원되지 않는다. 이는 논리적인 도약을 함축하며, 실천을 통해서만 그 효력을 갖는다. 하지만 판단의 문제가 정체성의 문제에는 결정적이다. 물론 유의미한 정체성 개념들을 형성하는 것 또한 중요한 문제이지만, 정체성을 현실적인 것이자 실질적인 것으로 만드는 것은 결국 판단력의 귀속을 결정하는 힘이다. 그런데 이러한 판단은 논리적으로 수행되지 않는다. 판단력은 칸트에 따르면 목적론적인 인식 속에서 발휘된다. 초월론적 철학을 통해서 파악될 수 있는 것은 세계의 총체성과 단일성, 합법칙성이다. 순수이성은 어떤 특정한 총체성, 어떤 특정한 단일성, 어떤 특정한 합법칙성을 결정해주진 않는다. 우리가 인식하는 특정한 총체성, 특정한 단일성, 특정한 합법칙성의 다면체적인 세계의 한 단면이라는 것은 보장해주지만, 그것을 실질로 만드는 것은 순수이성이 아니다. 칸트는 바로 그러한 귀속을 결정하는 판단력의 결정 원리 또한 선험적으로 포착해낼 수 있다고 주장했다. 칸트에 따르면 판단력이 귀속은 우주 전체에 대한 보편적 법칙으로부터 연역되진 않는다. 하지만 보편적 법칙에 의해 목적 없이 작동하는 우주 속에서, 유의미하게 분류해낼 수 있는 고유한 범주들이 있다. 이러한 범주들은 법칙에 의해 진행되는 과정 속에서 하나의 흐름을 형성하는 것으로서 포착된다. 비록 이러한 범주들은 보편타당한 범주는 아니지만, 특정한 원리 속에서 합목적적으로 포착될 수 있는 유의미한 범주들이다. 이러한 범주들을 포착하기 위해서는 역사 탐구가 필요하다. 이러한 범주는 합법칙적 과정을 통해서만 그 인식이 정당화될 수 있기 때문이다. 칸트의 철학에 역사는 이렇게 들어온다.

  니체는 초기부터 신비스러운 방식으로 인식된다고 주장되는 모든 철학에 대해서 비판적이었다. 설혹 어떤 철학이 그 내용에 있어서 매력적이고 의미가 있을지라도 그것이 어떻게 인식되는지를 설명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정당한 철학일 수 없다는 것이다. 그것이 직관이든, 사변이든, 관조든, 내성이든 이름은 중요치 않다. 신비한 내적인 힘은 모두 무의미하다. 니체의 신비적인 인식 능력에 대한 비판적 태도와 니체의 역사학에 대한 심도 깊은 성찰은, 니체가 칸트의 역사적 과정으로서의 판단을 주목하게 만들었다. 형식적으로 가능한 범주는 무수히 많을 수 있다. 하지만 그것들 중에서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를 하나로 종합하는 범주는 제한적이다. 이러한 제약 속에서만 어떤 것에 대한 실질을 포함한 규정은 가능하다. 또한 그러한 범주들을 발생과 변형이라는 역사적 변동 속에서 파악한다면 이는 더욱 실질적인 힘을 갖는다. 과정을 통해서만 하나의 정체성은 인식되고 옹호될 수 있다. 현재라는 단면을 가지고 선언될 수 있는 범주는 그저 형식적인 가능성에 불과하다. 결국 범주 판단의 정당성은 현재와 과거와 미래 속에서 규정하는 대상을 실질적으로 포획할 수 있는 힘에 기초하는 것이다. 니체의 “역사학적 철학” 기획은 두 기획이 수렴한 결과물이다. 하나는 역사학적 지식의 의의를 철학 속에서 근거 짓는 기획이었고, 다른 하나는 철학적인 주장을 통해 선언되는 특정한 체계의 정당성을 그의 오류주의 인식론에 기초하여 체계화하는 기획이었다. 두 기획은 그의 “역사학적 철학함”으로 수렴한다.

  니체의 “역사학적 철학함”은 문화 인류학 연구를 통해 수행된다. 당시에는 현대적인 문화 인류학은 존재하지 않았다. 또한 이를 하나로 규정할 제도적인 학제 또한 존재하지 않았다. 하지만 문화 인류학이라고 불릴 만한 조류가 당대에 형성된 것은 분명하다. 이 시기의 연구들은 인간이 가진 사고의 구조적인 형식성에 주목했다. 인간이 미신에 빠지는 경향이 있다는 것은 이미 식상한 주장이다. 형이상학적 본능, 종교적 본능은 이미 통설이 되었다. 이 시기 연구의 핵심은 그러한 미신들을 체계적인 발전이었다. 어떤 특정한 믿음이 인간의 본성에 의해 형성되었다는 것은 당연할 수밖에 없는 주장이다. 중요한 것은 어떻게 그러한 특정한 믿음을 갖게 되었는지이다. 문제는 개별적인 믿음들은 무한하다는 사실에 있다. 연구 대상이 되는 인간들의 믿음은 목록화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무한하기 때문이다. 게다가 인간들은 자신들이 정확히 어떤 믿음을 가지고 있는지 의식하지 못하며, 그러한 믿음은 언제든지 변할 수 있다. 때문에 인간의 믿음을 연구하기 위해서는 개별적인 믿음의 기원이 아니라 믿음의 구조와 체계를 연구할 필요가 있다. 이러한 문제의식 속에서 인간의 정신적 구조물이 분석되고 분류되었다. 사회구조뿐만 아니라, 정신적인 믿음 구조 또한 분류된 것이다. 애니미즘, 토테미즘과 같은 개념, 신화 유형론, 정신적 구조물로서의 법이 이 시기에 등장한 것은 우연이 아닌 것이다.

  인간의 정신 구조를 분석하는 이러한 조류는 수집과 비교, 분류만을 수행하지 않았다. 특정한 정신 구조에서 다른 정신 구조로의 이행을 연구하였고, 이러한 이행 가능성에 기초하여 정신 구조의 우열을 파악하려고 했다. 진리는 비가역적인 성격을 갖는다. 그것이 종교나 형이상학적으로 정당화되는지와 상관없이 참이라고 생각되는 믿음은 쉽게 변화하지 않는다. 아무리 나에게 이득이 되어도, 혹은 아무리 그것이 나에게 위험을 가져다올지라도, 2+2=5를 믿을 수는 없다. 때문에 믿음들의 이행과 그 사이에서의 가역성 여부는, 형이상학이나 종교를 전제하지 않고서도 판단할 수 있는 중요한 우열의 기준이 된다. 정신 구조들의 관계 또한 이러한 방식으로 파악될 수 있을 것이다. 특정한 정신 구조와 다른 구조 사이는 내적으로는 비교할 수 없다. 각 정신 구조는 총체성을 갖기 때문이다. 하지만 정신 구조가 갖는 내적인 완정성과 무관하게 정신 구조들 사이에서의 관계는 파악할 수 있고, 이를 통해 정신 구조 사이의 우열관계가 판단될 수 있다. 어떤 정신 구조에서 다른 정신 구조로 이행은 가능하지만, 그 역은 불가능하다면, 둘은 우열 관계에 놓인다는 것이다.

  정신 구조들을 형성하는 조직 원리 또한 탐구되었다. 신화는 그 내용이 공상적인 것처럼 보인다. 때문에 이는 그저 자의에 의한 것으로 여겨지곤 했다. 하지만 신화들 사이에는 공통성도 있다. 영향 관계가 있을 수 없는 독립적으로 발전한 서로 다른 신화들 속에서도 공통의 무엇이 있는 것이다. 19세기의 신화연구는 이러한 공통성을 해명하려 시도하였다. 그들은 신화가 자의적인 것이 아니라고 주장했다. 만약 그것이 순전히 자의고 무의미하다면 그것은 인식되고 기억되고 전달될 수 없을 것이다. 그것이 신비로운 지혜를 담은 것은 아닐지라도, 신화는 분명 경험을 유의미한 방식으로 체계화하고 있다. 바로 이러한 유의미한 체계성에 의해 신화가 인식 가능하고, 기억 가능하고, 그래서 전달 가능하게 된다는 것이다. 만약 이러한 유의미성이 없다면 신화들이 어떻게 그리고 왜 재생산되는지, 그리고 어떻게 그러한 재생산 속에서도 그 내용을 보존하는지는 설명될 수도 이해될 수도 없게 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신화와 같은 정신 구조는 임의적으로 형성되는 것이 아니라 내적인 조직 원리를 통해 형성된다고 생각해야만 한다는 것이다.

  니체는 이러한 문화 인류학적인 연구들의 핵심적인 문제의식과 이러한 연구 활동을 가능케 하는 통찰들에 주목하여 자신의 도덕 연구를 제시하려고 하였다. 그는 이러한 도덕 연구를 “자연사”로 명명한다. 자연사는 무에서의 창조를 거부한다. 자연의 산물들을 그 자체로는 특별한 의미가 없는 반복적인 작용들이 만들어내는 결과물로 이해하는 것이 자연사이다. 때문에 자연사적으로 자연은 도약하지 않는다. 그것은 사실이라기보다는 자연을 이해가능하게 만드는 전제이다. 니체는 도덕이라는 정신적 구조물들의 유형과 그 사이에서의 변형을 탐구하려고 하였다. 이는 역사철학처럼 인류사를 하나의 목적 안에서 놓지 않고서도 연구 가능하다. 이는 자연물처럼, 형태와 형태들의 활동에 의해 형성되는 구조와 기능 복합체들을 연구하는 것에 불과하다. 때문에 목적으로서의 일관성이 없을지라도 그것들의 형태, 구조, 기능들의 관계들이 가진 규칙성만으로도 탐구될 수 있다. 이를 수행하는 것이 도덕의 자연사이다. 물론 인간을 “자연사”적인 관점에서 탐구하는 것은 새로운 것이 아니다. 이는 뷔퐁, 루소, 흄 또한 수행하였다. 니체의 방법은 당대의 문화 인류학적인 성과에 기초하여 형태, 구조, 기능을 구체적인 맥락으로 국한시켜 그들 사이의 관계를 연구했다는 것이 이전 시대의 자연사적 인간 연구와 차별성을 부여하지만, 이러한 시도 자체는 니체의 고유한 기획이 아니다. 베젯과 루의 연구가 바로 이러한 것이기 때문이다.

  니체의 자연사로부터 계보학의 이행을 다루기 전에 니체의 자연사 연구가 그의 역사학적 철학함에서 어떤 의의가 있는지 살펴볼 필요가 있다. 니체의 비판적 역사학 기획에서 역사 연구의 의의는 모호하며 문제적이라고 엠덴은 평가했다. 하지만 이러한 모호성 속에서 가능한 이상이 있다. 니체의 중기 철학의 중심에는 자유정신이 있다. 이러한 자유정신은 사회로부터의 이탈을 의미하지 않는다. 니체가 개인주의를 주창한 것이든 아니든, 니체가 주장한 독립성은 사회에 대한 무시가 아니었다. 니체의 자유정신의 중요한 면모는 미신과 광신에 대한 열광적인 분위기가 끼치는 영향으로부터 자유로운 것이다. 앞서 분석되었듯이 이는 호고주의적 역사학자의 특징이다. 호고주의적 역사학자들이 그러한 영향으로부터 자유로운 것은 그들이 역사학적 진리를 쫓는 덕분이다. 이처럼 진리 추구는 외부적인 영향으로부터 독립성을 가능케 한다. 프랑코가 설득력 있게 보였듯이, 니체의 중기 자유정신은 진리 추구로부터 비롯되는 독립성을 통해서 달성되는 것이다. 이 시기 니체의 핵심 과제는 진리를 향한 의지와 일관적일 수 있는 하나의 통일체적인 학문을 조직하는 일이었다. 프랑코가 지적한 것처럼 이는 일시적이지 않고, 중기를 관통하는 핵심적인 테마이다. 진리를 향한 의지와 하나의 통일체로 조직하기를 뜻할 “Einverleibung”은 중요한 개념이다. 니체는 해당 기획을 성취하는 것이 <즐거운 학문>의 목적이며, <인간적인>, <아침놀>은 이를 위한 것이라고 술회한다. 엠덴이 진단한 것처럼 니체가 비판적 역사를 통해 결정적인 답을 찾지 못한 것이 사실일지라도, 니체는 하나의 선택을 한 것이다. 적어도 진리를 향한 의지를 포기해서는 안 된다. 그것은 인간 정신의 독립성을 가능케 하는 원동력이며, 자유정신의 전제이기 때문이다.

  니체의 자유정신, 그리고 중기의 아포리즘적인 서술을 고려해볼 때, 니체의 자연사 연구는 철학적 의의를 갖는다. 니체는 완결된 답을 제시하기보다는 진리를 향한 의지에 위배되지 않는 학문 탐구의 가능성을 보이려했다. 그는 그러한 가능성 자체를 이론적으로 증명하기보다는, 바로 그 가능성을 자신의 작업이라는 본보기를 통해 제시하려고 하였다. 니체의 아포리즘은 단순한 파편이 아니다. 니체 본인이 말했듯이 이는 체계이다. 그러나 이 체계는 직접적으로 가시화되지 않는다. 이는 니체가 권유하듯 “문헌학적인 느린 독서”를 통해서만 발견될 수 있다. 문헌학적인 느린 독서는 특정한 능력을 요구한다. 이 능력은 니체가 호고주의적 역사 탐구에서 발견한 능력이다. 파편들이 만들어내는 미로를 헤매면서도, 단기적으로 얻어질 수 있는 가시적인 성과가 없음에도 진리를 추구하는 호고주의적 역사학의 미덕을 문헌학적인 느린 독서로 표현하고 있는 것이다. 니체가 말하듯 현대는 단기적이며 가시적인 환상에 의해 요동친다. 이러한 시대적 분위기가 끼치는 영향으로부터 자유롭기 위해서는 호고주의적 역사학자들이 가진 미덕을 길러야한다. 하지만 그러한 미덕을 기르기 위해 모두가 호고주의적 역사학을 연구할 수는 없고, 그럴 필요도 없다. 니체는 자신의 아포리즘을 통해서 그러한 미덕을 기를 수 있는 훈련현장을 제공하려 한 것이다. 니체가 제공한 훈련현장 속에서 독자들은 호고주의적 역사학자들의 미덕을, 호고주의적 역사가 아닌 비판적 역사를 위해 길러낼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니체의 도덕의 자연사는 바로 이러한 훈련현장의 일부이다. 니체는 폭로, 파괴, 대안이 아니라 그러한 활동을 가능케 하는 덕을 가르치려고 한 것이다.

 

6. 자연사에서 계보학으로

  니체의 도덕의 자연사 도덕의 계보학의 차이는 아직까지 주목받고 있지 못하다. 라이터는 이를 구별하고 니체의 진정한 도덕 철학은 계보학에서만 드러난다고 주장하지만, 도덕 철학의 유무를 가릴 그 차이를 규명하진 않았다. 라이터를 제외한 연구자들은 라이터에 반대하며 중기의 자연사와 후기의 계보학이 연속성에 더 주목을 한다. 이러한 연속성 강조는 니체의 도덕 철학을 자연사든 계보학이든, 자연화된 도덕 철학으로 이해하게 만든다. 하지만 니체의 자연사 서술과 계보학 서술은 단순히 이름만 다른 것이 아니다. 자연사와 계보학의 차이는 해당 작업의 의의를 산출하는 근거에서부터 비롯된다. 이러한 차이를 밝히기 위해서 계보학이라는 장르의 특징을 먼저 밝히고, 니체의 계보학 작업이 가진 독특성이 무엇인지를 규명하도록 하겠다. 규명된 니체의 독특성에 기반하여 니체가 계보학 작업을 통해서 수행하려 한 철학적 기획을 규명하도록 하겠다.

  니체의 계보학에 대한 연구에서 계보학 장르의 중요성은 아직까지 강조된 적이 없다. 대부분의 경우 족보 편찬으로, 혹은 족보 편찬이라는 유비로 도덕의 본성을 탐구하려고 했다는 일반적인 서술에 그친다. 키스 안셀-피어슨의 경우 니체의 계보학이 전통적인 족보 편찬과 형식적으로나 내용적으로 다르다는 것을 지적하며, 니체의 계보학은 생물학의 계통분류학에 속한다고 주장하였다. 하지만 당대 계통분류학에서 계보학이라는 용어는 사용하지 않았기에 니체의 계보학이 계통분류학에 속한다는 주장은 설득력이 없다. 또한 니체의 생물학 연구에 기반한 유형적 역사학 서술에 큰 영향을 끼친 이폴리트 텐은 계통분류학의 언어에 기초한 유비로 자신의 역사연구를 수행한 바 있다. 따라서 계통분류학으로 이를 작업하는 것은 가능하며, 니체가 참고할 수 있으며 실제로 참고한 모범 또한 주어진 상황이었다. 그렇기에 니체가 자신의 작업을 “계보학”으로 표명한 것은 설명이 필요한 현상이다.

  족보편찬은 단순히 족보를 편찬하는 것에 그치지 않는다. 현재와 과거를 새롭게 연결하고 새롭게 재구성하는 일이라고 할 수 있다. 다음과 같은 사례를 생각해보자.

 

한 근대 국가가 한 섬을 식민지로 삼았다. 그들은 식민지의 원주민들이 자신들의 권리와 의무를 혈연관계 속에서 이해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들의 권리와 의무는 혈연 집단 속에서, 그리고 혈연 집단 사이의 관계 속에서 규정되었다. 식민지 정부가 이들을 지배하기 위해서는 그들의 소유권을 파악할 필요가 있었다. 때문에 그들은 관료들을 파견해 그들의 족보를 문서화하였다. 오랜 시간에 걸쳐 이러한 방대한 족보 편찬 작업이 진행되었고, 방대하고 체계적인 현대적인 문서 체계를 가진 족보가 완성되었다. 식민지 정부는 이 족보와 이에 따른 권리와 의무 관계에 따라 원주민들을 통치하기 시작하였다. 그런데 얼마 지나지 않아 여러 곳에서 불만이 제기되었다. 식민지 정부에서 공들여 편찬한 족보가 틀렸다는 것이었다. 식민지 정부는 처음에는 이들이 거짓말을 한다고 생각했다. 식민지 정부는 그들이 스스로 진술한 내역을 보여주며 그들이 이렇게 말한 게 분명하다고 지적했다. 그들은 그것이 맞긴 하지만 지금은 아니라고 주장했다. 이러한 불만들이 여러 곳에서 발생하자 식민지 정부는 무엇인가가 잘못되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들은 인류학자를 고용해서 문제의 근원을 조사하라고 지시했다. 인류학자들은 원주민들을 조사하며 새로운 것을 알게 되었다. 원주민들의 족보는 사실로서 고정된 것이 아니라 현재의 실천에 의해 변형된다는 것이었다. 그들은 자신들을 조상들의 관계 속에서 이해한다. 하지만 그들이 어떠한 선택을 함으로써 조상들의 관계는 바뀔 수 있다. 자신이 현재 지지하는 부족에서 이탈하여 적대적인 부족으로 전향할 경우, 그들의 소속은 바뀔 것이다. 이는 현재 일어난 사건이지만, 단순히 현재에 국한되지 않는 결과를 낳는다. 그들의 새로운 부족으로의 편입은 그들의 조상을 다른 부족에 편입한 가문의 조상으로 만든다. 때문에 그들의 현재적 선택은 조상들의 관계에도 영향을 끼친다. 전쟁에서의 승리에 따라 승리자의 조상이 되기도, 배신자의 조상이 되기도, 영웅의 조상이 되기도 하는 것이다. 이러한 역사적으로 유의미한 실천에 의해 발생하는 소급적인 인과 작용이 그들 사이에서는 인정되었고, 이에 따라 족보는 계속 바뀌고 있었던 것이다. 때문에 그들의 족보는 문자로 고정될 수 없는 것이었다. 현재의 실천에 의해 끊임없이 새롭게 되기 때문이다.

 

혈연관계는 단순한 자연적 사실이 아니다. 분명 자연적 사실에 기초하지만, 이에 대한 해석은 달라진다. 모계사회에서나 부계사회에서나 남자와 여자가 아이를 만드는 것은 같지만, 그들 사이에서 아이의 혈연적 지위는 달라진다. 누가 생물학적인 아버지인지를 알면서도, 그의 진정한 아버지는 토템으로, 외삼촌으로, 지역의 영향력 있는 인물로 여겨질 수 있다. 공동체에서 사회적 재생산이 중요하고 이것이 모든 사회에 기초일 수 있겠지만, 더욱 중요한 것은 이에 대한 해석이다. 때문에 족보를 편찬한다는 것은 바로 이러한 해석을 제시하는 것이며, 그것은 개인적인 것이 아니라, 역사적, 사회적, 문화적, 정치적 실천일 수 있다.

  이런 족보 편찬에 기초한 과거와 현재를 재구성하는 실천은 특정 부족에 국한되지 않는다. 서양 사회에서도 발견된다. 문장학이 대표적인 사례이다. 가문의 문장을 제작하는 것은 단순히 이미 주어진 사실을 반영하는 것이 아니라, 가문의 성격, 지위, 의미에 대한 해석이었고, 이를 공개적으로 표현하는 것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이러한 표현만으로도 정치적, 사회적, 종교적 스캔들로 이어졌던 것이다. 이러한 족보편찬 및 문장학은 계몽과 함께 몰락한다. 그것은 새로운 역사학, 세속적 역사학, 추측적 역사학,(문명사) 그리고 종교에 대한 자연사로 대체될 과거의 미신으로 여겨졌다. 니체는 바로 이렇게 미신으로 규정된 구시대의 장르를 가장 현대적인 역사서술 장르로 부활시키려고 한 것이다. 하지만 어떤 것의 귀환은 단순히 과거의 반복일 수 없는 법이다. 니체의 계보학은 과거의 족보 편찬으로서의 계보학의 반복이 아니다. 이는 생물학에 기초를 두고 있다.

  생물학에서 계보학이 본격적으로 등장하는 것은 1900년이다. 하지만 그 존재가 선언되기 전에도 그것을 태동시킬 기원은 존재하는 법이다. 심지어 현대적 계보학 조류가 니체와 친분이 두터웠고, 그의 생물학적 사유에 큰 영향을 준 빌헬름 루의 연구에 기초한 흐름이기에 이러한 역사적 연관성을 무시하긴 더욱 어렵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계보학이란 표현으로 새로운 학문 영역을 선언할 수 있었던 것은 1900년이기에, 니체의 계보학과 딱 맞는 생물학 조류의 계보학을 찾는 것은 무의미하다. 또한 니체의 계보학은 생물학적인 계보학이 아니다. 이는 도덕의 계보학이며, 생물학의 유전으로는 설명될 수 없는 정신의 영역을 다룬다. 하지만 현대의 생물학적인 계보학을 통해 니체 계보학의 특징에 대한 단서는 얻을 수 있다. 계보학이 계통분류학이 아니며, 그것과는 완전히 다른 작업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기 때문이다. 계통분류학은 과거를 밝힘으로써 분류를 확정하는 학문이다. 계통분류학이 종에 대한 본질주의를 거부하는 학문이며, 종들의 변동가능성에 기초하여 탐구를 진행하는 학문이지만, 그것은 종들의 변동 속에서 포착되는 안정성을 추구하는 학문인 것이다. 반면 계보학은 안정성을 추구하지 않는다. 계보학은 변동가능성을 포착하여 현재의 고착화된 안정성을 변동가능하게 만드는 학문이었다. 그것은 일종의 우생학이었다.

  19세기는 역사의 시대일 뿐만 아니라 진화의 시대이기도 하다. 그리고 19세기 진화 담론의 중심에는 유전이 자리잡고 있었다. 전근대에 유전은 예외적인 현상으로 인식되었다. 인간이 인간을 낳는 것은 인간이라는 형상의 힘이지 개체 속의 무엇인가에 의한 것이 아니었다. 때문에 유전은 특정한 가문에서 대물림 되는 유전병과 같은 저주를 가리키는 데 국한되었다. 그것은 자연적인 것이라기보다는 초자연적인 것에 해당되었다. 가문의 유산이나, 가문에 내려진 축복과 저주처럼 자연 이상의 것이 유전의 객체였다. 하지만 근대에 이르러 아리스토텔레스의 형상 개념은 몰락한다. 데카르트의 기계론이 이를 대체하게 된다. 기계론에 따라 인간이 인간을 낳는 것은 형상이라는 영적인 실체가 아니라 신체의 내적 메커니즘으로 설명되어야만 한다. 이러한 새로운 설명 방식에 따라 유전에 대해서도 새로운 인식이 필요해졌다. 예외적인 현상이었던 유전이 일반적인 현상으로 인식되고, 이에 따른 일반 이론이 제시될 필요성이 생긴 것이다.

  세계에 대한 탐험이 진행되면서, 다양한 민족들에 대한 인식도 증대되었다. 다양한 민족들이 발견되면서 이들을 이해할 필요가 생겼다. 그들도 분명 인간이다. 그런데 어떻게 이토록 다양한 민족들이 존재할 수 있는 것인가? 이를 설명하기 위해 가계race라는 개념이 등장했다. 가계는 인류의 특정한 집단이 내적인/잠재적인 적응력을 발휘하며 특정한 환경에 적응함으로써 그들의 고유성을 구축하는 것을 가리키는 용어였다. 특정한 인간들이 그들의 내적인 힘을 통해서 특정한 표현형을 획득한다; 이러한 과정은 여러 세대를 걸쳐서 이루어진다; 이러한 과정 속에서 얻어지는 특정한 표현형은 이러한 세대 속에서의 과정을 통해 얻어진 인간 잠재력의 성과이다; 그것은 생존을 가능케 할 뿐만 아니라 그들의 고유함을 표현한다; 때문에 그러한 민족적 차이야말로 민족의 고유성의 원천이며, 각각의 민족이 갖는 고유한 가치의 원천이다. 가계 개념을 통해 다양한 민족의 존재뿐만 아니라 그 의미 또한 설명된 것이다.

  민족의 특성character은 그렇기에 중요하다. 그것은 민족의 가치를 담보한다. 그런데 이것이 위기를 겪는다. 어떤 민족들은 유럽인과의 접촉만으로도 그들의 특성을 잃어버린다. 그들은 접촉과 함께 사라져버리는 것이다. 민족의 특성은 중요함에도 사라질 수 있다. 민족적 특성의 상실은 몇몇 원시부족의 문제일 뿐만 아니라 현대의 문제이기도 하다. 19세기 유럽은 특성의 상실을 유발하고 있는 것처럼 보였기 때문이다. 민족적 특성의 상실을 유전적으로 표현하는 개념이 퇴행regression이다. 부모만한 자식은 없다. 탁월한 재능은 확률적으로 낮을 수밖에 없다. 때문에 재능 많은 부모의 자식은 부모보다 재능이 낮을 가능성이 높다. 이것이 통계적 회귀regression 현상이다. 19세기의 생물학자들도 이러한 현상을 포착하였다. 문제는 그들이 학문적인 유전 개념을 갖고 있지 못했다는 것이다. 퇴행은 심각한 현상이다. 민족적 특성의 고유성을 훼손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문제를 유발하는 인식, 이 문제를 해결할 수 있게 할 인식은 부재한다. 인식의 부재는 그렇기에 공포를 낳는다.

  당대의 유전 이론에서도, 특정 개체에 유전적인 영향을 끼칠 수 있는 조상은 부모와 조부로 한정되지 않았다. 세대가 올라감에 따라 기하급수적으로 증가하는 조상 모두가 자신에게 영향을 끼칠 수 있다. 유전 메커니즘에 대한 인식의 부재는 이러한 잠재적 가능성들을 공포로 만들었다. 이름도 모를 조상에 의해 유발되는 파괴적인 유전 작용이 자신을 파멸시킬 수 있기 때문이다. 계보를 거슬러 올라가는 것이 언제나 하나의 공통 조상으로 수렴되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발산할 수 있다. 이 때 기하급수적으로 증식하는 조상들 하나하나가 현재의 자신을 파멸로 몰아넣기 위해 아귀다툼을 벌이고 있음에도 이를 알 수 없다는 것은 공포 그 자체일 수밖에 없었다. 생물학적인 계보학은 바로 이러한 공포를 극복하려는 시도였다. 생물학적인 계보학은 과거를 포획하고, 그것들이 끼칠 영향을 통제함으로써 현재를 변화시키려 하였다. 과거를 알고 과거의 영향을 통제하면 현재와 미래를 바꿀 수 있다는 것이다.

  니체의 계보학이 생물학적인 은유에 기반하고 있다. 그리고 니체의 계보학 방법론은 생물학적 계보학의 선구자인 빌헬름 루와의 상호작용 속에서 구체화되었다. 하지만 니체의 작업은 앞서 내가 보였듯 자연주의로 설명될 수 없다. 니체가 계보학에서 탐구하고, 인식하며, 통제하고, 지배함으로써 극복하려는 유전은 생물학적인 것이 아니라 정신적인 것이기 때문이다. 니체의 자연은, 자연 속에서 자연에 반하면서 자연을 극복하며 등장하는 제2의 자연, 즉 정신이기 때문이다. 정신적 유전은 생물학적인 유전과 다르게 상상에 기반한다. 직접적인 혈연관계가 부재할지라도 정신적인 유전은 가능하다. 정신적 유전에서 중요한 것은 생물학에서와 같은 물리적인 관계의 유무가 아니라, 자기 자신에 대한 정체성 인식이다. 그런데 이러한 정체성 인식이 탐구가 될 수 있기 위해서는 생물학적인 유전에서와 같은 유전의 단위체가 필요하다. 생물학적 계보학에서는 조상이 그러한 단위체였다. 때문에 정신적 계보학이 가능하기 위해서는 유전의 내용을 차지하는 단위체가 필요하다. 니체의 계보학에서 이러한 단위체는 이념적인 인물 유형이다.

  이전의 자연사 서술에서는 발견되지 않지만 계보학에서 발견되는 특징은 초역사적인 인물유형이 등장이다. 귀족과 노예라는 니체의 유형은 역사적 사실로 인식될 수 없는 범주이다. 니체는 역사적인, 법적인, 제도적인, 사회적인, 정치적인 분류로 귀족과 노예를 사용하고 있지 않다. 니체는 역사적으로, 법적으로, 제도적으로, 사회적으로, 정치적으로 귀족인 인물에게도 그가 노예 도덕을 따른다면 노예로 귀속시켜버린다. 이러한 니체의 초역사적인 범주는 그의 가치평가의 근거이기도 하다. 니체는 초역사적인 범주를 통해 정신적인 유전 관계를 규정한다. 이러한 규정은 단순히 분류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비난과 찬양을 위한 것이기도 하다. 노예적인 정신 유형은 거부되어야만 하고, 귀족적인 정신 유형은 따라야만 한다.

  귀족과 노예 인물유형은 유형 자체에 대한 평가만을 함축하지 않는다. 니체는 그가 이전에 자연사적 도덕 탐구에서 제안한 것과 같은 가치 재평가 연구, 맥락 속에서의 형태, 구조, 기능의 가치를 평가하는 탐구적 절제를 지키지 않는다. 자연사 서술에서도 계보학 서술에서처럼 도덕 감정이나 양심은 양가적이다. 자연사에서 그러한 양가성은 바로 그러한 형태, 구조, 기능의 변천으로 설명된다. 맥락이 달라지면 의미가 바뀐다. 하지만 맥락의 변경에도 형태나 구조는 잔존할 수밖에 없다. 때문에 이러한 변화의 불일치가 자연사에서는 양가성의 원천이 된다. 계보학 또한 겉보기에는 이러한 변화의 불일치로 양가성을 설명하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계보학에서 가치의 차이는 양가적이지 않다. 양심은 양가적인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니체의 도덕의 계보학에서 양심은 양가적이지 않다. 양심의 가치 차이가 양심이라는 특정한 자아 조직원리의 맥락이 차이에서 비롯되는 것이 아니라, 귀족 유형과 노예 유형의 가치 격차에서 비롯되기 때문이다. 귀족의 손에서 양심은 가치가 있다. 노예의 손에서 양심은 가치가 없다. 양심이 양가적이라는 것은 니체 계보학의 탐구의 주제가 아니다. 귀족의 손에서는 모든 것이 가치를 얻는 반면, 노예의 손에서는 모든 것이 가치를 잃는다. 중요한 것은 초역사적인, 그리고 가치평가의 기준이 되는 이념적인 인물유형이다. 인물유형에 의해 가치 유무가 결정되기 때문에 양가성은 의미가 없다. 모든 것은 명백하다. 문제는 이것이 어떻게 가능한가이다.

  계보학을 분석하는 대부분의 학자들은 계보학에서 서술되는 역사가 참된 것이라고 전제하고 이를 분석한다. 대부분의 연구자들은 계보학에서 서술되는 역사서술 내용의 인식론적 지위에 대해 고민하지 않는다. 하지만 이는 납득하기 어려운 전제이다. 본 논문에서 제시되었듯이, 니체는 역사와 역사학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있었으며, 역사학이 가진 진리 추구의 역량 또한 중요시했다. 계보학에서의 제시되는 니체의 역사 서술은 그 자체로 터무니없을 뿐만 아니라, 그의 비판적 역사라는 기획에서 고려할 때 터무니없는 것처럼 보인다. 때문에 니체의 계보학은 별도의 설명이 없다면 그 자신의 기획에 대한 배신일 뿐만 아니라 퇴보일 수밖에 없다. 니체 철학의 중기와 후기의 관계를 다룬 선구적인 연구자 아베는 이러한 현상을 퇴보로 규정했다. 중기 철학에서 추구했던 지적 이상에 도달할 수 없다는 절망 때문에 니체는 자기만의 세계에 빠져 무의미한 궤변을 일삼게 되었다는 것이다. 하지만 아베의 해석은 문제적이다. 프랑코가 설득력 있게 제시한 것처럼 니체를 후기 철학으로 인도한 것은 그의 자유정신 자체였다. 진리를 향한 의지, 이러한 의지와 통일체를 조직해낼 수 있는 학문, 자유정신을 통일하기 위해 후기 철학이 요청되었다는 것이다. 프랑코의 해석은 부정할 수 없다. 이는 니체 본인의 주장이기 때문이다. 1886년 무렵 서술된 니체의 중기 저작들에 대한 재판 서문과 니체의 자전적인 저작인 <에케 호모>, 그리고 후기의 편지들에서 니체는 자신이 자유정신을 위해 이전에 그가 추구했던 이상을 버리고 새로운 이상을 추구하게 되었다고 진술한다. 때문에 니체가 계보학에서 선보이고 있는 기이한 서술의 배후에도 철학적인 근거가 있어야 한다.

  계보학의 역사서술이 가진 인식론적인 지위를 다룬 소수의 학자들의 해석 전략은 다음과 같이 분류할 수 있다. 하나는 오류주의적 설명이다. 니체는 진리를 부정하며, 해석과 무관한 그 자체로의 사실을 부정한다. 그러니 니체의 역사서술이 실증적이지 않고, 괴이해도 문제가 없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는 받아들여지기 어려운 설명이다. 니체는 해석과 무관한 그 자체로의 사실을 부정했지만, 해석이 사실과 무관하게 정당화된다고 주장한 적이 없다. 니체는 단지 그 자체로서의 사실에 근거한 객관적인 역사서술을 비판했을 뿐이다. 니체는 역사를 신화로 대체하는 기념비적인 역사서술에 공격적이었고, 그것이 한계적이고 역사적 지식의 의의를 무시할지라도 호고주의적 역사서술의 학문적 의의에 대해서는 인정하였다. 게다가 이론적인 문제가 있다. 설혹 니체가 오류주의가 진리 이론을 받아들이고 있을지라도, 니체가 아무것이나 주장해도 된다고 주장하지 않았다. 니체는 자신의 관점을 더욱 진실한 것으로 정당화하고 있다. 때문에 아무렇게나 말해도 된다는 식의 오류주의에 기반하여 니체의 역사서술을 옹호하는 것은 설득력이 없을 뿐만 아니라, 아무런 설명적 가치를 갖고 있지 않다.

  다른 설명은 니체의 역사서술이 가설적인 성격을 가지고 있다고 해석하는 것이다. 니체의 역사서술은 실증적이라기보다는 가설적이라는 주장은 설득력이 있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니체가 왜 가설적인 역사를 서술하는지를 이해하는 일이다. 게다가 니체가 가설적 역사를 주장하는 것은 이상한 점이 있다. 니체가 계보학에서 적으로 삼는 영국적 역사가 가설적인 역사학이기 때문이다. 추측적 역사는 증거가 미비하거나 증거가 없는 과거, 혹은 그 어떤 증거로 논해질 수 없는 역사적 과정을 이론적인 논증가능성에 기반하여 추측하는 탐구 방식이다. 니체가 가설을 차용하는 것은 사실일지라도, 니체가 왜 그가 비판하는 역사 전통의 방법을 따르려는지는 이해될 필요가 있다. 게다가 문제가 되는 것은 그가 가설을 사용하면서도, 그것을 합리적으로 제시하려고 노력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니체는 당대의 추측적 역사학 서적을 심도 깊게 읽었고, 해당 서술들을 차용하여 자신의 역사서술의 세부사항을 제시하였다. 그런데 당대의 추측적 역사학은 니체의 계보학과 달리 어처구니없는 상상적 서술이 아니었다. 가능한 증거를 수집하고 엄격한 방법론에 입각하여 추론하며 자신의 가설의 신빙성을 정당화하는 기교를 발휘한다. 때문에 가설적 역사라고 할지라도 니체의 서술이 역사학적 서술이라고 보기에는 문제적이다. 당대의 연구물과 비교해보았을 때, 어처구니없게 공상적인 것은 마찬가지이기 때문이다.

  이 문제를 진지하게 의식한 것은 라이터와 젠슨이다. 그들은 이를 관점주의적으로 설명한다. 진리는 관점 의존적이다. 어떤 서술이 더 진실하다는 것은 그 자체로 보편적인 주장이 아니라 관점들 사이에서의 비교에 근거한 주장이다. 즉 어떤 관점이 다른 관점보다 우월하기 때문에 더 진실한 것이다. 때문에 젠슨과 라이터는 설혹 계보학의 역사서술이 기이하고 설득력이 없어도, 이러한 기이함과 설득력의 부재의 이유가 될 실증적 증거의 부재는 문제가 없다고 주장한다. 실증적 증거가 아니라 관점의 우월성으로 진실성이 옹호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러한 해석도 문제가 있다. 실증적 증거가 없다는 문제를 차치하고도 니체의 주장은 기이해보이기 때문이다. 설혹 라이터나 젠슨이 정교하게 다룬 것처럼 철학적으로 해당 관점이 우월할지라도, 그것이 왜 역사학적인 우월성인지, 왜 계보학이 더 진실된 역사인지를 설명할 필요가 있다.

  니체는 계보학의 독자를 “우리 인식하는 자들”로 호명한다. “우리 인식하는 자들”은 사소한 표현이 아니다. “인식하는 자들”이란 표현은 니체가 중기에 진리를 향한 의지를 추구하는 자유정신의 소유자들을 가리키는 말이었기 때문이다. 더욱 중요한 것은 니체가 자신을 인식하는 자들에 귀속시키고 있다는 사실이다. 니체는 독자들에게 자신 또한 인식하는 자들이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니체는 자신을 그들과 동류로 소개하면서도, 자신이 그들과 달라졌다고 말한다. 니체는 자신 또한 인식하는 자들의 구성원이었고, 그들과 함께 같은 이상을 꿈꾸었지만, 그것이 병이라는 것을 깨달았고, 그로부터 회복하였다고 말한다. 니체는 자신을 인식하는 자들의 일원이자 그로부터 이탈한 인물로서, 즉 현재 외부인임에도 불구하고, 내부인의 관점에서 소개하고 있다. 니체는 내부인의 관점에서, 내부인의 이탈을 설득하려고 시도하고 있는 것이다. 니체의 이러한 설득 전략은 금욕적 이상을 다루는 3권에서 절정에 이른다. 프랑코가 지적한 것처럼 금욕적 이상은 니체 자신의 이상이었다. 때문에 금욕적 이상에 대한 비판은 일종의 자기비판인 것이다. 중요한 것은 비판의 근거이다.

  후기 니체의 자기비판의 핵심은 다음과 같다. 진리를 향한 의지를 자신의 의지로 삼았음에도, 진리를 향한 의지를 진리를 향한 의지로 탐구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진리 추구를 이상으로 삼는 그 동기를 알려고 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니체는 자신의 진리를 향한 의지, 그리고 진리를 향한 의지를 수행하기 위해 철저하게 추구했던 금욕적 이상의 가치에 의문을 갖게 되었다. 하지만 이러한 의문이 진리를 향한 의지가 무의미하다는 것을 뜻하지 않는다. 니체는 그 누구보다 진리를 향한 의지에 가치를 느꼈으며, 그가 진단하기로 이는 시대적 흐름이며, 현대 사회가 가진 힘의 원천이자 위대한 성취의 원천이다. 때문에 의심이 그 유용성을 부정하는 것을 의미하진 않는다. 니체는 애초부터 금욕적 이상을 추구한 것은 아니었다. 비판적 역사를 수행하기 위한, 자유정신을 가능케 하는 바탕으로 진리를 향한 의지를 받아들인 것이었다. 하지만 진리를 향한 의지를 받아들이면서 그는 금욕적 이상을 따르게 되어버렸다. 말이 되지 않는 것을 말하지 않는 절제가 그의 미덕이 되어버렸기 때문이다. 진리를 향한 의지가 다른 의지들을 복속시켜 지배적인 의지로 군림하게 된 것이다. 물론 이것 자체는 문제가 아닐 수 있다. 니체가 중요시한 것은 통일성 획득이었다. 때문에 진리를 향한 의지가 가진 힘을 통해 하나의 통일체를 이룩해내는 것은 그의 기획일 수 있다. 그렇기에 니체는 금욕적 이상을 자기의식적으로 받아들였던 것이다.

  니체가 의문을 제기하게 된 것은 금욕적 이상에 대한 상대화에서 비롯되었다. 진리를 향한 의지가 다른 모든 의지를 복속시키고 지배하는 절대적인 의지일 이유는 없다는 것이다. 진리를 향한 의지도 결국 다른 의지들 중 하나일 뿐이다. 진리를 향한 의지를 자신의 의지로 삼는 것이 반드시 그것을 지배적인 의지로 삼는 것을 의미할 이유는 없다. 진리를 향한 의지를 다른 의지에 복속시키는 것이, 그것을 부정하고 탄압하는 것을 의미할 이유는 없다. 니체 본인이 주장한 것처럼 탁월한 조직 원리는 부정과 탄압이 아니다. 각 부분들의 고유성을 보존하고, 각 부분들의 고유성에서 비롯되는 긴장을 유지하면서도 통일체를 이룩하는 것, 그것이 탁월한 조직화의 힘이다. 따라서 진리를 향한 의지를 보존하면서도 이를 지배적인 원리로 받아들일 이유는 없는 것이다. 

  콘웨이가 설득력 있게 분석한 것처럼 도덕의 계보학 3권의 초반부에서 니체는 금욕적 이상을 상대화하여 서술한다. 금욕적 이상은 유용한 기술이다. 자신을 통제함으로써, 힘을 집중시키고, 힘을 증대하는 기술이기 때문이다. 인간의 모든 성취는 오직 금욕적 이상이라는 기술을 토대로만 획득될 수 있다. 하지만 금욕적 이상이 노예의 손에 들어가면서 문제가 생겼다. 니체는 노예 유형을 삶에 대한 부정과 연결한다. 정확히 말하자면 현재의 삶에 대한 긍정 여부로 유형화한다. 노예 유형도 사실로서는 삶을 긍정한다. 정신적으로는 삶에 대한 부정하지만 이것이 삶의 부정이라는 사실을 의미하지 않는다. 니체는 이것이 모순이 아니라고 역설한다. 그들은 그들의 정신적 부정을 통해서 삶을 지속하기 때문이다. 그들은 생존을 위해서 정신적으로 삶을 부정해야하는 존재일 뿐이다. 이는 기능적인 모순을 낳지 않는다. 이는 체계적으로 작동한다. 그렇기에 노예가 정신의 역사를 제패한 승리자들인 것이다. 노예 유형의 승리는 금욕적 이상을 통해서만 설명될 수 있다. 금욕적 이상으로부터 얻어질 수 있는 힘의 집중과 증대를, 철저히 하나로, 삶의 부정으로 집중하였기 때문에 그것은 강력한 것이다. 노예의 정신은 삶을 부정이라는 하나의 점으로 모든 힘을 집중시키고 폭발시킨다. 그렇기에 그들은 강한 것이다.

  니체의 노예적 금욕적 이상 비판은 그들의 힘에 대한 비판이 아니다. 그것들은 강력하다. 하지만 니체는 그것들의 무능을 지적하며 대안의 가능성을 주장한다. 금욕적 이상은 두 가지의 문제를 갖고 있다. 그것은 있는 그대로의 현재를 긍정하지 못하게 한다. 금욕 또한 의지이며, 모든 의지는 어떤 의미에서든 목적을 갖는다. 그런데 금욕적 이상의 목적은 언제나 현재에 대한 부정에 기초하고 있다. 때문에 그것은 모든 것을 포괄하고 있지 못하다. 그것은 현재, 그리고 있는 그대로의 과거를 긍정하지 못하게 한다. 다른 하나는 노예적 금욕적 이상의 자기인식 불가능성이다. 노예적 금욕적 이상은 지배하는 힘을 가지고 있다. 그런데 바로 이 이상의 진정한 화신인 우리 인식하는 자들은 그 누구도 지배하지 않으려고 한다. 그들은 다른 이들에게 부당한 지배를 가하지 않는다. 그들은 중립을 지킨다. 그들은 다른 이들에게 부당한 지배를 가하지 않고, 중립을 지키기 위해 철저하게 자신을 지배한다. 하지만 이러한 지배는 그 자체로 의지되지 않는다. 이는 일종의 자기부정, 무아를 의미한다. 그런데 모든 의지는 자아를 요구한다. 어떤 자아든 그 자체로 정당화되진 않는 허구이다. 자아는 비교를 통해서 선택될 필요가 있다. 무아 또한 마찬가지이다. 하지만 무아를 위한 비교는 제공된 바가 없다. 무아는 자아의 비교를 위해 요청되었을 뿐 자아가 아닌 것처럼 인식하는 자들에게 여겨지고 있다. 인식하는 자들의 인식의 가능성을 제공하는 것은 무아라는 자아이지만, 그 또한 자아일 경우 그 자체로 추구될 순 없다. 가능성이 정당성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니체는 자신이 이러한 깨달음을 얻었다고 주장한다. 인식을 가능케 하는 무아라는 자아는 중요하다. 그것이 인식을 가능케 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오직 인식만을 요구하며, 다른 모든 자아를 거부하는 것은 진리를 향한 의지에 위배된다. 때문에 진리를 향한 의지를 위해서는 무아의 절대성을 부정하고 이를 상대화해야한다. 니체는 이를 통해 우리 인식하는 자들을 설득하려한다. 그는 인식하는 자들에 속하며 지금도 속하고 있다. 오히려 그가 설득하려고 하는 인식하는 자들이 진정으로 인식하고 있지 못하다. 그들은 인식에 대해서는 인식하고 있지 않다. 니체는 그래서 자신이 병에 걸렸음을 깨달았다고, 그로부터 회복되었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니체는 자신이 병적인 인식하는 자에서 건강한 인식하는 자가 되었다고 주장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는 자신을 우리 인식하는 자들로 소개하면서도, 그로부터의 이탈을 말하고 그로부터의 이탈을 권유할 수 있는 것이다. 병적인 인식으로부터 건강한 인식으로의 이행을 말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는 오직 우리 인식하는 자들에게, 오직 인식하는 자로서 말을 걸고 있는 것이다. 그들이 현재의 우리로부터 이탈하여 자신과 함께 하길 권유하는 것이다.

  니체의 이러한 설득 전략을 이해할 경우 니체 계보학의 역사서술은 다르게 읽힐 수 있다. 니체는 증거를 제시하지 않는다. 증거는 객관성의 지표이다. 증거는 모두에게 말을 걸 때 의미가 있는 것이다. 하지만 니체는 모두에게 말을 걸고 있지 않다. 니체는 오직 우리 인식하는 자들에게만 말을 건다. 우리 인식하는 자들은 니체와 동류의, 그리고 동급의 존재들이다. 때문에 니체가 서술하는 것들을 알 수 있고, 알고 있는 존재이다. 양심을 다른 감정과 다른 것으로 분류해야하며 도덕 감정의 기원을 본능으로부터 설명할 수 없다는 관점은 파울 레의 작업을, 양심을 처벌과 제도의 변천 속에서 조형되는 정신적 구조물로 보는 관점은 바흐오펜의 작업을, 우리의 정신 또한 물질처럼 잔존물을 가지고 있으며 이를 통해 구조적인 변천을 추적해야한다는 관점은 타일러의 작업을, 도덕 또한 하나의 자연적 사실이며 자연물처럼 형태와 구조와 기능의 역학 속에서 이해해야한다는 관점은 베젯의 작업을, 역사 속의 맥락 변천은 단순한 자연사실이 아니며 역사적인 결정국면Krise에 대한 인식을 통해 변경가능하다는 관점은 부르크하르트의 작업을, 정신적 구조물의 형성에서 물건과 행위의 주고받음이 야가하는 부채감의 중요성은 포스트의 작업을, 기술이 동물적인 필요에 의한 산물임에도 불구하고 그것이 만들어내는 환상이 새롭고 위대한 통일을 가능케 한다는 관점은 이폴리트 텐의 작업을, 단어의 어원을 추적하며 과거의 정신을 포착할 수 있으며 그러한 정신의 변천 속에서 발견되는 대안적 가치의 중요성은 쿠르티우스의 작업을... 이러한 나열은 멈출 수 없을 것이다. 내가 언급한 작업들은 니체가 진지하게 연구한 것이 실증적으로 증명된 것들이다. 그것은 끝이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는 끝없이 진행될 수 있다. 엠덴이 Gut 개념의 전사적 정신을 주장하는 니체의 터무니없는 서술에서, 설혹 신이 없을지라도 우리가 추구할 만한 가치를 보이려고 한 그로티우스의 위대한 저작의 자취를 발견했듯이, 우리는 역사적 증거와 무관한 공명을 무수히 발견하게 된다. 이는 과거가 아니라 미래로 향해지기도 한다. 우리는 니체의 교환에 의한 감정 역학 서술에서 모스를, 니체의 가치 지향성에 기초한 어원 설명에서 벵베니스트를 발견할 수 있으니 말이다. 인식하는 자들이라면, 그리고 인식하는 자들이 니체를 우리 인식하는 자들이라고 여긴다면, 니체의 터무니없는 서술은 터무니없지 않게 된다. 인식하는 자들은 증거 없이도 니체의 주장을 뒷받침할 이론적 구조물들을 발견할 것이며, 그것들을 통해서 니체가 제안하는 “진정한 역사”를 복원해낼 것이다. 니체의 아포리즘처럼 파편적으로 보이지만 하나의 총체를 이룰 체계가 있는 것이다. 하지만 중기 저작에서처럼 공표할 필요도, 아포리즘 양식을 통해 미로 속의 체계 찾기를 강요할 필요도 없다. 니체가 말을 거는 독자들은 이미 미로 찾기의 달인들이기 때문이다. 니체의 배려 없이도 인식하는 자들은 미로 속에서 진리를 찾아낼 수 있다. 그들을 대등하게 본다면 그러한 배려는 모욕에 불과하게 될 것이다.

  니체의 계보학적 역사서술의 진실성은 바로 정신적 대등함에 놓여 있다. 니체는 그들에게 증거는 밝히지 않는다. 그들은 이미 그런 것 따위는 알고 있을 것이다. 심지어 증거 따위는 중요치 않다. 설혹 증거가 있더라도 해석은 가설에 불과하며, 하나의 잠정적인 가능성이며, 언제라도 몰락할 수 있고, 언제라도 파산할 수 있는 일시적인 정거장이라는 진실을 우리 인식하는 자들은 알 것이기 때문이다. 그들은 니체가 천 가지 만 가지 증거를 가져와도 흔들리지 않을 것이다. 자유정신의 담지자들은 그런 방대한 증거 따위에도 흔들리지 않고 해석의 진위를 검토할 것이기 때문이다. 니체는 그렇기에 아무 것도 제시하지 않는다. 어차피 이 모두는 해석에 불과하다. 하지만 자신이 인식하는 자들에 속한다며 말하며, 그 증거로 자신이 그들에게 무엇을 배웠는지는 보여준다. 니체는 그렇게만 자신을 정당화한다. 니체가 말하고 싶은 것은 우리 인식하는 자들이 여태껏 만들어온 해석, 가설, 이론, 역사가 아니기 때문이다. 니체는 우리 인식하는 자들이 여태껏 말하지 않은 것들을 보여주기 위해서 그것들을 활용할 뿐이다.

  라이터나 젠슨이 지적한 것처럼 계보학에서 제시된 역사서술의 진실성은 관점들 사이에서의 비교를 통해서 획득된다. 하지만 그들의 지적과 달리 이는 역사서술의 진실성을 위한 가설적 비교 장치가 아니다. 니체가 만약 그러한 작업을 한다면, 그는 절대로 그들을 이길 수 없을 것이다. 무엇을 주장하든 잠정적이기에 그들은 니체의 작업의 토대가 될 수 있는 모든 것들을 검토할 것이며, 니체가 비판한 가설을 정교화한 형태로 가져올 것이다. 그런 싸움은 무의미하다. 그런 싸움에서 니체는 절대로 승자일 수 없다. 니체는 다르게 설득한다. 그들의 능력, 그들의 파괴 능력, 그들의 제작 능력의 원천을 다시 생각하게 한다. 그들의 능력의 원천이 되는 바로 그 이상만 공략한다. 니체는 그들에게 자신을 겸허하게 드러낸다. 그들을 증거로 이기려고, 합리성으로 이기려고 하지 않는다. 그들의 능력에 신뢰를 표시한다. 그들 또한 니체처럼 이 미로에서 깨달음을 얻을 수 있을 것이라 기대한다. 자신의 능력의 원천이 되는 이상이 병적이란 것을, 그리고 자신이 그토록 자부하는 자신의 능력을 배신하지 않고서도 그 병이 극복될 수 있을 것이라는 것을. 그렇기에 니체의 계보학은 하나일 수 있다. 하나의 태양, 하나의 대지, 하나의 관점, 하나의 저작, 그리고 하나의 논박일 수 있는 것이다. 파편들 조립해 하나로 만들어내는 이라면 니체의 하나의 논박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이를 하나로 읽어낼 수 있는 유일한 관점이 바로 그 자리에 있기 때문이다.

 

7. 나오면서

  라이터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도덕 철학 자체를 연구하지 않고서 니체의 도덕 철학을 연구할 수 없고, 과학 철학 자체를 연구하지 않고서 니체의 과학 철학을 연구할 수 없다." 나 또한 라이터의 주장에 동의한다. 하지만 나는 다음과 같이 비판할 것이다. "라이터 자연주의 자체를 연구하지 않고 니체의 자연주의를 연구했다. 그래서 라이터 또한 틀렸다." 니체의 자연주의는 결론이 아니라 시작이다. 정말로 자연주의 자체를 연구하려 했다면 이 진실을 놓칠 수 없다. 엠덴이 지적했듯 일관적일 수 있는 자연주의를 제시하려는 최신 연구들은 니체의 자연주의와 흡사해 보인다. 하지만 니체 철학은 단순히 일관된 자연주의 철학에 국한되지 않는다. 이것이 중요하다. 루즈는 자연주의를 주장하지만 그것을 왜 따라야하는지에 대해서는 설명하지 않는다. 과학 연구는 중요하다. 하지만 과학 연구에 위배되지 않는 철학적 기획을 수행하는 것은 과학 연구의 중요성으로부터 바로 도출되지 않는다. 니체는 자연주의를 주장했다. 하지만 니체가 자연주의를 주장한 것은 과학에 대한 맹목적인 추종, 신뢰 때문이 아니라 그의 철학적 관점 때문이었다. 니체의 철학은 관점주의이다. 현대의 자연주의 철학도 관점주의를 표방한다. 그런데 현대의 자연주의 철학의 관점주의와 니체의 관점주의 사이에는 차이가 있다. 현대의 자연주의 철학이 관점주의를 주장하게 된 것은 관점주의만이 자연주의 철학을 일관적으로 만들 수 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니체에게 있어 관점주의는 자연주의를 위한 것이 아니었다. 오히려 자연주의는 그의 관점주의의 산물이었을 뿐이다.

  니체의 관점주의는 모든 주장들을 동등한 가치를 지닌 고유한 관점으로 환원하지 않는다. 니체의 관점주의는 아무 것이나 관점으로 만들지 않으며, 관점들 사이에서의 비교를 부정하지 않는다. 관점은 체계적이어야만 한다. 다수의 사실들을 하나의 통일된 관점 속에서 조직할 수 있을 때, 그럴 때만 관점이라고 부를 수 있다. 하지만 이러한 관점들은 무수히 많고, 무수히 많을 수 있다. 문제는 어떤 관점이 옳은지를 판단하는 일이다. 관점들 사이에서 비교하고 올바른 평가를 내릴 수 있을 때 관점주의는 작동하기 시작한다. 니체는 관점들 사이에서의 비교와 이에 대한 평가를 위해 세계관으로 나아간다. 하지만 니체의 세계관은 그 어떤 세계관 철학과도 다르다. 세계관을 주장하는 철학들은 세계관의 올바름을 자신의 세계관으로 정당화한다. 때문에 세계관들 사이에서의 비교는 불가능해지며 평가는 더욱 불가능해진다. 이러한 비교불가능성은 세계관이 “세계”에 “대한” 것이기에 발생한다. 세계가 여럿이라면 소통이 불가능하다. 때문에 세계관 사이에서는 비교는 가능해서는 안 된다. 비교가 가능해지는 순간 세계의 보편성을 깨지고 만다. 그 경우 세계관은 더 이상 세계에 대한 것이 아니게 된다. 하지만 이는 불합리한 주장이다. 데이빗슨이 증명한 것처럼 이는 논리적으로 불가능한 진술이다. 세계에 대한 진술이란 것은 성립할 수가 없다. 그런 보편 주장은 자기지시의 순환에서 비롯되는 논리적 모순을 함축한다.

 니체의 세계관은 데이빗슨의 증명을 빠져나간다. 니체의 세계관은 세계에 대한 지시에 기초하고 있지 않다. 그것은 전체라는 표상을 구성하는 또 다른 표상과 표상들을 묶는 방식일 뿐이다. 전체를 진정한 전체가 아니라 전체라는 이름이 할당된 하나의 부분으로 보는 것이다. 때문에 이는 데이빗슨이 증명하는 논리적 결점을 갖지 않는다. 니체의 세계관은 또 하나의 관점에 불과한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또 하나의 관점은 큰 차이를 만든다. 여러 세계관들을 비교하고 하나로 묶을 수 있는 세계관으로서 제시되는 관점이기 때문이다. 세계에는 여러 관점이 있다. 그러한 관점들 모두가 세계의 어떤 부분에 대한 진실을 함축한다. 이러한 다양한 관점들을 하나로 묶어낼 수 있는 관점이 있다면, 이를 포괄할 수 있는 관점이 있다면 그러한 관점이 그것에 묶이는 관점보다 우월할 수 있다. 니체는 이러한 관점의 우열관계를 통해 자신의 관점주의를 완성한다. 정말로 올바른 철학적 관점이라면 현실을 부정해서는 안 된다. 현실 속에는 과학이라고 불리는 많은 관점들이 있다. 생물학을 이루는 여러 관점들, 물리학을 이루는 여러 관점들이 있다. 이러한 관점들 또한 현실의 일부이다. 이러한 관점들을 무시하면서 현실을 말하는 것은 무의미하다. 현실 속에서 존재하는 관점들을 포괄하지 않으면서 현실에 대한 진정한 관점을 운운하는 것은 무의미하다. 자신의 관점을 옹호하고 싶다면 이러한 포괄성으로 그 우월함을 보여주어야만 한다. 열등한 관점 안에서는 볼 수 없는 바로 그 관점의 열등함을 볼 수 있는 관점을 제시해야만 한다. 니체의 진정한 관점 선언은 이렇게 가능해진다. 이렇게 그의 관점주의는 작동 가능해진다. 이렇게 그의 철학은 하나의 철학을 이룬다.

  물론 이러한 관점적 포괄관계에서 배제되는 관점들이 생겨난다. 하지만 이러한 관점 배제는 자의적인 것이 아니다. 포괄될 수 없는 관계는 열등함을 내포하기 때문이다. 다음과 같은 비판을 생각해보아라. “진화론은 그럴싸한 가설이다. 그것이 그럴싸하다는 것은 부정하지 않는다. 하지만 그것이 틀렸다는 것은 확실하다. 그들은 물리학적으로 불가능한 전제에 기반해서 추론을 전개하고 있기 때문이다. 물리학의 법칙이 틀렸거나 진화론이 틀렸다. 무엇이 틀렸는지는 명확하다.” 하나의 관점은 다른 관점들과 완벽히 단절된 상태에서 제시될 수 없다. 관점들은 서로를 밀어내는 것만이 아니라 서로를 포함한다. 그 어떤 관점도 다른 관점과 독립적으로 자신을 형성해낼 수 없다. 그것은 다른 관점에 기초한다. 그리고 그렇게 기초된 관점들이 생길 때 문제가 생긴다. 앞에서 내가 제시한 비판은 켈빈 경의 비판이었다. 그는 태양의 나이가 수억년이 될 수 없는데 지구의 나이가 수십억년이라고 주장하며 그것에 근거하여 추론하는 지질학자들은 어리석다고 비판했다. 이는 이상한 주장이 아니었으며, 다윈은 켈빈 경의 비판을 진지하게 고민했다. 그는 해결책을 찾지 못하고 그의 관점을 물리학과 조화시키지 못했다. 그것은 러더포더에 의해 수행된다. 이처럼 관점들은 맞물려 돌아가며, 관점들 사이의 관계 속에서 관점들은 평가된다.

  다윈의 관점은 문제적이었다. 하지만 그 문제가 그가 진화론을 포기할 이유는 되지 않았다. 하지만 그는 적어도 그 문제를 무시하진 않았다. 관점들 사이에서의 불일치를 방기하는 것, 부조화를 무시하는 것은 그로써는 용납될 수 없는 것이었다. 만약 그것이 용납 가능한 것이라면 진리를 포기해야만 한다. 인식하는 자라면 진리를 포기할 수 없다. 그가 인식하는 자이게 만드는 알고자하는 열망은 바로 이 진리를 향한 의지에서 비롯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다윈은 문제를 해결하지 못했다. 하지만 그 문제를 은폐하지도 않았으며, 중요하지 않은 문제로 치부하지 않았다. 그는 솔직하게 자신의 무능력을 인정했다. 다만 현 상황에서 진화론을 포기할 근거가 될 수 없다고, 그것이 가진 인식적 가치가 무궁무진하다고, 이를 위협하게 한 켈빈 경의 주장이 틀렸음을 보일 열역학에 대한 새로운 이론이 탄생할 수 있지 않겠냐고 진화론을 변호했다. 그는 더 많은 탐구를 요청했다. 열려 있는 미래에 자신의 이론을 걸었다. 그렇기에 그는 틀리지 않을 수 있었다. 결국 켈빈 경이 틀렸고 다윈이 옳았다. 그는 진리를 향한 의지를 배신하지 않으면서도 자신의 진리를 지켜냈다. 니체의 관점주의는 바로 이 역사적 일화를 가능케 한 인간의 한 측면에 기초하고 있다. 무엇인가를 비판하게 만들고, 그것이 문제가 되게 만들고, 그것을 극복하게 만드는 것. 그것은 다수의 관점들이 현존한다는 현실과 바로 이 현실에서만 가능해지는 인식 가능성에 기초하고 있다. 모든 것을 포괄할 수는 없다. 포괄할 수 없는 것은 버려져야만 한다. 하지만 적어도 그러한 선택을 임의적으로 해선 안 된다. 어떤 것이 더욱 포괄적일 수 있는지, 그것이 어떤 의미를 갖는지, 포괄성과 의미라는 관점에서 다시 그것들을 비교하고 포괄해내야만 한다. 이 의무를 성실히 수행할 때, 오직 그럴 때만이 진리 주장은 가능하다. 그것이 파멸에 이르기 전까지는.

  니체의 관점주의는 바로 이 포괄성이라는 관점에서 하나의 철학을 이룬다. 이는 그가 진리를 향한 의지와 일치하는 작동하는 학문을 기획하면서 성취한 성과물이다. 이러한 니체의 관점주의는 가치 판단에 있어 우리가 유의미하게 따를 수 있는 중요한 교훈을 제공한다. 어떤 것이 주장되기 위해서는 그 주장의 내부만이 아니라 밖을 중시해야한다는 것이다. 바깥의 다른 관점들의 현존에 눈을 돌리지 않고, 이를 직시하라는 교훈이다. 이러한 바깥의 관점들 사이에서 자신의 관점을 성찰하는 것, 이것을 루즈는 “생태학적 성찰”이라고 표현했다. 생태학은 단순히 자연보호를 주창하는 구호가 아니다. 생태학은 하나의 학문이다. 생태학은 감수성에 기초한 자연과의 소통을 주장하지 않는다. 생태학은 자연 속에 존재하는 생태질서를 분류하고 그것들을 성립시키는 경계를 안팎으로 탐구한다. 사바나는 단순히 초원이 아니다. 사바나라는 하나의 생태 경관을 가능케 하는 기후적 조건과 지리적 조건, 그러한 조건 속에서 구체적으로 작동하는 하나의 생태질서를 만들어내는 지구적 단위의 메커니즘, 사바나 내부와 바깥에서 사바나를 구성하는 조건을 이루기도 하고 조건을 변경하기도 하는 수많은 행위자적 존재들, 그리고 이들이 만들어내는 질서들 속에서 유의미한 패턴을 식별하고 이러한 패턴을 이해 가능하게 만드는 법칙들, 이 모든 것들이 사바나를 이루는 것이고, 이렇게 “사바나”라는 생태학적 개념이 가능해지는 것이다. ‘사바나’라는 이름이 처음 붙여졌을 때는 그저 다른 초원들과는 무엇인가가 다른 무엇인가 특별한 초원이었을 수 있겠지만, 사바나를 하나의 생태학적 개념으로 만든 것은 바로 저 “무엇인가”를 탐구하는 인식적 성취 덕분이었다. 루즈가 말하는 생태학은 바로 이 엄격한 생태학을 가능케 하는 성찰 지점에 대한 은유이다. 배후를 살피고 이들의 관계를 파악해야한다. 관점은 그 자체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생태계 속의 한 존재가 그 자체로 존재하지 않듯이 말이다. 이 존재를 발생시키고, 보존하고, 변화시키는 배후 질서를 파악해야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존재들 사이의 관계를 파악하고 그러한 관계를 가능케 하는 또 다른 존재들을 발견해야만 한다. 루즈는 이러한 탐구만이 다양한 지식들을 하나의 일관적인 철학을 가능케 한다고 말한다. 물론 이러한 일관적인 철학이 관점들의 천편일률을 요구하는 것은 아니다. 일관적인 철학의 내부는 다종다양한 관점들의 복잡한 관계로 채워져 있다. 이는 생태계와 같다. 생태계를 이루는 존재들이 언제나 서로에게 직접적인 이익을 줌으로써 하나가 되는 것은 아니다. 협력뿐만 아니라 포식과 경쟁도 서로를 하나가 되게 만든다. 중요한 것은 이러한 그물망이 하나의 총체를 이룰 수 있는 것인가이다. 신비로운 직관을 믿지 않는다고 말하면서 신비로운 직관에서만 얻어질 수 있는 앎을 주장하는 것과 같은 모순을 범하지 않을 때에만 이러한 총체 이루기는 가능하다. 적어도 공존 가능해야하기 때문이다.

  이 교훈을 따라 니체에 대한 나의 해석을 재평가해보자. 나는 니체에 대한 다양한 연구들을 토대로 나의 해석을 구성했다. 하지만 내가 니체에 대한 모든 연구를 참조한 것은 아니며, 나의 참조들 속에서 몇몇 연구들은 무시되었다. 나의 이러한 가치판단은 공정한 것이 아닐 수 있다. 나의 가치판단이 증거에 기초한 것은 아니었기 때문이다. 각각의 연구들은 자신들의 증거를 가지고 있다. 이것을 모두 논박하고 모두 증명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부당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검토는 모든 평가를 불가능하게 만든다. 또한 관점 구축을 불가능하게 만든다. 자신의 관점을 제외한 관점들을 모두 불가능한 것으로 만들어야만 하나의 관점이 옹호되는 것은 아니다. 관점들 사이의 관계만으로도 평가는 가능하다.(니체가 그랬듯이!) 나의 연구들에 대한 가치 평가는 다른 연관들과 일관성을 지니는지에 대한 판단에 근거하여 이루어졌다. 어떤 연구가 니체의 정치 철학에 대해서는 그 자체로는 설득력 있는 연구일 수 있다. 하지만 그 연구가 니체의 진리론에 대한 연구, 니체의 관점주의에 대한 연구, 니체의 사회철학에 대한 연구, 니체의 도덕철학에 대한 연구, 니체의 역사학적 철학함에 대한 연구, 니체의 전기적 사실과 이에 기초한 지성사 연구와 일관적일 수 없다, 그 연구는 무시되어 마땅하다. “그 연구는 단편적”이라고 판단되어도 부당한 것은 아니다. 나의 연구는 이렇게 진행되었다. 니체가 남긴 모든 문헌, 니체와 관련될 수 있는 모든 역사적 자료, 니체를 다룬 모든 연구들을 포괄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리고 그러한 모든 것에 대한 집착은 무의미를 낳는다. 정말로 중요한 것, 철학적으로 시도될 가치가 있는 기획은 니체에 대한 모든 것을 포괄할 수 있을 일관적일 수 있는 해석 지평을 제시하는 일이다. 나의 연구가 비록 한계적일지라도 나는 이렇게 나 자신의 연구를 변호할 수 있다. 나는 적어도 니체의 전기적 사실에 기초한 지성사 연구, 니체의 형이상학, 니체의 진리론, 니체의 인식론, 니체의 관점주의, 니체의 역사학적 철학함, 니체의 사회철학, 니체의 문화철학, 니체의 정치철학을 일관적일 수 있게 만들 관점에서 나의 해석을 제시했다. 도덕의 계보학에 대한 완벽한 연구 따위는 니체가 부정한 물자체와 같은 것이다. 우리가 추구해야할 것은 다른 해석들은 모두 불가능한 것으로 입증하며 유일하게 가능한 해석으로 제시될 해석이 아니다. 우리가 추구해야할 해석은 수많은 해석들 속에서 포괄적인 해석을 가능케 하는 해석이다. 나는 나의 연구가 적어도 이러한 관점에서 충분히 설득력 있고 학술적인 의의가 있는 연구성과라는 것을 믿어 의심치 않는다. 변론 이후 다음의 말을 덧붙이면서. 나의 관점이 충분히 강하지 못하다면 나의 관점에 충격을 줄 수 있을 관점으로 나를 실험해달라. 그것이 바로 내가 원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