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 사회의 정치? 오를레앙과 지라르 사이에서
이하 카톡 복붙
<가치의 제국>은 다른 건 다 좋은데, 저랑 생각이 너무 비슷하다보니 딴 생각이 자꾸 드네요... 뒤를 안 읽어도 뭐라 얘기할지가 다 보이게 되고, 그러다보니 이를 기반해서 다른 설명을 모색하게 되는 것 같습니다.
하여간 그런 이유로 다른 생각이 났는데, 저번에 얘기한 “불평불만이 많은 사람들”에 대해서 뭔가 느낌이 왔습니다...
다만 저의 설명법은 좀 거창해서, 논문에는 도움이 안 될 거 같고, 그냥 이해에는 보탬이 되지 않을까 정도로 기대하고 있습니다.
(이 문제가 왜 <가치의 제국>과 연관이 있는지는 나중에 설명하겠습니다)
XXX 게임 유저들의 태도는 특이한 게 아닙니다.
저희 모두 얘기했듯, 이게 일반적인 유저들의 분위기인 듯합니다.
재미난 것은 저런 태도가 게임에만 국한되지 않는다는 것이죠.
커뮤니티에서 보이는 사람들도 모두 저렇습니다.
한 유머글에서 회자된 것과 같이, 외국인의 눈에 비추어진 한국인들은 분노에 미친 사람들이라는 증언과 잘 부합하죠.
재가 흥미를 느낀 포인트는 이런 겁니다.
근데 저 사람들이 정말로 분노하고 있는 것일까 하는 것이죠.
제가 지켜본 바에 따르면 저 사람들은 문제 해결에 대한 적극적인 의지가 없습니다.
결집해서 하나의 언어를 구축해내고, 그것을 사회 속에서 실현하려는 의지가 없습니다.
최근 홍준표의 경선 패배 이후 일어난 병림픽에서 보듯 전혀 행동하지 않긴 합니다.
넓은 의미에서의 정치행위에는 몰두하지만, 좁은 의미에서의 정치행위는 전혀 안 하죠.
인터넷에서만 싸울 뿐 현실에서는 조용합니다.
때론 인터넷에서의 행동에서 현실로의 행동으로 변화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그런 행동들도 한계가 명확해요.
정통적인 의미에서의 실천 행위에는 개입되지 않습니다.
굉장히 느슨하고, 지속적이지 않은(이게 일회적이란 의미는 아닙니다. 산발적으로 반복되기 때문에 분명 지속적이지만, 연속적으로 지속되진 않는다는 의미에서 지속적이지 않단 것입니다) 실천만이 현실화됩니다.
뭐 여기에 대한 일차적인 의심은 “이 사람들은 사실 불평불만 자체를 추구하는 것이 아닐까?”가 될 것입니다.
근데 전 그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불평불만 자체가 목적인 것 같진 않아요. 분명 이런 불평불만에 객관적인 가치부여를 합니다.
다른 설명은 “이 사람들이 좁은 의미에서의 행위를 실천하는 방법을 몰라서 그런 것 아닐까?”가 될겁니다.
전 이것은 반만 맞다고 생각합니다. 다만 반만 맞다의 의미가 중요합니다.
제가 서술한 저 현상이 제게 특이해보이고, 흥미로워 보이는 것은 다르게 현실화되었던 사례들이 머릿속에 있어서입니다.
세기말 빈 시대의 청년 정치 같은 게 떠오르거든요.
걔들도 무식하고 병신이었지만 굉장히 강한 정치 결속력을 가졌었죠.(과잉대표될 만큼)
얘들이 정치 행위를 잘 알고 있어서 성공시킨 것은 아닙니다.
얘들의 정치 행위는 애초에 새로운 것이었고(선례가 없습니다. 새로운 정치 양식이었던 것이죠) 원래부터 잘 알고 있었다기 보다는 활동들이 지속되면서 수렴진화한 것이었거든요.
그러니 당연히도 “잘 몰라서”는 설명되지 않습니다.
그런데 전 반만 맞다고, 다른 말로는 반만 틀리다고 했습니다.
세기말 빈의 새로운 정치 집단들은 활동들의 지속 속에서 배울 수 있었던 반면, 현대에는 그게 불가능해보이거든요.
왜냐? 오프라인과 온라인의 차이 때문이고, 해당 관계 맺기의 지속성과 밀도 차이 때문이죠.
전 여기서 두 원인을 얘기했는데, 이게 중요합니다.
오프라인과 온라인의 차이로, 그래서 온라인에서는 그냥 접속을 끊으면 현실로 돌아오고, 그래서 생기는 관계 맺기의 차이도 중요합니다.
하지만 전 오프라인과 온라인 차이 이상의 관계 맺기 양상의 차이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애초에 저런 청년 집단이 정치 집단이 될 수 있었던 것은 저들이 할 일이 없어서였습니다.
돈이 없어도(돈은 정치적 야심이 있는 사람들이 대는 겁니다 원래. 빈에서 나치즘의 원류가 되는 정치 이념을 만든 놈들은 모두 부잣집 도련님들이었죠) 시간은 많고, 그러니 “현실적 활동”이 매우 수월했습니다.
열심히 일하는 사람이 정치 행위를 하기 위해서는 “여가”로서 정치 행위를 수행해야만 했지만, 저들은 일을 안 했기 때문에(일자리가 없어서) 일과 여가 구별 없이 정치 행위에 몰두 했고, 그래서 “과몰입”이 수월했고, 그래서 집단화가 가능했죠.
이런 설명은 제가 “할렘가”가 가진 폭발력 얘기하면서 언급했을 겁니다. 빈민이 몰려 있을 때는 빈민이란 것을 하나의 단위체로 구축해내고, 이에 개입하는 것이 가능한데, 빈민들이 산발되어 있을 때는 하나의 단위체로 구축해내는 것부터 불가능해진다고요. 화이트 채플이 보여준 전시 열풍은 현대에 불가능한데, 빈민이 입소문을 통해서 전시에 대해서 알 수가 없고-다들 단절되어 있어서- 거리상의 문제로 접근하기도 어려워서죠. 당연히도 오늘날의 빈민은 오히려 노동시간이 많아서 전시에 갈 시간도 없습니다.
우리의 관심사는 현대 20-30대의 인터넷 활동이죠.
이들은 분명 문제 의식을 느끼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게 구체적인 행동으로 현실화되지 않고 있죠.
이것은 그들이 이렇게 의식화될 수 있게 만든 매체가 온라인이어서이기도 하고, 애초에 그들은 그 정도의 행위 여유가 없어서기도 합니다.
제가 저번에 여가의 발생을 설명하면서 서술했듯이, 일과 여가가 분리되고, 여가가 한정되면, 여가를 헛되이 보내지 않기 위해서 과한 짓, 리스크가 큰 짓, 과몰입 같은 것을 지양하는 경향이 생깁니다.(이는 저처럼 그냥 하루 종일 책 읽는 사람과 일주일에 2시간 책을 읽을 수 있는 사람이 실질적으로 두 시간동안 책을 읽을 때 느끼는 심적 차이와 비슷합니다. 저야 두꺼운 책을 보는 게 딱히 “문제”일 이유가 없죠. 하지만 시간이 촉박한 사람들은 두꺼운 책을 선택하기 어렵습니다. 많은 연구자들이 단행본을 못 읽고 논문만 읽게 되는 것과 비슷한 것이죠)
여기서 끝나면 <가치의 제국> 언급이 무의미합니다.
제가 생각하는 흥미로운 포인트는 저런 현상에 대한 설명이 아닙니다.
제가 저런 현상을 설명하고 있다고 생각하지도 않고요.
제가 실질적으로 설명하고 싶은 것은 외려 현실화된 정치 행위의 양태입니다.
현실 정치에 대한 기사를 보면 진짜 너무 개병신 같은데, 저런 일이 왜 일어나는지 전 원래 이해가 안 되고 있었어요.
그러다가 저런 식으로 생각하다보니 이해가 되더군요.
중요한 차이 지점은 현실화 이전이 아니라, 현실화의 매체입니다.
티비에서 다뤄질 만큼 이상한 행위를 하는 사람들은 제가 언급한 저 현실화의 장벽을 넘어서는 사람들입니다.
우리가 물음을 가져야할 지점은 넘어서지 못한다는 사실이 아니라, 저렇게 장벽이 높은데 저걸 넘어서는 사람들은 도대체 누구냐는 문제입니다.
시간도 별로 없고, 어설픈 짓은 하기 싫은, 그런 사람들은 저 현실화의 장벽을 넘어서지 않습니다. 일반화된 관계 맺기 형식으로, 일반화된 강도로 관계 맺지 그 이상의 관계 맺기를 안 한다는 소립니다.
저걸 넘어서는 것은 오히려 특이한, 신비한 사례인 것이죠.
(오를레앙은 돈에 대한 선호가 그렇다고 말하는데, 그 설명 방식은 좀 납득하기 어렵습니다. 지라르를 경유해서 모방 심리로 말하는데, 이건 지라르를 제대로 활용하지 못하는 겁니다. 지라르의 모방 개념을 적극적으로 활용하면 제가 언급하는 광신을 다뤄야합니다)
저런 장벽을 넘어서기 위해서는 과몰입이 필요합니다.
그리고 가능한 과몰입 수단은 현대에는 꽤나 한정적입니다.
즉, 사람들이, 그것도 꽤나 많은 수가 과몰입하게 만들어야하는데, 이게 가능한 사람도 제한적이고, 이런 사람들을 과몰입하게 만들 방법도 제한적이란 것이죠.
이 이중적 제한 속에서 가능한 선택지는 몇 개 안 되는데, 유형화하지 않고 두리뭉실하게 말하면 광신 정치입니다. 이거 말고는 과몰입이 어렵고, 실질적인 행위를 유발하지 못하거든요.
과몰입이 가능한 사람만 실질적인 행위를 할 수 있고, 그런 사람들을 과몰입 시킬 수단은 광신적이라 븅신짓이 나올 수밖에 없단 겁니다.
다른 사람들은 그 정도로 헌신을 못하거든요.
여기서 오를레앙의 돈 욕망 분석이 겹쳐져야합니다. 오를레앙의 돈 욕망 분석은 분명한계적이지만, 굉장히 중요한 핵심 문제를 제기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돈을 통해서 맺는 관계 맺기가, 제가 여기서 얘기하는 인터넷으로 맺는 관계 맺기에 상응됩니다.
“왜 이런 유형의 관계 맺기만 일반적이게 되는 것일까?”
“다른 유형의 관계 맺기를 촉발하려면 어떻게 해야하는 것일까?”
“이런 유형의 관계 맺기만 우세해지는 조건들은 구체적으로 무엇인가?”(선택적 우위, 및 수렴 현상, 우세화 현상: 오를레앙이 지라르를 경유해서 모방 심리로 설명한 부분)
“이런 유형의 관계 맺기에서 이루어지는 거시적인 패턴-오를레앙에게 있어서 현대 자본주의의 표현형들-은 무엇일까?”
따위들이 논해질 수 있기 때문이죠.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불평불만으로 지속되는 공통성은 저항의 양식으로 끌어올리는 데는 한계가 있지만, 그 자체로 연구될 만하고, 이것들이 어떤 기능을 하고 있는 것인지(분노표출 욕구 해소? 공통감 형성? 자신은 합리적이고 비판적인 존재라는 만족감 촉발?), 어떤 기능을 수행할 수 있는지(일종의 적극적 현실화로의 전환 가능한 지점, 허나 내적인 경로들)를 적극적으로 연구하는 것은 매우 중대한 문제일 듯합니다.
또한 제가 언급한 저런 관계 맺기, 그리고 해당 관계 맺기의 특성과 우세화는 이후 메타 버스 등을 다룰 때 적극적으로 끌고 가야할 주제들이라고 생각합니다.
뭐 결국 원점이긴 하네요. 문제는 어떻게 저게 연구가 가능하냐는 것이겠지요... 뭐 그래도 거대 담론적 맥락화에서는 이런 맥락일 수 있을 듯하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