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아랑의 <헤어질 결심> 비평에 대한 반박
댓글이 짤려 여기에 옮김. 본래 글은 https://brunch.co.kr/@jesaluemary047/157
어디서부터 얘기를 해야할지 모르겠군요. 현 비평이 어떤 특정한 종류의 모티프가 전개되었음에도 해소되고 있지 않는다는 코멘트 이상이 아니라서요. 어처구니 없지만 “비평”이 어떤 것이냐는 얘기에서부터 시작해야할 것 같습니다. 그래야만 시차, 관점주의 같은 얘기가 제대로 다뤄질 수 있을 것 같거든요.
비평이 무엇인지와 무관하게, 우리는 비평이 어떻게 가능한지에 대해서 고민할 필요가 있습니다. 현대 비평의 효시로 내세울 수 있을 사람들, 프리드리히 슐레겔, 콜리지, 스탈 부인은 언제나 이 고민에서 비평을 시작했고, 현대 비평의 진정한 시작자들이라고 할 수 있을, 보들레르, 생트-뵈브, 하이네, 니체 모두 그랬으니까요. 비평은 기준 제시일 수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그 기준이 객관적일 수 있어야하죠. 이러한 객관성 요구는 보편성 요구와 다릅니다. 모두가 따라야할 것일 이유는 없지만, 적어도 어떤 작품에 대해서 말할 때 따라야할 기준인 것이죠. 문제는 어떤 작품에 대해서 말할 때 따라야할 조건은 어떤 것일 수 있냐는 것이죠. 당연히 현대 비평의 시작자들이 따른 윤리, 그리고 (풀레에 따르면) 저들을 현대 비평의 시작자일 수 있게 한 윤리는, 그것이 오직 “작품”을 위한 것이어야한다는 윤리였습니다. 작품에 대해 정말로 이해했다고 말할 수 있을 때에서야 말할 수 있는 것이죠. 단점에 대해서 “모른다”가 아니라, “그럼에도”로 얘기할 수 있을 때에서야 말할 수 있는 것이고요. 언제나 최고의 비평은 찬사였지 혹평이 아니었습니다. 전 위대한 비평가들의 글에서 혹평을 읽은 적이 없고, 읽었더라고 해도 기억하지 못하고 있을 겁니다. 중요치 않으니까요. 기억할 이유가 없죠. 언제나 이해와 공감이 비평의 존재 이유였고, 비평가들이 비평을 말하게 하는 동기였죠. 저 또한 언제나 저 윤리를 지키는 편입니다. 이것만이 비평이란 것을 가능케 하니까 말이죠. 저런 윤리를 안 지키면 비평은 앎도 아니고 객관적인 것도 아니게 됩니다. “공적”인 것이라고 말할 이유도 없어질 거고요. 제가 <디 아워스>란 영화를 보았을 때 그 자리에서 저 영화가 쓰레기란 것을 느꼈었지만 누구에게도 그런 얘기를 하지 않은 것은, 제가 못 본 가능성이 있어서였습니다. 모든 가능한 해석에 답할 수 있게 되고서야 그 영화를 혹평하기 시작했고요. 어떤 작품을 완전하게 하는 해석의 가능성이 존재하는 한 혹평은 무의미합니다. 그래서 혹평이 찬사보다 언제나 어렵죠. 가능한 하나의 답변을 찾아내면 되는 찬사와 달리 혹평은 가능할 수 있는 모든 답변을 고민해야하거든요. 모든 해석 가능성 속에서도 그럼에도 이 작품이 문제적이라고 진단할 수 있을 때에서야 혹평은 가능합니다. 이것이 비평의 조건이고요. 이 단순한 윤리를 안 지키니까 문제가 생기는 것이고, 혹평이 넘치는 거겠지만요. 애초에 이 윤리를 지킨다면 혹평을 내놓을 이유가 없어집니다. 좋은 작품을 말하는 걸로 이미 충분하니까요. 굳이 혹평을 하는 것은 정말로 이유가 있을 때, 정말로 그것을 비난해야만 할 때에나 허용되는 것이죠.(누군가가 재밌게 본 것에 대해서 굳이 비난을 해야할 이유를 찾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입니다. 저 또한 비평적 관점과 무관하게 좋아하는 영화들이 있습니다. 그리고 비평적으로 혹평하는 영화일지라도 누군가가 그 영화에 대해서 신나게 떠들며 자신을 매혹시킨 것들을 얘기하는 일을 바라보는 일은 기분 좋은 일이기에 비난할 수가 없습니다.)
이런 문제를 염두에 두고 시차와 관점주의에 대한 얘기로 넘어가죠.
전 언급된 시차가 왜 설명되어야하는지 이해할 수가 없습니다. 시차는 설명될 이유가 없습니다. 그냥 현존하죠. 정확히 말하자면, 그것이 현존하는 것 자체도 까다로운 조건 속에서 가능하겠지만요. 전 니체를 연구하고 있고, 니체의 관점주의에 대한 해석에도 자신 있고, 니체의 관점주의에 대한 해석사도 자신 있지만, 윤아랑 님께서 어떤 생각 속에서 ‘관점주의’를 말했는지 알 수가 없습니다. 지금 우리 둘 사이에서 시차라고 말할 것이 있는지도 모르겠고요. 어떤 것이 현존한다고 말할 수 있기 위해서는, 그것이 끈덕진 무엇인가로서, 고집스러운 무엇인가로서 그 자신을 드러내야할 텐데, 아직 그런 것을 확인하지 못 했거든요. 시차란 것 또한 공유될 때에만 말해질 수 있고, 그런 공유 또한 당연히도 당연한 것이 아니죠. 그러니 언급된 그런 차이들은 주목이 필요하지도 않은 것들이라고 전 생각합니다. 당연한 것들이죠. 원래 그런 것들은 깔려 있고, 당연히 오해가 넘쳐나죠. 그게 정상입니다. 그런걸 부정하는 영화가 특이한 거고, 부정하기 위해 보여야할 것이 많은 것이죠. 설명이 필요한 것은 같은 시선이지 시차가 아닙니다. 그래서 전 언급된 시차들을 한 데 묶어 얘기할 이유조차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냥 당연히도 깔려 있는 것들이고, 당연히도 깔려 있어야 할 것들이거든요. 의식적으로 배열할 수야 있겠지만, 그것들을 공통의 것으로 묶어 주목할 이유는 없을 것이고요. 그러니 그걸 하나로 묶어 무엇인가를 요구하는 것이 이상한 요구라고 생각합니다.(언제나 무엇을 함께 묶기 위해서는 마땅한 이유가 있어야합니다.) 그런 요구가 보편타당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헤어질 결심> 에게 요구될 이유 또한 없다고 생각합니다. 적어도 지금 비평에서는 말이죠. 이 영화가 무엇을 말하고자 하는 것이 진단되고 나서야 그런 요구가 합당한지 알 수 있을 텐데, 말해진 것이 아무것도 없으니까요.
이런 것들은 작품에 대한 옹호라고 할 수 없겠죠. 지금까지의 얘기는 저런 근거로 영화를 혹평하는 것은 비평의 윤리에 어긋난다는 얘기인 거고, 자신의 관점을 강요하는 것에 불과하다는 그런 얘기죠.(정확히 말하자면 관점을 강요하는 것조차 아닙니다. 애초에 관점이라고 부를 무엇조차 없죠. 니체의 관점주의는 총체를 부정하는 것이 아닙니다. 총체의 부재는 그냥 당연한 현실일 뿐이죠. 관점주의는 공통의 관점을 형성하는 일의 가능성과, 이를 가능케 하는 장치를 설계하기 위해서 고안된 겁니다. 니체에게 중요한 것은 같은 관점에 서기 위해 필요한 장치들과 그 경로였습니다. 이런 해석은 니체를 꼼꼼히 읽어보면 당연하게 알 수 있고, 90년대 이후 니체 학계에 일반적으로 통용되고 있는 해석이죠. 하여간 관점적 차이란 것을 말하기 위해서도 많은 것이 필요하다는 얘기입니다.) 박찬욱이 왜 이런 영화를 만들었는지에 대한 고민 없이, 이탈리안 레스토랑에 가서 짜장면을 찾는 그런 일이라는 얘기인 것이고요. <헤어질 결심>에 대한 윤아랑님의 혹평을 반박하기 위해 구체적인 옹호가 필수적이라고 생각하진 않지만, 그래도 옹호하자면 다음과 같습니다.
일단 전 이 영화가 “세계는 어그러져있다”고 외치고 있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뭐 그게 외침이 필요한 일도 아니라고 생각하고,(모르는 게 이상한 거 아닌가요…?) 영화, 혹은 예술이 그런 외침을 위한 수단으로 적절하다고도 생각하지 않습니다.(보통 그런 짓을 하면 구린 예술이 되죠. 제임스 엘킨스 말마따나 예술이 사회를 반영해야만 한다는 요구는 애초부터 말이 안 됩니다. 사회를 알고 싶다면 사회 연구를 참조해야죠.) 예술은 가상일 뿐이고, 예술이 가상인 덕분에 가능할 수 있는 것을 생각해야합니다. 영화가 무엇이고 무엇일 수 있는가란 문제를 의식하며 만든 영화들을 전 좋아하고, 그런 영화들 중 말이 되는 것은 언제나 영화는 가상이라는 진실을 받아들인 것들이었습니다. 그게 앞뒤가 맞고요. <헤어질 결심>은 사회나 세계에 대해 떠드는 영화가 아닙니다. 가상 자체를 가상으로서 보여주는 영화인 거고, 가상이 가진 특징들과 한계를 잘 인식하고 그 속에서 가능한 최선을 구현해내는 영화인 거죠. 정말로 매력적인 인물들을 꾸며내고 그들이 만날 수 있는 특정한 조건을 꾸며내는 데 집중했다는 얘깁니다. 홍산오 말마따 정말로 좋은 여자들이 도대체 왜 저런 놈이랑 결혼하는지 모르겠고, 서래 말마따나 그건 정말로 좋은 사람은 바쁘기 때문에 만날 수가 없어서고, 그러니 살인사건이 필요한 거죠. 그러지 않고서야 만날 수 없으니까요.
왜 두 인물이 흥미롭고, 둘의 만남에서 일어나는 일이 흥미로운지는 중요하지만 좀 긴 설명이 필요합니다. 왜냐하면 해준의 입장에서 본 서래란 인물과 그가 그녀와 얽힌 이 사건의 의미와, 서래의 입장에서 본 해준이란 인물과 그녀가 그와 얽힌 이 사건의 의미는 다르니까요.(전 둘이 같이 보고서 서로 다른 것을 얘기하게 되는 것이 이 영화가 가진 미덕이라 생각합니다. 서로가 자신의 욕망을 투사하고 느끼기에 주목해서 보는 것이 다를 수 있는 거죠.) 자세한 분석은 생략하고 간단히 핵심만을 요약하자면 이런 겁니다. 원래부터 진정한 소통은 어렵습니다. 그것이 쉽다고 말하는 사람 말은 들을 가치가 없고요. 진정한 소통이 가능하지 않거나 구현하기 어려울 때, 가능한 최선은 모두가 원하는 거짓을 받아들이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서래와 해준은 어떤 의미에서는 원하는 것을 얻었습니다.(둘이 잘 될 가능성은 애초부터 없었고, 만약 그렇게 그렸다면 비현실적이었을 거라 생각합니다.) 서래는 붕괴된 해준을 일으키고, 자신이 만족할 수 있는 마지막을 쟁취했습니다. 해준은 전말을 모른 채 의미 없는 세상 속에서 오직 자신을 위해 놓인 미결 문제를 마주할 수 있게 되었고요. 아마 후자에 의문이 들텐데 설명하자면 이렇습니다.(전자도 설명이 필요할 수도 있겠지만… 전 저쪽은 전문이 아닙니다. 제 욕망은 저렇지 않거든요.) 세상을 직시하는 일은 힘듭니다. 알아주는 사람도 없고요. 언제나 자신이 부족한 것 아닌가 생각하게 됩니다. 해결하지 못한 문제들이 언제나 가슴한켠에 남게 되고요. 이런 삶은 힘듭니다. 알아주는 사람이 없을 뿐만 아니라, 애초에 문제 자체가 자신을 위한 것이 아니거든요. 세상에서 없어져야할 무엇에 기생하는 것일 뿐만 아니라, 문제 자체가 자신을 향해 있지도 않죠. 문제는 극복되지도 않고요. 이런 걸 극복하려고 하면 사람이 망가집니다. 타협이 필요하죠. 하지만 그것이 현실적이면 품위를 잃게 되죠. 현실과 타협한 자신에게 자부심을 가질 수 없게 될테니까요. 결국 가능한 타협은 상상적인 것일 수밖에 없습니다. 타협이라기보다는 일종의 정신승리겠지만요.
정신승리는 매우 중요합니다. 19세기에 오이디푸스 신화가 유행했었죠. 그런데 오이디푸스 신화만 유행한 것이 아닙니다. 아도니스 신화도 유행했죠. 간단한 이유입니다. 19세기에 제 정신으로 사는 건 어려웠거든요. 그러니 멀쩡한 사람들도 이상한 믿음에 빠졌던 거죠. 이상한 신앙에 기대지 않고 버틴 사람들에게 어려움은 자신들이 마주한 세상 자체가 그렇게 가치 있어보이지 않다는 사실이었습니다. 가치 있는 세상이라면 헌신하는 게 의미가 있겠죠. 누가 알아주지 않더라도 그 정도는 할 수 있습니다. 제대로 된 사람이라면 말이죠. 문제는 애초부터 이게 가치 있어보이지 않고, 자신이 해결하기 위해 그토록 노력하고, 자신의 삶을 쥐어짜내고 있는 문제들이 가치 있어보이지 않아서죠. 세상에 범죄가 사라진다면야 인내할 수 있겠죠. 하지만 애초에 그렇지 않다면 좀 슬픈 게 되죠. 범죄 자체는 사라지지 않고, 이걸 해결하는 것도 의미가 없어 보일 때, 그리고 애초에 이게 문제가 아닌 것처럼 보일 때, 절망이 시작되는 겁니다. 범죄가 사라질 것 같지도 않고, 이것 자체가 사회에 당연한 것이라면,(심지어 이게 사회에 필수적인 필요물이라면,) 이토록 인내하며 견뎌내고 있는 자신의 삶은 의미 없을 테니까요. 적어도 문제가 문제여야 문제를 푸는 게 의미가 있을 수 있습니다. 풀리지 않더라도 말이죠. 그렇지 않다면 견디는 것만 남고 잠이 오지 않는 밤만 남습니다. 그런 겁니다. 그럴 때 가능한 정신승리 중 하나가 이런 시련 조차 의미가 있는 것이라는, 섭리나 보살핌에 희망을 품는 것이었고, 아도니스 신화가 그런 것이었죠. 해준은 서래를 통해 그런 희망를 얻게 됩니다. 오직 자신을 위한 문제이고, 자신만이 풀 수 있으며, 풀고 싶은 문제가 생기는 거니까요.
서래는 매력적인 인물이지만 매우 비현실적인 인물입니다. 상상 속에나 나올 인물이고, 실제로 정체불명의 인물이죠. 서래가 극중에서 보여준 모든 것은 가상이고, 어디서부터 진실이고 어디서부터 거짓인지가 불분명합니다. 그런데 바로 이 비현실성이 서래를 매력적이게 합니다. 다른 인간 같지가 않거든요. 서래란 인물 자체가 가지고 있는 신비로움과 비현실성이 서래와 관련된 사건을 단순히 풀어야할 문제가 아니라, 자신이 보던 세상과 다른 무엇이고, 그래서 그게 자신과 닮은 무엇이라고 착각하게 만듭니다. 환상 속에서 만날 법한 매혹적인 존재를 마주하게 되었으니, 그것을 인간 이상의 존재로 착각하게 되는 것이고, 그 존재가 부여하는 시련이기에 그것은 가치 있게 된 거죠. 일종의 신화라고 할 수 있습니다. 가상적이고, 그래서 매혹적인 거죠. 이건 신화 속에서나 가능한 욕망에 대한 (비록 상상적인 성취일지라도) 최고의 답이니까요. 영화 자체가 가상이겠지만, <헤어질 결심>은 정말 의도적으로 가상만을 그려냅니다. 캐릭터들은 이상적이고, 구체성도 이상을 위해서만 존재하죠.(영화 초반부에서 해준이 조끼를 벗을 때 이상하게 벗어서 왜 그런가 했었죠. 그런 겁니다. 자연스러움은 이 영화를 위한 미덕이 아닙니다.) 근데 이게 이상한 게 아니란 거죠. 만약 현실적인 영화를 만드려고 했는데 저랬다면 문제가 되겠죠. 하지만 이 영화는 애초부터 환상적이고, 신화적이며, 욕망에 대한 상상적 성취를 다루는 영화입니다. 그래서 매력적일 수 있는 것이고요.
물론 저런 성취는 애초부터 상대가 없는, 자기 충족적인 그런 것입니다. 누군가는 이런 것이 문제라고도 할 수 있겠죠. 자기 충족적이고 나르시즘적이라고요.(전 애초에 나르시즘을 이런 맥락에서 얘기하는 것을 싫어하지만 하여간) 전 이게 문제가 된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정말로 타인을 위할 수 있는 것은 어떤 것일 수 있을지에 대한 고민이 없으니 이런 게 문제라고 쉽게 얘기하는 거겠죠.(그리고 쉽게 행하는 것이고요. 보통 그게 세상을 나쁘게 만들죠. 실제로 현실적인 답을 고민할 때 무력감을 느끼지 않는다면 제대로 고민하고 있는 것이 아닌 겁니다. 도대체 타자와 마주서고 함께 한다는 것이 어떤 것일 수 있는 건가요?) 상상적으로 성취하는 만족도 어려운데 말이죠. 아무거나 환상이 될 수 없고, 설득력 있는 성취일 수 없거든요. 그것을 설득력 있게 성취해내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의미가 있습니다. 그것을 유일한 답변인냥 그린다면 누구보다 전 날선 비판을 하겠지만요. <헤어질 결심>은 영화에 맞게, 영화처럼, 영화스럽게, 가상을 가상으로 그려내고 있고, 그 무엇보다 이것이 가상이라고 끊임없이 상기시키면서도 설득력 있는 환상을 만들어내고 있으니 비판할 이유가 없죠. 당연히도 <헤어질 결심>의 답변은 유일한 답변이 아닙니다. 상상 속에서만 가능한 답변이고, 환상이고, 그래서 현실과는 무관하죠. 하지만 적어도 마음 속에 품어보았을 때 기분을 좋게해주는 그런 환상입니다.
문제를 상상적 만족을 위한 것으로 집중하고, 하나의 이상을 그려낸다고 할 때, 헤어질 결심에서 선택한 것들은 모두 다 설득력이 있습니다. 일단 배우들도 잘 골랐고, 그 배우들을 통해서 꿈꿀만한 환상을 잘 선택했고, 그 환상에 맞게 캐릭터를 이상화했고, 그 이상적 인물들이 자신들의 특유함을 잃지 않은 채 얻을 수 있는 최상의 것을 얻게 되었고요.(그걸 의식적으로 선택하지 않았다는 것은 중요치 않습니다. 그걸 의식화하면 이 환상은 붕괴되니까요.) 저처럼 세상을 똑바로 보겠다고, 현실을 직시하겠다고 스스로를 괴롭히는 사람이라면 저런 욕망 성취가 얼마나 매력적인지를 잘 알 수 있을 거고, 다른 사람이라면 다른 것을 서래를 통해 얻을 수 있겠죠. 적어도 그러한 욕망이 있는지는 문제겠지만요. 그래도 <헤어질 결심>은 평범한 욕망에도 잘 맞게 만들어졌습니다. 평범하게 환상을 품어도 매력적으로 보이게 인물들을 꾸며냈으니 문제가 없단 것이죠. 이 영활 재미없게 보는 게 전 더 어렵다고 생각합니다. 이 영화에서 의미 없는 의미 찾기, 맹목적인 의미 찾기, 무지성 의미 찾기를 하지 않는다면 말이죠.
물론 저런 환상이 뭔 의미가 있냐고 말할 수는 있을 겁니다. 그런데 꼭 이런 걸 넘어서는 의미가 있어야하나요? 루소 말마따나 진정한 예술은 진실이어야합니다. 하지만 루소 말마따나 누군가를 절망시키는 진실한 철학보다 누군가를 위로하는 거짓된 예술이 낫습니다. 만약 진실이 우리의 삶을 배신한다면, 차라리 거짓을 선택할 거라고 루소는 말하고 저 또한 이에 백번 동의합니다.(물론 그의 평생 좌우명은 “나의 삶을 진실을 위해 바치리”였지만요.) 예전에 <라라랜드>에 대한 코멘트에서 제가 주장한 것들을 언급하면 좋을 것 같군요. 정말 진실을 위한 삶을 살아내는 일은 너무나 힘들고 그래서 언제나 포기하고 싶은 마음이 따릅니다. 확신을 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거든요. 그럴 때 위로를 건내는 것 중 하나가 예술이죠. 당연히 예술이 반드시 위로하는 것일 이유는 없습니다. 그걸 주장하려는 것은 절대 아니고요. 하지만 제가 여태 예술을 마주하여 볼 수 있었던 최고의 것은 이것이었습니다. 적어도 견뎌낼 수 있게 하는 것, 답이 되진 않더라도 절망하지는 않을 수 있게 하는 것. 앞서 얘기했듯이 예술이 반드시 이래야만 할 이유는 없을 것이고 그런 주장을 하고 싶지도 않습니다. 하지만 전 이런 예술들도 충분히 의미 있다고 생각하고 그것을 부정하는 것은 의미 있을 수 없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생각한다’고 얘기하고 싶지 않군요. 도대체 저걸 부정하는 것이 어떻게 의미 있을 수 있는지, 의미 있을 가능성을 사상하는 것조차 불가능하거든요.) 그것만을 말해도 충분히 의미 있습니다. <라라랜드>가 앞 선 영화들에 대한 아름다운 헌사(좀 더 고전적인 표현으로는 éloge, 아카데미 프랑세즈에 입회할 때 바치는 것으로서)일 수 있는 것은 이 진실을 드러내서라고 생각하고요. <헤어질 결심> 또한 이 진실 속에서 자신을 표현하는 영화입니다. 꿈꿀 수 있는 것들 중 더 아름다운 것이 없을 것만 같은 이상적인 아름다움을 잘 포착해냈고, 그것을 표현해냈습니다.(전 이 영화를 보기 전까지 탕웨이란 배우가 가진 매력을 제대로 포착해내고 이상적으로 그려낸 영화는 <색계>뿐이었다고 생각했고, 더 좋은 방법은 없을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전 <헤어질 결심>을 보고 그것이 오류였다고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그것이 누군가에게는 사치일 수도 있겠지만, 누군가에게는 위로일 수 있을 그런 것이고요. 비난할 이유를 전 찾을 수가 없습니다.
이런 문제를 차치하고서도 “올해의 졸작” 운운하는 것은 도저히 납득할 수가 없습니다. 상업영화 중에 이 정도 완성도를 가진 영화가 몇이나 된다고 졸작 운운하는 것인지 모르겠단 얘기죠. 하여간 그렇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