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략가로서의 데카르트, 작전으로서의 <방법서설>
0. 들어가면서
데카르트의 방법서설은 방법론에 대한 책이다. 하지만 이것이 방법서설을 방법론에 대한 논리적 주장을 담은 책이라고 여기게 만들 이유는 없다. 그 자신 또한 이 책의 제목을 <방법에 대한 논고Traité de la Méthode>로 정하지 않았다. 이는 하나의 소론(Avis touchant la Méthode)으로, 한갓 말하기(discourse; parler)로 쓴 책이다. 그렇기에 이는 이론이 아니라 하나의 실천이다. 이런 말하기의 관점에서 방법서설을 읽을 때, 우리는 방법서설이 하나의 은유를 사용함과 동시에, 그 자체가 하나의 은유임을 알게 된다. 방법(méthode)의 어원이 길(Methodus)이듯, 이 책은 삶이라는 하나의 길을 제시한다. 데카르트 자신의 삶(ma Methode)을 말이다. 그는 이 책을 한편의 자서전처럼 썼다. 그가 어떤 길들을 걸었고, 그 길들 속에서 무엇을 보게 되었고, 무슨 생각을 하였고, 그래서 어떤 길을 선택했는지. 그는 자신이 선택한 길이 “우연히도” 좋은 결과를 냈기에, 사람들에게 이를 알리고자 말을 하고 있다고 밝힌다. 그는 자신이 선택한 길에서 무엇을 발견했는지를 보여주려고 한다. 이는 방법서설이 서문이고, 뒤에 실린 과학적 논고가 그의 발견물이라는 것을 생각하면 더욱 명확해진다. 방법서설은 자신의 발견물들을 소개하기 전에, 자신이 그 길로 들어서게 된 경위를 밝히는 책이다.
하지만 데카르트의 차분하고 조심스러운 말투에 속아, 그의 속임수에 넘어가서는 안 된다. 그는 지금 우리에게 꽤나 대단한 것을 발견했다고 말하고 있다. 그 자체로는 그렇게 대단하지는 않지만, 그 자신(데카르트 본인)의 능력을 고려해보았을 경우 꽤나 놀라운 발견이라고 말하고 있다. 그러한 홍보에 속아 그의 손에 이끌려 그의 길에 들어갈 수도 있다. 하지만 우리가 그러할 필연적인 이유는 없다. 자신의 발견이 대단하다는 것은 모든 발견자의 공통점이다. 우리는 이미 좋은 것을 가지고 있다. 그렇다면 왜 우리가 우리의 길을 이탈하여 그의 길을 구경하겠는가? 데카르트는 겸손이라는 매너의 대가이다. 그의 요청은 거절하기 어렵다. 하지만 그의 겸손, 그의 요청은, 바로 그것을 거절하는 것이 우리의 매너에 어긋난다는 것을 이용한 그의 계략이다. 그는 우리의 길을 규정하는 표지판을 움직여 자신의 길로 진입하게 하려는 것이다. 우리는 바로 이 점에 주목해야한다. 그가 우리의 규칙을 이용해서, 자신의 규칙을 옹호하는 찬탈자라는 것을. 그렇기에 탐구(investigation)를 위해서, 즉, 발자국(vestigia)을 추적하기(investigatio) 위해서 주목해야하는 것은, 그가 실제로 어떤 길을 걸었는가가 아니라, 도대체 그가 어떤 길에서 자신의 (잠재적) 고객들을 유혹해, 어떤 분기점에서 자신의 길로 진입시키고 있는지가 될 것이다. 나는 바로 이것을 쫓으려고 한다.
1. 교양이라는 발자국, 혹은 교양이라는 이정표
데카르트는 부족한 자신이 어떻게 교육 받으며 자랐는지를 말한다. 그는 책으로 공부를 하다가 여행을 떠났다. 여행에서 돌아온 후, 반성(reflection)과 성찰(meditation)을 해보았다. 그러다가 우연히 그의 길을 발견하였다. 그는 책으로 공부하는 일, 독서하는 일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책은 당대의 가장 교양 있는(honest) 사람들과 대화하는 일, 심지어 끊임없이 대화하는 일과도 같다고. 이러한 수사는 이중적이다. 그의 독자들 또한 바로 이 일을 하고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는 독서를 교양 있는 사람들과의 대화로 규정함으로써, 독서자를 교양 있는 사람들로 은근 슬쩍 올리고 있다. 그는 독서를 쌍방적인 대화로 규정하고 있다. 독서는 중세의 수도승들이 생각한 것과 같은 종류의 활동, 단지 기억하고 묵상하는 활동이 아니다. 그것은 일방적으로 수용하는 것이 아니라, 쌍방적으로 대화하는 것이다. 따라서 대화의 상대와 대화의 주체는 상호적이며, 대칭적이다. 그렇기에 독서가 교양 있는 사람들과의 대화라면, 그 독서를 수행하는 이들 또한 교양 있는 사람들이다. 데카르트는 지금 교양 있는 사람들에게 호소하고 있다. 그렇다면 당대의 교양 있는 사람들은 누구였을까?
언제나 그렇듯 모든 언어는 다수적이다. 한 시대에 한 단어가 한 사태만을 가리키는 경우란 없다. 교양 또한 마찬가지이다. 그것은 다수적이다. 하지만 우리는 교양이라는 단어가 사용된 다수적 용례 중에서 중심과 주변을 구별할 수는 있다. 힘은 항상 비대칭적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위치적으로나, 위계적으로나 중심지를 갖는다. 마찬가지로 우리는 상징 권력의 중심지를 들여다봄으로써 당대 교양의 상징 권력적 사용의 한 단면을 관찰할 수 있다.
17세기는 궁정사회였다. 하지만 궁정사회의 구성원은 궁정인으로 국한되지 않았다. 궁정 사회의 구성원은 사실로서의 자격으로 규정되는 것이 아니라, 규범적인 자격으로 규정되었다. 바로 교양이 그것이다. 17세기는 ‘교양’과 ‘교양인’이라는 단어가 범람했던 시대이다. 많은 이들이 교양인이 되고 싶어 했다. 많은 책들이 교양인이 되는 법을 가르쳤다. 그 시대에 글을 읽는 사람들에게 있어 교양인이 되는 것은 단지 궁정인이 되는 것을 뜻하지 않았다. 교양인이 되는 것은 진정한 인간, 인간다운 인간이 되는 것을 뜻했다. 우리는 여기서 데카르트가 누구를 유혹하고 있는지를 알 수 있다. 그는 교양인이 되고 싶어 하는 사람들, 그래서 그에 걸맞게 책을 읽는 사람들을 유혹하고 있다. 그는 성직자나 대학 내의 박사들이 아니라, 일반 독자들을 유혹하고 있다. 그렇다면 데카르트는 왜 이들을 유혹하려고 하는 것일까? 그들은 어떤 사람들일까? 이에 대답하기 앞서 우리는 사회사적으로는 그들의 정체를 밝힐 필요가 있다.(이 또한 엘리아스에 따른 정리이다) 궁정 사회는 중앙 집권의 결과이자 원인으로서, 서로 다른 종류의 수많은 권력들이 (분열이 아니라) 통합을 이룸으로써 이뤄낸 “결합태(figuration)”이다. 그리고 엘리아스는 이러한 결합태가 특정한 누군가의 의도로 인해 형성된 것도, 역사 진행의 법칙에 의해 형성된 것도 아니지만, 이러한 결합태가 성립하기 위해서는 말이라는 기호에 국한되지 않는, 굉장히 포괄적인 종류의 규범적 커뮤니케이션 체제가 확립되어야한다. 바로 이것이 “문명”이다. 하지만 우리는 이제 사회사에서 벗어날 필요가 있다. 도대체 저런 가치규범들, 그것들을 지탱하는 언어들의 정체는 무엇인가? “문명”, 가치를 함축하는 커뮤니케이션 체제는 어떤 언어를 통해 가치를 형성하였는가? 나는 이 질문을 답함으로써 데카르트의 전략, 데카르트의 작전을 밝혀보겠다. 1
2. 나는 누구인가?
“나는 누구인가?” 이런 질문은 소위 “근대 철학”이라고 불리는 것을, 혹은 “근대”라고 불리는 것을 떠올리게 만든다. 주체의 탄생, 개인의 탄생 따위로 불리는 그런 것 말이다. 그리고 그에 걸맞게 데카르트는 다음과 같은 말로 유명하다. “나는 생각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 그리고 우리는 이 말 뒤에는 다음과 같은 말을 덧붙인다. “데카르트에게 있어 진정한 자기 자신은 생각하는 주체로서의 나였다.” 이러한 우리의 상식이 옳고 그름을 따지기 전에 우리는 다음과 같은 것을 물어볼 필요가 있다. 도대체 그럼 그 전에 나는 누구였을까?
미국의 문화사가 Brigitte Miriam Bedos-Rezak가 쓴 when ego was imago라는 책이 있다. ego가 나를 가리키는 말인 것은 잘 알 것이다. 그렇다면 imago는 무엇인가? 이마고는 이미지image의 어원이 되는 말로, 거울상 따위를 뜻한다. 우리는 이 이미지란 말을 허상을 가리킬 때, 실재가 아니라 물리적인 기제들에 의해 단순히 감각적으로 불러일으켜지는 효과를 가리킬 때 쓰곤 한다. 이미지들을 다룬다고 하면, 그것은 실재보다는 환상을 다루는 것만 같은 인상을 주곤 한다. 하지만 우리는 중세의 언어 속에서 이미지를 뜻한 이마고가 실재를 가리킬 때 쓰였다는 것을 목격하게 된다. 그리고 우리가 오늘날 사실을 그대로 담는다고 생각하는 사진picture의 어원이 되는 pictura가 가상적인 것을 뜻하고 있다는 것을 목격하게 된다. 하지지만 중세에도 pictura는 눈에 그려지는 것을 뜻했다. 그렇다면 이러한 가치의 뒤바뀜은 어디에서 비롯된 것일까? 왜 픽투라가 아닌 이마고가 진상(眞相, 혹은 眞象)을 뜻했을까? 2
실재는 그 자체로 주어진 것이 아니라 우리의 사고를 통해 파악되는 것이다. 중세의 신학적-형이상학은 이마고와 픽투라의 지위를 거꾸로 둘 수밖에 없는 체계였다. 신은 빛의 근원으로서 사랑으로써 자신의 빛을 사방팔방 유출한다. 신의 피조물들은 스스로 빛나는 존재는 아니지만, 바로 이러한 빛으로 존재하게 된다. 하지만 우리가 알다시피 세상의 존재들은 다 다르고, 그 가치도 다 다르다. 이를 설명해주는 것이 바로 신의 빛과 피조물의 관계이다. 여기에 거울이라는 은유가 등장한다. 한편으로 거울은 모든 상을 비추는 신비한 물건이다. 여기서 비춘다는 특정한 활동은 수동적인 의미가 아니다. 오늘날에는 거울은 그저 수동적으로 상을 비추는 것이지만, 고대에는 바로 그 거울이 상을 만들어내어 비추어낸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거울은 (문자 그대로) 모든 것을 담고 있기도 하고, 모든 것으로 변할 수 있는 것이기도 하며, 그렇기에 그것은 다른 세계의 존재를 함축하는 것, 혹은 그 세계로 넘어가는 통로로 여겨지곤 했다. 신의 빛을 받은 존재들의 형태적인 차이와, 가치적인 차이는 이러한 거울의 특징을 통해 설명되었다. 우리가 다 다른 것은 거울들이 어떠한 상을 그려내듯이, 그 거울이 신의 빛, 신의 힘의 도움으로 무엇인가를 드러낸 것으로 설명되었다. 그리고 그들의 가치 차이는 거울들의 수준 차이로 설명되었다. 수준 낮은 거울이 흐릿하게 형상을 그려내고, 희미하게 빛을 비추듯이 수준 낮은 개체는 신의 빛을 흐릿하고 희미하게 드러내고, 수준 높은 거울이 선명하게 형상을 그려내고, 찬란하게 빛을 비추듯이 수준 높은 개체는 신의 빛을 선명하고 찬란하게 드러낸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사고는 위계 지어진 세계관으로 연결되었다. 물질세계에서 감각을 통해 나라는 영혼에 그려진 상은, 정신적으로 떠올려낸 상보다 수준이 떨어진다는 것이다. 이런 방식으로 이마고들로 위계 지어진 존재의 질서가 확립된다. 또한 무엇을 마음으로 품는지에 따라 인간의 가치는 정해진다. 3 4
이마고들의 질서와 그것들을 인식/느낌은 중세 내에 자신의 정체성과 자신의 가치를 결정하는 가장 중요한 (대수학과 같은 이론적인) 변환 장치였다. 그리고 이는 르네상스를 거치면서 급격하게 변화하기 시작한다. 이러한 질서를 지탱하는 물질과 그 물질에 대한 이해가 바뀌었기 때문이다. 한편으로 거울은 유리거울의 등장하면서 새로운 형태를 갖게 되었고, 다른 한편으로는 이러한 새로운 도구와 발전된 수학적 방법에 의해 거울이 거울상을 비추는 현상을 설명하는 새로운 이론(광학)이 탄생하게 된 것이다. 중세 신학 체제 내부의 변화, 새로운 물질의 발견, 새로운 이론의 탄생 각각이 야기한 변화들이 상호작용하면서 어떤 지형도를 그리는지는 여기서 다루지 않는다. 우리는 여기서 중요한 것만을 확인할 필요가 있다. 르네상스에 이르러 변환 장치 또한 크게 변화한다. 변환 장치 안에 주관과 객관이 들어온 것이다. 이전에도 객관 비슷한 것은 있었다. 이마고의 질서가 객관적인(대상적인) 것이 아니면 무엇이겠는가? 중요한 변화는 주관의 도입이다. 그리고 그것은 단순히 도입된 것이 아니라, 재귀적인 구조를 이루며 도입된다. 즉 주관은 객관을 이루는 것으로서, 객관은 주관에 의해 구성되는 것으로서 도입된다. 주관과 객관의 상호 변환 가능성이 변환 장치 내의 가장 중요한 본질이 되는 것이다. 5 6
이러한 재귀적 구조의 예는 원근법이다. 원근법은 주관의 자리로, 공간을 객관화한다. 즉 특정한 관점(시점; perspective)을 정하고 사물들은 이 시점에 의해 배치된다. 이 과정에서 사물들의 형태는 변형되는데, 원근법의 핵심은 이러한 변형이 임의적인 것이 아니라, 법칙적으로 결정된다는 데 있었다. 즉, 배치가 자의가 아니라, 보편적으로 파악할 수 있는 질서에 의해 이뤄지며, 자신의 관점은 보편적인 질서를 주관화한 것이지만, 이는 변환 규칙을 통해 다시 객관화될 수 있으며, 이는 또 다른 변환 규칙을 통해 다른 관점으로 주관화될 수 있는 것이다. 이 변환가능성, 다른 관점들을 포섭할 수 있는 가능성, 이것이야말로 원근법의 핵심이었고, 원근법이 주관이란 것, 나란 것의 위치를 정할 수 있게 만들어 준 토대라고 할 수 있다. 보는 것과 보이는 것은 구별, 가치 있는 이마고와 가치 없는 이마고의 구별은, 이제 교회에서 정한 특정한 이마고들의 질서들에 의해 구별되는 것이 아니다. 보는 것과 보이는 것이 상응할 수 있는 것, 그런 것만이 진정한 존재일 수 있다는 조건이면 충분해진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조건을 성립시킬 수 있는 것은 원근법만 있는 것이 아니었다. 보는 것과 보이는 것을 일치 시키는 시스템은 여럿일 수 있으며, 이를 통해 긍정되는 이마고도 여럿일 수 있다. 궁정사회라는 시스템과, 교양이라는 이마고도 바로 이 여럿 중 하나였다. 7
3. 궁정사회라는 프로그램의 가치 코드
“베르사유에는 벽에도 눈이 달렸다.” 벽에 달린 눈, 그것은 바로 거울이다. 거울이 눈이라는 것은, 이전에도 흔한 사고방식이다. 그것은 단순히 내가 보는 도구가 아니라, 어떤 상을 비춰내는 신비한 힘을 가진 무엇, 다른 세계와 연결될 수 있는 위험한 무엇, 내가 그것을 통해 보듯, 다른 이도 그것을 통해 보는 무엇이었다. 하지만 이제 이러한 마법적인 신비한 힘은 소멸되고, 세속적인 신비한 힘으로 변하기 시작한다. “자신을 교양인의 시선에 내놓기 원하게 되는 것, 그것이야말로 진정한 교양인이 되는 것을 뜻합니다.” 교양인이 되는 일은 시선과 관련이 있다. 그것은 자기가 자기 자신을 보는 것을 넘어서, 자기 자신을 보이게 만드는 것을 뜻한다. 교양인은 집단이자, 개인이기에, 교양인이 된다는 것은, 교양인이라는 집단의 분신이 되는 것이자, 교양인이라는 집단은 교양인이라는 개인의 분신이 된다. 이러한 규범이 궁정사회와 교양이라는 이마고가 앞서 언급한 보는 것과 보이는 것을 상응시킬 수 있게 한다. 이러한 사회에서 개인은 자신을 소멸하는 것으로써 자신의 역할을 수행하게 된다. 진정으로 자연스러운 것, 감정의 진실성, 편안함, 우아함은 교양을 수행하는 것으로서만 드러나게 된다. 그렇기에, 자연스러운 것, 감정의 진실성, 편안함, 우아함은 자기 자신이 됨으로써가 아니라, 자기 자신을 버림으로써 획득되는 성질이 된다. 즉 누가 얼마나 자연스럽게, 진실하게, 편안하게, 우아하게 궁정사회의 매너를 따르느냐가 바로 해당 덕의 징표가 된다. 그래서 아이러니가 발생한다. 가장 우아한 사람, 가장 편안한 사람, 가장 진실한 사람, 가장 자연스러운 사람은 자신이 그러하다는 것을 모르는 사람인 것이다. 교양인에게 있어 진정한 자기 자신이란 그렇기에 교양인이라는 집단 안에서의 질서에 의해 결정된다. 그들에게 있어 진정으로 존재하는 것은 교양인이라는 집단 안에서 보는 것/보이는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교양인에게 “나”는 새로운 종류의 “이마고”이다. 바로 교양인 집단 안에서의 특정한 표징, 바로 평판이다.
교양인들에게는 무수한 매너가 있다. 하지만 진정으로 중요한 것은, 그 매너가 무엇을 위한 것인지는 중요하지 않다. 매너는 그 자체로 목적이 된다. 매너 그 자체가 중요하고, 매너 그자체가 평가한다. 그것은 매너에 대한 반응이 아니라, 그러한 평가 또한 매너에 의한 것이다. 이러한 커뮤니케이션 시스템에서 진정으로 중요한 것은 보이지 않는 것이 아니다. “보이지 않는 것은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이기 때문이다. 궁정사회 안에서 보는 것과 보이는 것은 일치하며, 일치해야만 한다. 평판은 보는 것과 보이는 것의 일치이다. 따라서 다음과 같은 말 또한 당당히 주장된다. “나의 거울과 나의 평판만이 진실하다.” 이러한 세계 속에 보이지 않는 것, 비밀인 것, 나의 내면에 있는 것, 나의 본 모습인 것 따위는 중요하지 않게 된다. 이런 것들은 중요하지 않은 것을 넘어서, 없어져야만 할 것처럼 여겨진다. 비밀은 비밀이어서는 안 된다. 비밀은 모든 사람에게 보이는 것일 때만 비밀일 수 있으며, 모든 사람에게 보이지 않는 것은 비밀조차 아닌 것이다. 그것은 그냥 진실이 아니다. 나의 내면에 있는 것, 그것은 매너에 어긋난 것, 교만, 인색 , 시기, 분노, 음욕, 식탐, 나태와 같은 것이다. 그것은 제거되어야만 하는 것이며, 그것들이 제거되어야만 소통 가능해진다. 소통 가능한 것, 그것만이 진정으로 나를 표현할 수 있게 만드는 것이다. 나의 본 모습, 옷을 벗은 나의 모습, 그것은 나를 감추는 진정한 악이다. 나를 드러내는 것, 그것은 배우가 무대 뒤로 가지 않고, 무대 위에서 옷을 갈아입는 것과 같은 행위이다. 그런 모습을 남에게 들킨 자는 저주 받는다. 그의 약혼녀는 그의 모습에서, 그 사람의 “얼굴을 알아보기 어려울 정도”의 추함을 보게 되고, 결혼은 깨지게 된다. 옷을 벗은 모습, “육체는 사람들을 분리시키는 것에 불과하다. 사람들을 연결하는 것은 바로 옷이다.” 벌거벗은 모습 그것은 수치를 불러일으킨다. 교양인은 항상 교양인에게 자신을 내놓아야한다. 내놓을 수 없는 것은 수치스러운 것에 불과하다. 교양인의 도덕감, 악의 감정은 그렇기에 수치심이다.
교양인들은 수치심의 도덕을 따른다. 그렇기에 그들이 따르는 진정한 덕이 ‘médiocrité’인 것은 우연이 아니다. 그들에게 있어 진정으로 값진 것은 튀는 것일 수 없다. 튀는 것은 보는 것/보이는 것을 교란시킨다. 그것은 개인과 집단 사이의 변환 공식을, 주관과 객관 사이의 변환 장치를 교란한다. 좋은 것은 소통의 코드가 되는 것이어야만 한다. 그렇기에 소통 코드에 모두 들어맞는 것, 매너에 완벽히 부합하는 것, 매너에 부합하는 것이 완벽히 자연스러운 것이 최상의 경지다. 그렇기에 아무것도 아닌 것이, 진정으로 가치 있는 것이 된다. 그것은 투명한 거울과 같이 자신을 지우고, 자신이 비추는 것을 비추는 것으로서 자신의 존재를 드러내는 존재와도 같다. 우리는 여기에서 고전적인 언어들, 중세의 신학 언어들의 변용을 발견한다. 중세 신학에서 거울의 비유 또한 같은 방식으로 덕을 정의했다. 자신을 투명하게 만들어 신의 빛을 비추는 것으로서 존재하는 것, 그것이 최상의 존재 방식이었다. 투명한 거울, 그것이 천사의 이마고이다. 하지만 이러한 공식은 완벽하게 바뀐다. 자신을 지워 무엇인가를 비추는 것, 거울이 하는 기능인 reflection, reflection의 최고 형태 meditation의 의미가 완벽히 바뀌어 버렸다. 반성과 성찰을 통해 존재를 고양시켜 투명하게 신을 비추는 존재에서, 광학적 반사를 통해 규정되는, 상상 속에서 성립하는 교양인의 세계에 자신의 투영함으로써, 자신을 투명하게, médiocrité하게 비추는 존재가 되는 것은 너무나도 큰 변화이다. 그리고 우리는 이러한 진단 과정에서 데카르트 특유의 철학 언어를 찾을 수 있다. reflection과 meditation이 바로 그것이다. 8
4. 유혹자 데카르트
20세기의 많은 철학자들이 근대 철학을 비판했다. 그리고 당연히도 그들은 데카르트의 철학이야말로 악의 근원이라고 말하곤 했다. 그들은 데카르트가 주체만을 존재하는 것으로 만들어, 사물이란 것을 무화시켜버렸다고 주장했다. 그들에게 데카르트는 유아론자, 자신이 머릿속으로 생각 맞는 것이 진리고 그렇지 않은 것은 진리가 아니라고 믿는 소위 “안락의자의 철학자”의 전형이었다.(심지어 이 표현도 데카르트의 표현에서 따온 것이다) 하지만 데카르트 또한 근대적 변환 장치, 주관과 객관의 변환가능성을 통해 철학 체계를 세운 철학자이다. 그는 자신이 생각할 때 맞는 것으로 생각되는 것이 맞고, 그렇지 않은 것이 틀리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그의 기준은 바로 변환가능성, 주관적인 생각 중 객관적으로 제시될 수 있는 것만이 (옳은 것의 기준도 아니고) 진정으로 생각이라고 여겨질 수 있고, 어떤 것이 진정으로 객관적인 생각이라면 누구에게나 생각될 수 있어야만 한다는 것을 기준으로 삼았을 뿐이다. 그는 사물을 제거하기 위해, 타자를 배제하기 위해 자신의 철학을 만든 것이 아니라, 사물을 제대로 다루기 위해, 타자와 함께 하기 위해 자신의 철학을 만들었다. 그리고 바로 이 특징, 주관과 객관의 변화 가능성을 데카르트와 교양인이 공유하기에 데카르트는 그들을 설득의 대상으로 삼았다. 그들은 이 점에서는 같은 규칙을 공유하고 있으며, 바로 이들을 설득할 수 있는지가, 자신의 생각이 객관적인 것인지를 아닌지를 보여주는 판단의 기준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는 교양으로 사람들을 끌어들인다. 그리고 자신의 매너를 뽐냄으로써, 자신이 잘난 사람이 아니라 평범한 사람이라는 것을 완벽히 매너 있게 밝힘으로써 사람들을 유혹한다. 그는 조심스럽다. 하지만 이것은 그의 성격이 조심스러워서 그런 것만은 아니다. 그들을 유혹하려면 튀어선 안 된다. 그는 잘나지 않은 사람, 하지만 상식이 있고, 예의 바르고, 매너 있는, médiocrité을 갖춘 사람이어야만 한다. 그래야만 그들에게 호감을 얻을 수 있다. 동시에 그는 단순히 médiocrité하기만 해서는 안 된다. 그래서는 그들을 변화시킬 수 없다. 그는 평범하면서도 특별해야만 한다. 그는 자신의 삶을 아주 평범하게 그린 후, 자신의 불만족을 고백한다. 하지만 이것은 특별한 불만족이 아니다. 남들이 다 겪는 불만족이고, 그 또한 남들과 특별히 다르지 않은 이 길과 저 길을 방랑했다고 고백한다. 그는 그러한 방랑 속에서 아주 평범한 진실들을 발견했다고 말한다. 이 진실은 너무나도 평범하고, 너무나도 흔해 빠진 진실이다. 사람 사는 것, 사람 생각하는 것은 모두 거기서 거기라는 닭아 빠진 진실. 책도 여행도 그를 만족시킬 수 없었다. 하지만 그것은 그가 무식해서도, 똑똑해서도 아니다. 그가 못나서도, 잘나서도 아니다. 오히려 그는 평범했기 때문에 만족하지 못했다는 것이 그의 은밀한 속삭임이다. 그는 평범함을 무기로 평범한 이에게 걸맞은 평범한 욕망을 불어넣기 시작한다. 하지만 그것은 평범한 욕망이 아니다. 그 뒤에 가장 큰 욕망이, 엄청난 욕망들이 숨겨져 있는 그런 욕망이다.
그는 “우연히” 그저 한번 공상적으로 반성을 해봤고, 성찰을 해봤다고 말한다. 반성과 성찰에 그가 특별한 의미를 부여하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때가 맞아 한번 해봤을 뿐인 시도였다. 그러한 시도는 평범한 사람들에게도 잘 맞을 그런 종류의 것이다. 갈 곳 없을 때, 딱히 할 게 없을 때, 겨울 날 벽난론 옆에 앉아 지루한 시간을 보내고 있을 때, 그럴 때 공상 한번 해보는 게 무엇이 그리도 나쁜 일이란 말인가. 그는 그렇게 공상으로 초대한다. 그는 적절히 핑계를 댄다. 그런 일이 범죄도 아니고, 그렇게 한번 생각해본다고, 다른 모든 세상의 질서를 부정하는 것이 되겠냐고. 그는 이것이 아무 일도 아닌 것처럼 말해, 그의 독자들을 공범으로 만든다. 그의 성찰은 단순하다. 세상의 모든 규칙을 지운다. 그렇게 수많은 세상의 법도들이, 매너들이, 지워진다. 지워지는 것은 아리스토텔레스 형이상학만이 아니다. 수학적 규칙들만이 아니다. 그것은 매너 또한 잠시 잊게 한다. 그리고 매너가 지워짐으로써, 이제 그의 독자들, 교양인들은 교양인들의 시선에서 해방된다. 그들을 보는 시선은 이제 아무것도 없다. 그들은 그들이 숨겼던 바로 그들 자신이 잠깐 된다. 데카르트는 안다. 그들이 이런 상태를 불안하게 여길 것이란 것을. 그들은 시선 없이는, 아무 것도 자신을 보지 않고는 살 수 없는 존재이다. 수치심을 만들어내는 교양인들의 시선이 괴로울 때가 있을지라도, 그들은 교양인들의 시선을 버릴 수 없다. 바로 그들의 시선이 자신을 완성시킴으로써, 그들을 사랑받을만한 존재로, 존경받을만한 존재로 만들어주었고, 그들을 사랑받는 존재로, 존경받는 존재로 만들어주었기 때문이다. 시선이 교차하는 곳, 보는 것과 보이는 것이 교차하는 곳, 그곳에서야 진정한 존재가 탄생한다. 그 마음을 데카르트 또한 잘 안다. 그래서 그는 그의 독자들에게 잠시 잊고 있었던 존재를 끄집어낸다. 바로 신 말이다. 신은보고 계신다. 쿠사누스의 말처럼 말이다. “신의 눈은 당신을 놓치지 않고, 언제나 함께 하십니다.” 이렇게 한 고비를 넘긴다. 교양인들의 시선을 신의 시선으로 바꿈으로써 말이다. 이제 적극적인 전략들이 나올 차례다. 신의 보살핌으로 만족했다면, 그들은 교양인이 되고 싶어 하지 않았을 것이기 때문이다.
데카르트는 이제 곧 그들의 욕망을 자극하고, 멋진 발견물들을 선보일 것이다. 그것이 교양인들의 욕망에 걸맞은 진정한 욕망의 대상일 것은 그때 가면 밝혀질 것이다. 그 전에 그가 밝혀야할 것이 있다. 바로 대상을 발견하는 규칙이다. 교양인들에게는 매너가 있었다. 평판을 만드는 것, 그들에게 어떤 것이 무엇인지를 알려주는 것은 모두 매너였다. 이제 매너를 다른 것으로 바꿀 차례이다. 데카르트는 고루해진 한 언어를 끄집어내려고 하는 것 같다. 그는 이 단어를 쓰지 않는다. 하지만 그가 하는 작업은 과거의 그 단어로 표현되는 작업과 많이 닮았다. 그 단어, 그 작업은 바로 사변, speculation이다. 이 단어는 거울을 뜻하는 speculum에서 왔다. 사변은 거울을 들여다보는 일이다. 하지만 잊어선 안 된다. 중세의 모든 지적활동은 거울을 들여다보는 일이었다. 그렇다면 사변은 무엇일까? 그것은 한번 생각해보는 일이다. 경험 속에서 얻어지는 원인과 결과를 파악하며, 그 사이에 무엇인지를 생각해보는 일이다. 그리고 괜찮은 무엇인가가 떠오르면 적용해보는 것이다. 그렇게 사변은 한편으로는 추론을 한편으로는 관찰을 뜻한다. 그리고 이것들이 적절하게 일치 될 때, 그것은 meditation으로 부르는 경지에 오르는 것이 된다. 데카르트는 공상을 이것과 연결한다. 한번 해봤는데, 그게 더 잘 되면 좋은 것이 아니냐는 것이다. 그렇게 그는 평가의 기준을 바꾼다. 적절한 규칙은, 시행되고 있는 규칙이 아니다. 오래된 규칙이 아니다. 남들 모두가 따르는 규칙이 아니다. 그것은 한번 생각해봤을 때, 적절한 것, 단순하면서도, 설명력과 예측력이 뛰어난 그런 것이다. 그것이 공상의 매너이다. 그는 바로 이 기준이 신의 기준이지 않겠냐고 속삭인다. 신은 우리처럼 몸을 써서 세상을 만들지 않았을 것이다. 그것은 위대한 신을 초라하게 만드는 신성모독일 것이다. 신은 전능하기에 생각 한번으로 창조했을 것이다. 하지만 전지한 신의 생각은 우리가 포착할 수 있는 종류의 것은 아닐 것이다. 우리는 짐작도 못할 수 있는 그런 것일 수도 있다. 하지만 다행이도 우리는 신에 대해 하나 더 아는 게 있다. 신은 전선한 존재이기도 하다. 그렇다면 신은 이상한 일은 안 할 것이다. 그렇다면 신은 쓸데없이 낭비하지도 않을 것이다. 단순성. 그것이 신의 규칙이다. 뭔지 모르겠지만, 적어도 신은 단순히 할 것이다. 그러니 생각해보고 단순한데 설명력과 예측력은 같은, 효용이 같은 그런 규칙이 있으면 그것이 복잡한 것보다는 더 진실일 것이다. 그것이 신의 방식인지는 우린 모르지만, 적어도 그게 더 나은 것은 분명하다.
그는 교묘한 유혹의 속삭임으로 그의 독자들을 과학의 늪에 빠뜨린다. 불경하고, 헛된 호기심에 빠져있고, 약간은 튀는 그런 사람이 되게 만든다. 그렇게 공상은 계속된다. 그리고 너무나도 단순한 규칙들이 꽤나 어려워 보이는 문제들을 척척 설명하는 것을 보게 된다. 뭔지는 모르겠지만, 이게 무슨 쓸모가 있는지 모르겠지만, 일단 단순한 몇몇 주인공들이, 단순한 규칙들로 복잡한 무엇인가를 척척 해내는 것을 보게 된다. 놀랍다! 하지만 데카르트는 여기서 침착하게 그들에게 마지막 유혹을 던진다. 그는 우쭐하지 않는다. “평범한 편이긴 한데, 평범한 것보다 약간 부족한 머리를 갖고 있는 내가 조금 공상해서 이런 것을 했으니까 말이야...” 그는 자신의 평범함을 과시한다. 과시하는 것, 그것은 모두에게 보이는 것을 뜻한다. 그는 평범한 사람임이 분명하다. 평판은 거짓일리 없다. 그는 진실로 평범하다. 하지만 약간 부족하다. 그는 약간 모자른 정도의 평범함을 가진 사람이다. 근데 저 정도를 했다. 평범함을 사람이면 저것보다는 잘할 것이다. 그는 평범한 사람이 되고 싶어 하는 사람들을, 평범하다고 자부할 사람들을 유혹한다. 할 일 없을 때, 이것도 해보는 게 좋지 않겠냐고. 그러면서 이렇게 덧붙인다. 자신은 스콜라 철학자들의 말은 어려워서 뭔 소리인지 하나도 모르겠고, 그냥 평범한 사람으로서, 평범한 얘기를 했을 뿐이라고. 근데 게으른 것도 죄니까, 삶에 충실해야하니 이 정도를 하면서 세상에 기여하는 것은 적절함에 맞는 그런 것 아니냐고. 그는 유혹한다. 게으르지 않고, 삶에 어느 정도 충실해야하는 사람들을, 그들에게 헛된 것을 불어넣는다. 하지만 그 헛된 것, 공상이 나쁜 일로 빠지진 않는다. 그것은 나쁜 일로 빠질 만큼 대단한 것이 아니다. 하지만 이제 공상은 우연히 마주쳐서 한번 해본 게 아니게 된다. 이제 언제든 허용되는 것으로서, 교양인의 시선에서 벗어난 것으로서 제시된다. 은밀한 것, 하지만 그것이 교양인의 지위를 해치는 것은 아닌 것, 어쩌면 그것이 교양인에게 적합한 무엇인가일 것도 같은 그런 것으로 그는 자신의 철학을 소개한다. 그는 앎에 대한 욕망을, 자연을 해석하는 마법사가 되고자 하는 그 큰 욕망을, 아무렇지도 않게,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그저 평범한 사람 모두에게 다 어울리는 것인 것 마냥 불어 넣는다. 그는 앎이 아니라, 앎의 욕망을 불어넣는다.
4. 근대 철학의 아버지 데카르트 - <방법서설>의 피안
그렇게 앎에 대한 욕망이 불어넣어진다. 이렇게 불어넣어진 앎, 이것이 라깡의 말처럼 다른 모든 욕망을 억압하고, 다른 모든 시선을 억압하는 그런 종류의 억압일까? 아니다. 궁정사회에는 궁정사회의 시선이 있고, 궁정사회의 억압이 있다. 모든 시선은 억압을 만들어낸다. 그는 오히려 억압을 거부한다. 궁정사회의 억압들을 말이다. 그가 유혹하는 대상, 그의 독자들, 교양인들, 궁정사회의 매너에 갇힌 이들을 짓누르는 억압들에서 그들을 꺼내려고 한다. 어떻게? 궁정사회에서의 금기, 자신에게 고유한 무엇, 사유를 궁정사회의 억압에서 빼내려고 한다. 사유정도야 튀는 것도 아니다. 그러니 그 정도는 위반이 아니다. 그렇게 그는 매너의 감옥의 약한 부분을 뚫고 죄수들을 탈출시킨다. 하지만 탈출한 죄수들은 이제 다른 욕망도 갖는다. 매너에서 벗어나는 과도한 욕망들에 노출된다. 탈출한자는 이제 모든 유혹에 굴한다. 그는 욕심 가득한 존재가 된다.
데카르트의 조심스러운 문체에 속으면 안 된다. 그는 뻔뻔한 주장을, 뻔뻔한 욕망을 드러낸다. 그는 자연을 탐구하는 일이, 앎의 나무가 세 가지로 뻗어 나가는 것을 보여준다. 기계학, 의학, 도덕으로. 그것들이 어떻게 잘 될지는 아직 모른다. 하지만 한 가지 확실한 것은 그것이 앎에 대한 욕망에서 뻗어나간 가지라는 것이다. 그것들 또한 허용된다. 하지만 이 가지들의 끝에 가장 큰 악들이 숨어 있다. 기계학, 그것은 노동으로부터의 해방을 꿈꾸게 한다. 의학, 그것은 죽음로부터의 해방을 꿈꾸게 한다. 도덕, 그것은... 그것은 그가 마지막으로 얘기하는 최종 단계의 꿈이다. 그것은 인간을 바꾸게 한다. 과학적 도덕, 그것은 죄로부터의 해방을 꿈꾸게 한다. 그는 뻔뻔하게 자신의 꿈을 밝힌다. 그것이 언제 올지 모르는 어떤 공상인 것처럼 하지만 그것은 공상이 아니다. 그것은 꿈이다. 그것은 욕망이다. 그것은 실천을 불러일으킨다. 그는 그렇게 사람들이 욕망을 갈구하게 만든다. 모든 나쁜 것으로 해방되고, 즐거운 삶을 즐길 수 있는 존재로서 말이다. 그는 해방을 꿈꾸며, 해방된 세계에는 인간들의 유희만 남는다. 그는 그렇게 신성모독을 한다. 선악과를 따먹은 최초의 인간들은 자의식과 함께 벌거벗은 몸에 수치를 느꼈다. 하지만 이제 이는 궁정사회의 옛 규칙에 불과하다. 우리는 이제 수치가 아니라 욕망을 느낀다. 우리는 새로운 것을 제작한다. 우리는 투명한 거울이 된다. 하지만 이제 빛은 신에게 돌아가지 않는다. 우리가 원하는 방향으로 간다. 거울에서 비추는 빛은 되돌아가는 것이 아니라, 앞을 비춘다. 그것은 앞을 향한 빛, 계몽의 빛이다. 이렇게 데카르트는 계몽의 선구자가 된다. 그는 욕망을 긍정한다. 그는 그저 관조로서의 앎을 추구하지 않는다. 그는 앎을 통해 우리의 욕망을 실현시킬 실천으로 나아간다. 그렇게 그는 계몽철학자가 된다. 9
믿기지 않을 것이다. 주의주의자인, 경건한 기독교인인 데카르트가 그럴 일 없을 것이라고. 하지만 곰곰이 잘 생각해보자. 그가 속인 게 아닌지를. 우리가 속은 게 아닌지를, 그는 자신의 형이상학이 사람들에게 새로운 과학을 받아들이게 만들 것이라고 말한다. 학자들은 이 말을 강하게 읽는다. 그의 형이상학이 그의 과학 이론을 함축하기 때문에, 그의 형이상학이 맞으면, 그의 과학 이론도 맞다는 것이다. 하지만 요지는 그것이 아니다. 그의 형이상학은 두 가지를 함축한다. 앎에 대한 강렬한 욕망, 즉, 추론과 실험에 입각한 새로운 방식의 실천. 다른 하나는 그의 주의주의적 이신론이다. 신의 초월성은 얼핏 보기에는 그의 과학과 모순되어 보인다. 하지만 신의 초월성이야말로 이러한 욕망들의 보증수표이다. 만약 그의 과학 이론과 다른 이론, 좀 더 단순하고, 설명력과 예측력을 더 가진 이론이 등장하면 어쩔 것인가? 데카르트는 그것이 “더 진실이라고” 말할 셈인 것이다. 그는 신의 의도를 숨김으로써, 무엇이 정답인지에 대한 기준을 그가 제시하고 있는 “새로운 실천”에 맡기고 있다. 새로운 실천이 기준이다. 결국 정답의 기준은 누구도 모르는 신의 마음이 아니라, 설명력과 예측력, 단순성, 효용이다. 그렇게 쓸데없는 논쟁, 신에 대한 논쟁은 사라진다. 어떤 것이든 그것이 설명력과 예측력, 단순성과 효용성을 목적으로 한다면 용인된다. 쓸데없는 것, 광신만 아니면 된다. 쓸모 있기만 하면, 효율을 따지기만 하면 용인된다. 그렇게 그는 모든 것을 용인하는, 인간의 욕망을 마음껏 펼치는 세계로 나아가려고 한다. 이 세계는 데카르트 혼자만의 것이 아니다. 욕망을 가진 모든 인간의 것이다. 데카르트는 유아론자도, 타자를 배제하는 자도, 주체의 사유에 매몰된 자도, 모든 것을 신의 의지에 맡기는 자도 아니다. 그는 욕망하는 자고, 그 욕망을 실현시킬 도구를 발명하는 자이다. 그의 가설적 이론이었던 보편 수학에서, 인간의 진보를 향한 힐베르트의 “새로운” “프로그램”이 떠오르는 것은 당연하다. 이는 수학사적으로뿐만 아니라, 욕망에서 비슷하다. 그들은 자신들의 욕망이 펼쳐질 미래를 꿈꾸고 있는 인간이란 점에서 같다. 그렇기에 데카르트에게 근대 철학의 아버지라는 이름을 붙이는 것은 정당하다. 그는 자신이 가진 수많은 욕망들의 실현을, 이성을 통해 꿈꾸었다는 점에서 최초의 근대 철학자이다. 그는 더 이상 신앙인이 아니다. 그는 근대인이다. 10
- 우리는 데카르트의 여행담을 그저 한 문장의 언급으로 이해해서는 안 된다. 그는 어떤 나라, 어떤 도시에 갔는지 언급하지 않는다. 그는 오직 궁정과 군대만을 언급한다. 그가 궁정과 군대만을 여행 속 토포스로 언급한다는 사실은, 그가 그곳에서 무엇을 느꼈는지에 대한 긴 언급들보다 더욱 많은 정보를 품고 있다. [본문으로]
- 이러한 언급에 대해서 의문을 가질 사람들이 있을 것이다. 우리에게 사진은 사실을 뜻하지 않는다. 포샵사기가 너무나 흔하기에 그 누구도 사진으로 사람의 얼굴을 추측하지 않는다. 하지만 인터넷의 발전으로 변화한 것으로 과거는 이와 달랐다. 이는 우리말 ‘사진’이 진짜를 (비추어서) 옮겨둔 것을 뜻하는 ‘寫眞’을 사용한 것이나, 일상언어학파 학자들이 (오늘날의 시선으로 보면 매우 우스꽝스럽지만) 모조 사진은 사진이 아니라는 주장이 언어 사용의 준칙에 포함된다고 주장했던 것을 보면 쉽게 알 수 있다. 또한 사진이 등장하였을 때, 많은 지식인들이 놀랐던 것은, 자연의 법칙을 통해, 자연이 자연 그 자신을 스스로(자연스럽게) 그려내는 장치를 만들었다는 것에 있다. 사진은 기술이 곧 자연 그 자체라는 “새로운 생각”의 상징이었다. [본문으로]
- 본문에서 언급하지는 않지만, 거울의 이러한 특성은 언어적으로도 명시적으로 남아 있다. 비춘다는 말은 수동적인 것이 아니다. 광원이 내게 있든, 거울이 반사시킨 것이든 빛을 “비추는” 것은 똑같다. 비춘다는 말을 상을 만들어내고, 빛을 뿜는 것 모두에 사용되는 말이며, 이는 거울에게도 그대로 적용되었던 말이다. 이는 서양의 언어에서도 마찬가지이다. [본문으로]
- 이것이 당대에 논쟁이 되는 문제였다. 원리적으로 마음에 품는 이마고가 영혼의 정체성을 이루고, 이에 따라 가치가 결정된다는 것은 스콜라 철학(신비주의든 아니든, 그로테스트와 같이 분류되지 않는 스콜라 학자들을 포함해서) 안에서 광대하게 합의가 되어 있었다. 그리고 이마고들이 위계를 갖는다는 것도 합의가 되어 있었다. 하지만 무엇이 높은 이마고인지, 우리가 그것을 품고 있다는 것의 함의가 무엇인지(이를 알 수 있는가? 이것이 지상 세계에 어떤 권한을 부여하는가? 등의) 따위는 항상 논쟁의 대상이었다. [본문으로]
- 이것 또한 논쟁의 대상이었다. 이마고는 아는 것인가 느끼는 것인가가 스콜라 철학 내의 핵심 논쟁거리 중 하나였다. [본문으로]
- 이는 신학적인 이유로 도입되기 시작했다. 이전까지 주관의 중요성이 강조되긴 했지만, 주관과 객관의 상호성을 통해 구조적 질서를 세운 것은 마이스터 에크하르트 공인 것처럼 보인다. [본문으로]
- 이것은 파노프스키가 <상징형식으로서의 원근법>을 통해 주장한 테제이다. 이러한 주장은 아직 기각되지 않았다. 브리트니어 셰어는 파노프스키의 연구의 세부사항은 비판하지만, 이 관점은 받아들인다. [본문으로]
- 이 표현이 매체를 뜻하는 ‘media’와 “med-”를 갖고 있는 것은 우연이 아니다. 이 단어들은 질서에 대한 공통의 의미에서 파악되었다. 질서와의 일치를, 그리고 질서는 어느 것도 아닌 것이라는 의미에서 같은 어근을 공유하고 있다. 이는 인도-유럽어족에서 공통으로 드러나는 어근이다. [본문으로]
- 이 문제에 대한 데카르트의 뻔뻔함은 다음과 같은 사실을 통해 더욱 잘 밝혀질 수 있다. 그는 죽은 딸 대신에 정교한 자동기계를 만들어 딸 대신 함께 한다. 자칫 잘못하면 우리는 이 일화 속에서 자식의 죽음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그 고통을 반복하며 자식의 빈자리를 확인하는 절망에 빠진 아버지의 얼굴을 상상할 수 있다. 하지만 데카르트의 얼굴은 완벽히 다른 얼굴이다. 그는 프랑켄슈타인 박사의 얼굴, 자신의 앎에 대한 오만 속에서 자신의 창조물이 깨어나길 기다리는 자의 얼굴을 가지고 있었을 것이다. 그는 상실이 아니라, 그것의 진정한 회복을, 예술이 아니라 과학을 통한 죽음의 극복을 꿈꾸고 있었을 것이다. 오르페우스가 예술을 통해 에우리디케를 죽음에서 구하려고 했듯이, 그는 과학을 통해 딸을 죽음에서 구하려고 한 것이다. 그의 앎의 나무는 잃어버린 낙원, 에덴동산으로의 귀환을 그려낸다. 하지만 그 귀환은 신의 선택 덕분이 아니다. 인간의 과학 덕분이다. [본문으로]
- 이런 점에서 라이프니츠가 아르노를 설득하기 위해 꺼낸 수사, 자타공인 ‘데카르트주의자’ 아르노에게, 자신이 제시하는 근거를 데카르트 본인이 본다면, 그 또한 생각을 바꿀 것이라는 수사는 단순히 수사에 그치는 것이 아니었음을 알 수 있다. 라이프니츠는 순진한 구석이 좀 있다. 그는 수사에도 진심을 담는다. 그리고 그의 생각, 데카르트가 자신에게 동의를 할 것이라는 생각은 어느 정도 사실에 부합한다. 데카르트가 기하학의 원리로 선험적 원리를 국한시킨 것은 효율성 때문이었지 그 자체가 어떤 특별한 이유가 있었던 것은 아니다. 다만 데카르트가 기하학의 원리 이상의 것을 받아들일 수 있다고 해서 라이프니츠의 “충족이유율”을 받아들였을지는 의문이다. 그의 충족이유율은 너무나도 거대하다. [본문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