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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신분석이라는 윤리

1.

“Wo Es war, soll Ich werden.”: 나는 그것이 있었던 자리에 가야만 한다. 라깡은 자신의 작업을 단순한 현상 기술로 이해하지 않았다. 브루스 핑크의 지적처럼 라깡의 작업은 윤리적으로 동기화되어 있다. 주체를 재촉하는 일은 하나의 윤리적 명령이기도 하다. 라깡에 따르면 우리는 주체로서 바로 그 자리에 가야만 한다. 하지만 우리는 다음과 같이 질문해야만 한다. “왜 우리가 그래야만 하는?” 하지만 이 질문을 위해서 우리는 다음과 같은 질문 또한 해야만 한다. “도대체 정신분석에서 어떻게 규범이 나올 수 있는가?”

의료 윤리라는 말이 일상화되어있지만, 실제로 의사가 어떤 직업윤리를 따라야만 한다는 주장과 의학 자체로부터 어떠한 규범이 나온다는 주장은 완벽히 다른 말이다. 먼저 두 말을 구별해보자. 의사는 분명히 어떤 직업윤리를 따라야만하며, 자신이 전문가로 행동할 수 있기 위해서 최소한의 윤리를 따라야만 한다. 그것은 환자를 더 낫게 만들어야만 한다는 것이다. 여기서 더 낫게 만들어야만 한다는 것은 이중적이다. 한편으로는 환자 본인이 자신의 상태가 더 나아졌다는 믿음이 가능해야한다는 것이다. 만약 그렇지 않다면, 환자는 돈을 지불하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윤리는 매우 불충분한데, 이것이 기만과 사기를 배제하는 윤리가 아니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두 번째 윤리가 도입되어야만 한다. 여기서 더 나은 상태는 사회적으로 정의되는 것이고, 의사는 환자를 사회적(다른 말로 의학적”)으로 더 나은 상태로 만들어야만 한다. 이것이 의사를 사회적으로 전문가로 만들어주는 윤리이며, 그의 전문가로서의 지위는 바로 이 윤리에 근거해서 보장된다. 따라서 의사가 따르는 최소한의 윤리는 바로 (한편으로는 주관적이고, 다른 한편으로는 사회적인) 이 두 가지 차원에서의 치료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우리가 주목해야할 것은 라깡이 이러한 최소한의 윤리를 얘기하고 있지 않다는 것이다. 오히려 그는 이러한 윤리를 거부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가 정신분석가에게 요구하는 윤리는 환자가 바라는 상태로 만들어선 안 된다고 말한다. 그는 심지어 사회가 개인에게 제공하는 최고의 이상인 행복마저도 허가하지 않는다. 환자가 바라는 것도, 환자가 바랄만한 것인 행복도 아니라면 도대체 무엇이 더 낫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이란 말인가? 라깡의 대답은 주체화이다. 그리고 이 주체화가 주관적인 차원과 사회적인 차원이 아니라는 점에서, 정신분석이 목표하는 치료가 단순히 의사들의 행동규범을 넘어선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라깡은 정신분석가에게 특정한 치료를 요구하는 것을 넘어서, 모든 인간들, 즉 우리 모두에게 다음과 같이 요구하는 것이다. 우리는 그것이 있던 자리에 가야만 한다. 결국 정신분석의 윤리는 정신분석을 넘어서서 우리 인간의 윤리이기도 하다. , 정신분석의 윤리는 다른 말로 정신분석이라는 이름의 윤리인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여기서부터 물음을 시작해야한다. 도대체 어떻게 특정한 학문이 인간의 윤리가 될 수 있냐고.

당연히도 의학은 인간의 윤리가 아니다. 물론 의학 또한 특정한 규범성을 함축한다. 앞서 언급했듯이 의사는 자신의 전문가로서의 사회적 지위를 유지하기 위해서 의학적 한계를 벗어나선 안 된다. 하지만 이러한 윤리는 전적으로 가언적이다. 그것은 치료를 욕망하는 인간이 추구하는 목표와 치료를 시행하는 인간이 추구하는 목표가 일치할 때만 성립한다. 의학적인 의미에서의 건강은, 건강 그 자체가 아니며, 이를 거부하는 인간은 전적으로 의학적 규범에서 벗어날 수 있다. 하지만 지금 라깡이 요구하는 정신분석의 윤리는, 그것이 하나의 학문, , 의학과 같은 의미에서의 학문을 넘어서서, 정언적인 명령이다. 그렇다면, 정신분석은 하나의 윤리형이상학적 기획일 수밖에 없으며, 그것이 토대하고 있는 형이상학을 우리는 살펴보아야만 한다. 정신분석의 윤리는 하나의 철학적 기획이며, 이는 철학사적 관점에서 분석될 필요가 있다

 

2.

정신분석의 특징 중 하나는 그것이 욕망으로부터 출발을 한다는 것이다. 정신분석에 대한 대부분의 의문은 바로 이 출발점에서부터 비롯된다. 왜 성욕인가? 이성이 아니라 욕망으로부터 출발하는 정신분석의 전제가, 단순히 욕망의 변증법과 다르다는 것을 지적할 필요가 있다. 정신분석은 동물로부터 인간으로의 이행, 본성으로부터 규범으로의 이행, 자연상태로부터 사회상태로의 이행, 야만으로부터 문명으로의 이행을 정당화하기 위한 변증법적 시도가 아니다. 정신분석이 욕망에서 출발하는 이유, 혹은 철학이 이성이라는 출발점으로부터 욕망으로 전회를 시도한 이유는 오히려 이러한 변증법을 극복하려는 시도로 이해되어야만 한다. 욕망의 변증법은 궁극적으로 욕망으로부터 출발하는 것이 아니라 이성으로부터 출발한다. 자연상태로부터 사회상태로의 이행에서 절대적으로 확인되는 것은 현재의 현존하는 사회상태이다. 자연상태는 순전히 이론적으로 제기되는 반드시 존재해야만 했던 과거로서 상상되는 것에 불과하다. 때문에 욕망의 변증법은 마치 욕망으로부터 출발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이성으로부터 출발을 그리는 것이다. 오히려 욕망은 이성을 통해 추측되는 것이다. 이는 이미 이성의 능력을 전제하고 의식으로부터 무의식을 추측함으로써 무의식의 의식화를 추측하는 시도에 불과하다. 이러한 시도의 문제는 그것이 자연으로부터 사회의 이행을, 욕망으로부터 이성으로의 이행을 설명하지 못한다는 것에 있지 않다. 오히려 이러한 시도의 가장 큰 아이러니는 바로 욕망과 이성이라는 양자가 어째서 존재하는지를 설명하지 못하는 데에 있다. 양자의 존재를 설명하기 위해서는 왜 욕망인가?”를 묻기 위해, 우리는 궁극적으로 왜 이성이었는가?” 또한 물을 필요가 있다.

이성으로부터의 출발은 왜 필요했던 것일까? 이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칸트로부터 출발할 필요가 있다. 칸트의 통각의 종합은 두 가지 순환으로 이루어져있다. 한편으론, 초월론적 종합, 즉 통각이라는 능력이 위치한다. 다른 한편으로는 초월론적 종합을 수행하는 초월론적 주체가 위치한다. 초월론적 종합을 위해서는 초월론적 주체가 필요하고, 초월론적 주체가 초월론적 주체이기 위해서는 초월론적 종합이 필요하다. 흔히 알려진 이러한 순환논법은 전혀 악순환을 일으키지 않는다는 것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초월론적 종합과 초월론적 주체의 순환은 사실 칸트 철학을 가능케 하는 근본적인 원동력이며, 실질적인 순환이다. 한편으로 초월론적 종합은 바로 사유, 보편성의 영역의 가리킨다. 여기서 인간은 사유하는 것으로서 등장할 수 있다. 다른 한편으로 초월론적 주체는 바로 그러한 사유가 구체적인 존재로부터 실현됨을 가리킨다. 여기서 인간은 사유를 수행하는 존재하는 것으로서 등장한다. 즉 초월론적 종합과 초월론적 주체는 한편으로는 사유를, 다른 한편으로는 존재를 담보하는 형이상학적 기교인 것이다. 때문에 이들의 순환은 한편으로는 사유의 존재화, 즉 보편성이 개별적인 것으로 육화(Incarnation)하는 것을, 다른 한편으로는 존재의 사유화, 즉 개별적인 것들이 보편의 영역으로 승천(Ascension)하는 것을 보여준다. 이 과정에서 개별과 보편은 종합될 수 있고, 변증법이라는 마술이 등장할 수 있게 된다. 즉 사유와 존재 사이의 간극, 보편과 개별 사이의 간극이 있기에, 인간이라는 구체적 존재자가 보편과 상호작용하며, 자신이 가진 육체적 능력을 이성의 사용으로써 그려낼 수 있게 되는 것이다. 바로 이 간극 속에서 인간은 상상력과 지성(Verstand)”일치시킬 수 있는 자유를 누리며, 이 간극 속에서 사유도 존재도 아니면서도 이들을 매개하는 미적 유희를 누릴 수 있게 되는 것이다. 궁극적으로 초월론적 종합과 초월론적 주체의 순환은 서로가 가진 간극을 통해 가능한 것들의 현실화하고, 현실적인 것들을 이성적인 것으로 만드는 지적 유희를 가능케 하는 끊임없는 유출(emanation)의 원천인 것이다. 유출이라는 역동적 활동은, 바로 두 간극에서 비롯될 수 있는 낙차와, 그것들이 만드는 순환의 힘으로부터 가능해지는 것이다. 따라서 칸트의 첫 번째 순환은 문제가 없을 뿐만 아니라, 단순히 정당한 앎의 기원을 추구하는 토대론적 작업 이상의 이념이 숨겨져 있다. 칸트는 엄밀한 학문(exact science)의 토대를 구축하려는 것이 아니라, 모든 지적 작업이 가능해지는 역동성이 발생하는 지점을 보여주려 한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칸트의 이 정당한 순환은 따라서 매우 합리적일 뿐만 아니라 실용적이기까지 하다. 결국 칸트가 보이려는 것은 한계가 아니라 우리가 제한적인 한계들을 넘어설 수 있는 가능성이었기 때문이다. 니체는 도대체 왜 이러한 테제에 반대한 것일까? 니체는 칸트가 선험적 종합판단을 선험적 종합판단 능력을 도입해 가능케 만들었다고 비판한다. 그런데 칸트가 보인 것처럼 경험이 가능하기 위해서는 분명히 초월론적 종합은 이루어져야만 하는 것 아닌가? 니체가 공략하는 지점은 그러한 종합의 원천이 무엇이냐에 있다. 칸트의 초월론적 종합이 부리는 마술은 바로 서로 상이한 관념들을 하나로 엮어내는 것에 있다. 관념들은 상이하다. 개별적 관념들은 절대로 하나의 개념을 이루지 못한다. 개별적 관념들은 상이하고 개별적인 반면, 개념은 무한하고 단일하기 때문이다. 관념과 개념의 간극이 가진 문제 때문에, 관념들은 경험되기 위해서라도 초월론적 종합을 거쳐야만 한다. 상이성만으로는 단일성을 지닐 수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초월론적 종합은 바로 상이한 것들은 단일한 것으로 만드는 힘에 기초한다. 하지만 우리는 라이프니츠의 지적을 진지하게 받아들일 필요가 있다. 상이한 것은 상이한 것인 한 종합될 수 없다는 그의 지적 말이다. 상이한 것들이 상이한 것인 한 종합될 수 없다는 것은 자명한 논리이다. 때문에 초월론적 종합은 둘 중 하나를 선택해야만 한다. 바로 상이한 것들이 실제로 상이하지 않거나, 초월론적 종합이 논리를 넘어서는 것이라는 것 중 하나를 말이다. 하지만 실제로는 어느 쪽을 선택하여도 귀결은 하나이다: 초월론적 종합과 초월론적 주체의 순환 이전의 근본적인 힘이 존재한다. 니체는 여기서 시작한다. 관념들은 상이한 것으로서 종합을 기다리는 순진한 존재자들이 아니다. 그것들은 서로가 서로를 집어 삼키며 확장하는 들이다. 그리고 바로 이것들이 초월론적 종합을 가능케 했던 근본 근거였다. 초월론적 종합은 수동적이기만 한 상이한 것들을 자신의 힘으로 종합해낸 것이 아니다. 설사 초월론적 종합이 능동성을 가진 것일지라도, 그것이 종합하는 대상들이 수동적인 것만은 아니다. 그것들은 (논리적으로) 그 자체로 묶일 수 있었어야만하며, 바로 그 이유에서 그것들은 단순히 상이한 관념들이어서는 안 된다. 결국 초월론적 종합이라는 능력은, 관념들이 서로 뭉칠 수 있기에 가능한 것이지, 초월론적 종합이라는 능력이 관념들을 서로 뭉칠 수 있게 만든 것이 아니다. , 초월론적 종합은 원인이 아니라 결과이다. 니체가 지적하듯 원인과 결과를 혼동하는 순간부터 초월이란 이상이 침투하는 법이다.

그렇다면 대안은 무엇인가? 관념들에 대한 재인식이다. 관념들을 수동적이고 상이하기만 한 정적인 대상들로 보지 않는 것이다. 새로운 관점은 관념들을 그저 수동적이기만 하고 상이성을 통해서 존재하기만 하는 정적인 것이 아니라, 능동적이고 교통 가능한 동적인 것으로 변화시킨다. 이러한 힘들은 그 자체로 서로 작용할 수 있으며, 자신의 확대를 의지하기에, 다른 힘들을 제압하며 복속시킨다. 수많은 힘들은 근본적으로 넘치는 것들이며, 자신들의 증대를 추구한다는 점에서 방향 지어져있다. 이러한 방향이 있기에 그것들은 상이하기만 한 것들이 아니라 상이함에도 서로를 복속시키고, 복속되는 방식으로 작용될 수 있는 것이다. 서로를 복속시키고, 복속되기도 하는 것. 이것들은 힘들의 구조화를 의미한다. 힘들은 그것들이 상이하고 수동적으로 그냥 존재하는 것들이 아니라, 끊임없이 능동적으로 서로를 지배하고 복속시키려고 한다. 상이한 것들이 이러한 방식으로 통합됨에 따라 구조라는 것들이 가능해진다. 구조로 인해 움직임이 가능해지는 것이 아니라, 힘들이 스스로의 증대를 위해 다른 힘들을 복속시킴에 따라 구조가 창발하는(emerge) 것이다. 이러한 힘들이 결국 초월론적 종합과 초월론적 주체의 동근원적 기원이며, 역동성은 두 항의 순환에서 비롯되는 것이 아니라, 바로 그 자체로부터 비롯되는 것이다. 힘은 그 자체로 넘치는 것이며, 순환의 이미지를 거치지 않아도 그 자체로부터 창조는 시작된다. 욕망은 바로 이성과 감성 이전에 존재하면서 그것들을 가능케 하는 근원이다. 방향 지어진 힘들, 지배를 갈망하는 탐욕스러운 힘들이 바로 욕망이기 때문이다. 이를 받아들일 경우, 우리는 이성에서 출발하여, 욕망과 이성을 연결하는 적당한 변증법으로부터 벗어날 수밖에 없다. 문제는 욕망들 그 자체며, 그것들의 형식이지, 개중 하나에 불과한 이성이 아니기 때문이다. 오히려 이성도 하나의 구조로서 탐구될 뿐이다. 비밀은 이성의 내용이 아니라 구조이며, 우리는 욕망 자체의 수많은 구조들을 유형별로 탐구하게 된다. 결국 코기토적 탐구의 극한은 코기토의 붕괴이며, 이는 사유와 존재의 간극을 이용한 신비로운 마술로부터의 탈주술화이며, 욕망의 논리학이라는 새로운 비판적 토대가 된다. 그렇기에 우리는 이제 의식으로부터 무의식으로의 전회를, 이성으로부터 욕망으로의 전회를 말할 수 있다.

 

3.

이제 우리는 시작점을 찾았다. 욕망이다. 그리고 욕망들이 구조화되는 것까지를 볼 수 있게 되었다. 하지만 아직까지 우리는 규범을 발견하지 못하였다. 규범은 어디서 나오는가? 규범은 법칙으로부터 나온다. 하지만 역설적이게도 규범은 자연학적인 법칙과 다르게 그것의 위반으로부터 그 힘이 나올 수 있다. 규칙과 위반은 욕망들과 그것들이 만들어내는 구조 속에서 어떻게 드러나는가? 욕망이 구조화되더라도, 이는 영원한 동일성을 부여받는 목적론적 피라미드의 구조와는 다르다. 욕망들은 자신들의 증대를 위하여 다른 것들을 복속시키면서 구조화되는 것이기에 구조는 일시적인 것에 불과하다. 하지만 구조는 순간적으로 등장하고 소멸하는 것이 아니기에, 상대적으로 지속적인 단계와 단절과 도약의 단계로 구별되어 바라볼 수 있다. 이 상대적으로 지속적인 단계에서 우리는 규범이 등장하는 것을 발견할 수 있다. 규범은 이 지속적인 단계의 동적평형상태에서 비롯되는 안정성에서 비롯된다. 상대적으로 지속적인 단계에서 욕망의 구조는 안정적인 법이고, 욕망은 이를 유지하고 보존하는 것에 그것의 힘이 집중된다. 이에 따라 구조와 욕망은 두 갈래로 나눠지는데, 한편으로는 현실원리가 다른 한편으로는 쾌락원칙이 자리 잡은 상태로, 이들 사이의 적당한 균형 속에서 쾌락충족이라는 사실이 가능하게 된다. 규범은 바로 이 적당한 타협의 양측 사이를 오가면서 발생한다. 쾌락은 쾌락원칙과 현실원리 사이에서의 타협 속에서 솟구치는 것이기에, 항상 위반과 순응 사이에서 충족되는 법이다. 따라서 규범이란 기본적으로 쾌락원칙과 현실원리 사이에서의 타협 속에서 등장하며, 바로 이러한 타협의 원리가 될 수 있는 형식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규범은 현실원리와 쾌락원칙의 타협을 가능케 하는 원리가 될 수 있는 형식이다. 그렇다면 행복이라는 규범은 무엇인가? 행복이라는 규범은 바로 개인과 사회의 일치를 의미한다. 여기서 사회는 단순히 특수한 인간들의 집합과 그 사이에서 발생하는 관계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이는 인류로 상정되는 인간들의 총체가 만들어내는 질서를 의미한다. 개인과 사회의 일치란 그렇기에 개인의 모든 욕구와 능력이 완벽하게 사회로 표상되는 질서와 조화를 이루는 것을 의미한다. 이는 개인의 내적 가치 판단과 외적 가치 판단이 완벽하게 일치되는 현상이다. 따라서 행복이라는 규범은 바로 이러한 질서를 이루는 것을 최고의 가치로 두는 것을, 그것만이 인간이 가질 수 있는 유일하면서도 최고 심급의(, 주권적인) 규범으로 받아들이는 것을 말한다. 행복이라는 규범은 도달함으로써 따르는 것이 아니라, 바로 그러한 이념을 추구하고 지속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이러한 행복은 복잡한 사회일수록 달성하기 어렵지만, 원리적으로 불가능한 것은 아니다. 운과 재능, 사회적 여건이 도울 때, 우리는 행복한 인간을 실제로도 볼 수 있다. 그리고 행복이라는 규범은 행복의 상태에 놓여있는 것을 의미하지 않기 때문에, 수많은 행복에 도달하지 못한 패배자들을 양산할지라도, 충분히 추구될 수 있는 것이다. 심지어 사회는 항상 행복을 요구한다. 그것은 인간을 개인들로 축소시킨 후 복종시키는 전략이며, 행복이라는 규범을 내재화함으로써 인간은 사회에 흡수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문제는 바로 여기서 발생한다.

라깡이 행복을 거부하는 것은 바로 행복이라는 규범이 인간을 사회에 흡수시키는 사태가 문제적이기 때문이다. 이것이 라깡은 단순히 특정한 가치에 의거해 사회에의 흡수를 비난하는 것이 아니다. 인간이 사회에 흡수된다는 사태가 인간의 존엄성을 훼손시킨다거나 사회화가 일종의 폭력이라는 것은 문제가 되지 않는다. 라깡이 지적하는 문제는 바로 원리적인 모순에 놓여있다. 행복이라는 규범은 절대적인 사회화를 요구한다. 절대적인 사회화는 개인의 사회로의 완벽한 흡수이다. 이는 현실적으로 가능하지만, 원리적인 모순을 발생시킨다. 왜냐하면 완벽한 사회하는 결국 현실원리와 쾌락원칙의 간극을 소멸시키기 때문이다. 앞서 언급했듯이 규범은 현실원리와 쾌락원칙의 간극으로부터 발생할 수 있다. 이 간극 속에서 타협이 이뤄지고, 타협으로부터 쾌락은 발생한다. 그런데 바로 이 양 항이 존재하기에 때로는 위반이 때로는 순응이 가능해지면서 규범은 역동성과 함께 규범성을, , 무엇인가가 요구되고 있다는 것이 의미할 수 있게 만드는 것이다. 그런데 행복이라는 규범은 바로 이 간극을 철폐시킨다. 그것은 탐욕스럽게 현실원리의 완벽한 승리를 요구하며, 쾌락원칙의 절대적인 현실원리로의 편입을 명령한다. 하지만 이는 달성될 수 없는 요구인데, 이것이 달성되는 동안 거기에는 어떠한 간극도 어떠한 요구도 존재할 수 없게 되기 때문이다. 그것은 도달된 순간에 그 자신의 규범성을 잃는다. 왜냐하면 규범이 가능했던 것은 바로 간극 속에서 욕망이라는 힘이 자신의 힘을 발산할 기회를 누리는 데에 있었기 때문이다. 행복이라는 규범의 승리는 이러한 욕망의 힘을 단순한 운동으로 만들어 버린다. 그것은 동역학을 데카르트적 운동학으로 변형시키려는 시도이며, 개별적 힘들은 오직 기하학적 원리로 환원시키려는 시도와 같다. 행복이라는 규범은 규범을 가능케 하는 개별적 존재의 고유함을 철폐시킴으로써만 실현되는 것이다.

이를 조금 더 윤리학적인 용어로 변형시켜보자. 규범성은 자율에서만 성립할 수 있다. 그런데 자율은 자아의 이중화를 통해서만 성립할 수 있다. 즉 규칙을 제정하는 자아와 규칙을 따르는 자아 사이의 간극을 통해서만 성립할 수 있다. 이 둘의 간극이 없어지면, 자율은 무규범이 되거나, 완전한 자동기계과 되어버린다. 따라서 자율은 그것의 규범성을 위한 자아를 끊임없이 둘로 나눔과 동시에, 이를 통합할 것으로 요구한다. 바로 이 나눔과 통합에서 행위가 등장할 수 있게 된다. 행위는 필연에 의한 자동기계의 움직임과, 보편을 통해 내려오는 법률 사이에서만 가능해진다. 그리고 이러한 행위는 통합을 통해 단 하나의 점에 귀속된다. 이것이 바로 주체이다. 그러므로 규범은 규범성을 필요로 하고, 규범성은 자율에서만 성립할 수 있고, 자율은 행위를 통해서만 실현되고, 행위는 주체를 통해서만 수행될 수 있다. 결국 규범은 주체를 요구하는 것이다. 규범은 돌멩이가 아니라, 행위자로서의 인간에게만 적용되는 것이며, 그것은 인간이 주체이기 때문에 요구될 수 있는 것이다. 하지만 행복이라는 규범은 바로 욕망을 완벽히 사회적 가치와 일치시킴으로써 위반 자체를 욕망할 수 없는 방식으로 거세함으로써 도달된다. 그런데 위반 자체가 불가능해지면 결국 행위는 운동으로 전락하고, 주체는 돌멩이와 다름없게 된다. 행복이라는 규범이 만들어 내는 역설은 바로 여기에서 비롯된다. 그것은 규범임과 동시에 규범이 만들어내는 고유한 힘인 규범성을 절단시켜버리는 것이다. 그것은 그렇기에 규범일 수 없다. 규범이길 거부하는 규범이기 때문이다. 라깡은 바로 여기서 행복이라는 규범과 스스로를 단절하는 것이다. 무엇인가를 요구하기 위해서 그것은 규범이어야만 한다. 그런데 행복은 규범이길 거부하는 규범이기에 진정한 규범, 즉 윤리가 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도대체 어쩌자는 것인가? 바로 여기에 대한 답이 라깡의 승화 개념 속에 숨겨져 있다. 승화는 제도화된 위반이다. 그렇다. 앞서 언급했듯이, 규범은 현실원리와 쾌락원칙의 타협을 가능케 하는 원리가 될 수 있는 형식이다. 여기서 승화가 갖고 있는 제도적 성격은, 규범이 갖는 형식으로서의 조건 때문에 요구된 것이다. 다른 한편으로 위반이라는 조건은 바로 규범이 전제하고 있는 두 간극, 즉 위반 가능성을 보장하기 위한 방편이다. 라깡이 승화를 도입한 것은 바로 규범을 가능케 하는 오직 승화뿐이기 때문이었던 것이다. 이를 고려해보면 라깡이 정신분석을 윤리적 요구로서 이해하는 것은 아주 당연한 귀결이다. 가능한 윤리는 오직 승화의 논리를 통해서만 성립할 수 있는데, 승화를 말하는 유일한 윤리가 바로 정신분석이기 때문이다. 즉 정신분석은 윤리적일 수밖에 없으며, 가능한 윤리는 오직 정신분석밖에 없다. 따라서 라깡의 작업이 윤리적으로 동기화되어 있다는 브루스 핑크의 진술은 오해의 여지가 있다. 정신분석학은 애초에 윤리학 그 자체이기 때문이다. 라깡이 발견한 것은 유일하게 가능한 하나의 윤리였지, 윤리와 동기화되는 불필요한 가교(假橋)가 아니었다. “네 욕망과 관련해 양보하지 말라는 라깡의 유명한 금언은, 바로 이런 점에서 유일하게 가능한 하나의 금언이기도 했던 것이다. 욕망과 관련해 양보하지 않을 때, 바로 그 때에만 규범은 작동한다. 그렇기에 우리는 복종하는 동물이 아니라 위반하는 주체가 되어야만 한다. 가능한 정언명령은 하나 뿐이다. 네 욕망과 관련해 양보하지 말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