술과 함께 했던 이야기들 보론 - 미독과의 대화
이하 카톡 복분
이래저래 재미난 생각들이 떠올라 말씀드립니다.
지난밤에 같이 얘기했던 주제 중 하나가 환경운동가들의 비의식성이었는데, 여기에 대한 재미난 언어가 있습니다.
클레멘츠의 극상이론에 반대한 멜튼과 이에 동의한 라웁(?)은 재미난 표현을 사용합니다. 클레멘츠를 추종하는 생태이론가들이 “비과학적”일 뿐만 아니라 “비경계적”이라는 것이지요. 여기서 비경계적이라는 것은 생태이론에서 인간을 몰아내고 있을 뿐, 공존을 보여주지 못하고 있다는 것을 의미할 겁니다. 생태적 균형이 까다롭고 복잡한 것이란 것을 주창하며 인간의 모든 간섭을 부정하는 것은 의미가 없다는 것이지요.
저는 이것을 생태학자들이 충분히 생태학적이지 못해서 문제라는 말로 번역하고 싶습니다. 당대 클레멘트의 극상이론은 1930년대 미국을 강타한 모래폭풍 사태와 연관이 있습니다. 미국 전역에 모래폭풍이 불었고, 붉은 낮과 절망에 빠진 얼굴들로 1930년대가 채워졌던 시절이었죠. 생태학자들은 연구를 통해서 이 모래폭풍의 책임이 중부 농부들의 쟁기질에 있다고 주장합니다. 뭐 이것은 사실이겠지요. 하지만 이는 매우 비생태학적인 주장이기도 합니다. 왜냐하면 중부 농민들은 미국에서 가장 가난한 사람들이었고, 바로 그 모래폭풍에 가장 큰 절망에 빠진 사람들이었거든요. 이쪽 출신인 스타인백의 <분노의 포도>에서도 농부들은 피해자이지 가해자가 아닙니다. 그들의 평생을 정당화해줄 가치가 무너진 시점이었고, 토머스 제퍼슨으로 대표되는 농부-개신교-성실함이라는 미국의 뿌리가 흔들리는 상황이었죠. 또한 농부들은 자신들의 자연의 동지라고 생각했지 찬탈자라고 생각하지도 않았습니다.(찬탈치고는 그들에게 떨어지는 이득은 언제나 초라했죠) 이들을 몰아세우는 일은 가장 불합리한 일 중 하나였습니다. 생태환경의 파괴로 인해 그들의 삶이 부정되고 그들의 삶의 기반이 무너지는 상황에서, 그들의 “삶”이라는 추상물을 지지할 마음 속 생태환경을 부정하는 것이였으니까요. 생태학자가 자연의 생태학을 다루는 사람들이지만, 그들 또한 인간이고 인간적 활동을 한다는 차원에서 마음의 생태도 살펴야하는 것이지요. 생태학이 자연의 경계를 교차시키는 경계적 활동을 했던 것처럼, 자연과 인간 사이의 경계적 활동을 해야한다는 말이 될 수 있겠네요.
이러한 마음 속 경계를 떠올리면 다른 것들이 연속됩니다.
제 지인인 한 인류학과의 대학원생 얘기를 해보죠. 이 친구도 학부는 인류학이 아니었는데, 인류학 뽕을 맞고 인류학과에 진학했다가 현타가 와서 석사과정을 끝내고 본국으로 돌아갈 예정인 친구입니다. 이 친구도 석사논문을 써야하고, 그래서 현장을 잡아야하는데, 본인 가족의 고향(본인의 고향이 아닌 가족의 고향...)에 있는 사라질 위기의 학교를 현장으로 잡으면 편할 거 같아서 그렇게 하려고 한다더군요. 재미난 것은 바로 그 고향에 있는 할머니의 반응입니다. 할머니는 손주가 오는 것이 가져오는 즐거움보다, 그곳에 오는 이유에 엄청나게 실망하셨다고 하더군요. 손주가 대학 가면 성공해서 올 줄 알았는데, 대학원에 간다고 했을 때 한번 실망했고(그게 뭐하는 거지? 왜? 여기에서 좋은 직장을 가질 수 있는데?라는 반응이죠), 그렇게 대학원에 갔음에도 이 시골 동네의 별거 아닌 학교를 찾아 돌아온다는 것에 속상해 하시며, 오지말라고 말씀하셨다고 하더군요. 할머니께서는 처음부터 한국 유학을 말려야했던 게 아닐까 하신다더군요.(때문에 제 지인은 고민이 깊어졌습니다)
사실 전 이 이야기를 듣고 심각함보다는 약간 어이없음을 느꼈습니다. 사실 인류학은 “사라져가는 것”에 관심이 많고, 걍 뻔한 현장이라 문제일 수는 있어도 저게 원래 인류학 활동 아닌가?하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지요.
그런데 돌이켜보니 이게 복잡한 난점들로 이어지더군요. 이게 아마 제가 권헌익 샘에게 갖는 불만과도 관련이 있을 거 같습니다.
권헌익 샘의 <전쟁과 가족>은 가족을 다루지요. 샘이 가족을 다루는 것은 가족이 갖는 엄청난 정신적 폭발력을 알기 때문일 겁니다. 반세기 동안 경관이 다섯 번이 변해도 바뀌지 않는 집, 진드기의 침묵보다 더 긴 50년의 세월을 견디게 하는 가족애의 힘을 샘은 알고 계신 거고, 이것들이 “사라져가는 것”이기에 이 문제를 다루시는 거겠지요. 그런데 저는 이 문제에 대해서 한편으로는 이해가 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공감이 되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저에게 가족애는 “사라져가는 것”이라기보다는 이미 사라진 것이거든요. 샘은 전쟁을 겪은 어머니와 함께 살며, 그분들의 마음 속 경관을 간접적으로나마 체험하신 분이시죠. 아마도 그렇기에 그분께서는 어머니의 생존만큼이나 그 경관의 생존 또한 당연한 것일 겁니다. 하지만 그 경관은 저에게 있어 책으로나 보았지 직접 들은 적 없는 신화 속 풍경입니다. 저는 단 한번도 그 경관을 간접적으로도 그 실존을 목격한 적이 없습니다. 그러니 이해는 되지만 공감이 되지 않고, 거기서부터 시작할, 그 속에서 발견될 힘으로 만들어낼 계열이 떠오르지 않습니다. 그날 밤 얘기했던 것처럼 저는 그런 힘들이 보이지 않아 절망에 빠지고 있지요.
그런데 이 문제는 생각보다 일반적인 문제입니다. 최근 소개된 <프롤레타리아의 밤>이나 <랭스로 되돌아가다>로 이 문제를 생각해보지요. 랑시에르와 에리봉은 결국 자신이 “프롤레타리아트”라는 것을 깨닫습니다. 그런데 이것은 좀 웃긴 말이지요. 둘이 프롤레타리아트면 프롤레타리아트지 그게 깨달을 게 되는가 싶은 생각이 들기 때문이지요. 그런데 이들의 사고를 따라가보면 문제는 심각합니다. 둘은 그 삶에서 벗어나려 했고, 그 삶에서 벗어났다고 생각했던 적이 있기 때문이지요. 프롤레타리아트인지 아닌지는 낙인 같은 것이 아니라고 생각했고, 그들과 자신이 다르다고 생각했고, 그래서 그들에게서 떠났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결국 알게 된 것이지요. 자신이 프롤레타리아트였고, 그들을 떠난 적이 없고, 그들과 다른 적이 없었다는 것을. 여기에는 자신이 바꿀 수 있는 그런 정체성이 아니라, 자신과 너무 다르고, 자신과 너무 거리가 있고, 자신이 하나도 친밀감을 느낄 수 없음에도, 그 자신이 운명을 함께 할 수밖에 없다는 감각이 덧붙여 있습니다. 그들은 좋아서가 아니라, 정말로 운명에 의해 어쩔 수 없이, 자신이 그들 중 하나라는 것을 깨달았고, 그렇기에 자신의 삶을 되돌아보게 된 것이지요.
국내의 맑시스트들은 자신들이 어떤 계급이라는 확신이 있는 것 같습니다. 하지만 계급은 이해관계로 구성되는 게 아니라 계급의식을 통해 구성됩니다. 톰슨이 보이려고 했던 것은 계급의식이지 그냥 이해관계를 공유하는 개체들의 혼합이 아니었고요. 계급이 존재한다는 주장에 기초해서 무엇인가를 얘기한다는 것은, 계급이 세상에 존재한다는 것뿐만 아니라, 계급을 이룬다는 것을, 자신이 거기에 속한다는 자기의식에 기초하여 무엇인가를 얘기하는 것을 의미하지요. 그들은 자신들이 그냥 거기에 속한다가 아니라, 속할 수밖에 없다는 것을 말하고, 그 속에서 “우리”를 호명한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허나 국내 맑시스트들이 그런지 전 잘 모르겠습니다.
저는 단 한 번도 계급의식을 가져본 적이 없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의식의 부재는 제가 부자라서 그렇다기보다는 국내에는 계급적 일치를 느낄 경관의 부재 때문인 것 같습니다. 그들과 내가 같은 이익을 공유하는 것이 사실이고, 이를 제가 연구를 통해서 안다고 해도, 이를 느끼고 체험할 징표를 전 본적이 없습니다. 이는 한국인이 외국에 가기 전에 한국인임을 깨닫지 못하는 것과 비슷하지요.(그것이 바꿀 수 없는 족쇄란 것을 깨닫기 위해서는 더욱 많은 것이 필요하고요) 제가 생각하는 경관 상실은 이런 것을 포함하게 되었습니다. 단순히 우주론을 뒷받침하는 자연환경이 아니라, “자신”이라는 것의 경계를 확정하는 목격될 수 있는 환경인 것이지요.
이러한 경관 개념은 생각보다 생태학적입니다. 생태학에서 경관은 그냥 경치가 아닙니다. 전 지구를 기후를 토대로 나누어 이들을 유형화한 것이 경관입니다. 툰드라, 사바나, 열대우림 등이 “경관”입니다. 여기서 생태학적 극상상태가 될 생명군계를 고려하는 것이고요. 경관은 임의적인 게 아니라 매우 구체적인 유형입니다. 특정한 계를 이루는, 굉장히 포괄적이며 구체적인 유형이지요. 우리가 경관을 얘기하기 위해서는 경관들이 가진 이 구체성과 포괄성과 유형의 성격을 먼저 전제해야할 거 같습니다. 그리고 그 속에서 볼 수 있는 것을 어떻게 공유하냐는 생각보다 중요하고, 이 중요성은 “생각보다”로 표현될 수 없을 만큼이나 중요합니다.
요즘 이런 깨달음이 저를 괴롭히네요..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