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술은 아무것도 아닌 것을, 무를, 죽음을 그 자체로 바라보는 것이다. 예술의 역사가 인류 문명의 역사임에도 우리는 아직까지도 아무것도 아닌 것을 바라보지 못했다!
죽음으로서의 예술, 두번째 죽음 충동으로서의 예술, 그것이 병적인 것임에도, 그것은 아름답고 매혹적이다. 삶에 지친 영혼은 언제나 다른 곳을, 다른 것을, 다른 삶을 꿈꾸는 법이니까! 오르페우스 신화, 예수의 부활, 그것들이 가진 마법적 유혹의 원천은 바로 여기에 있다. 그것이 설혹 실패로 끝나더라도, 죽음마저도 감동시키는 예술과 사랑의 힘에 대한 신화적 호소는 앞으로도 영원히 병든 영혼들의 자유로움을 사로잡을 것이다.
하지만 여기에 그 유혹을 넘어선 병든 영혼이 있다.
니체의 노래를 들어보자.
“금욕적 사제, 그는, 다르게 되고 싶고, 다른 곳에 있고 싶다는 소망의 육화이다. 그러나 바로 그 소망의 힘이야말로 그를 여기에 붙들어 매는 족쇄이다.
금욕적 사제, 겉보기에 삶의 적으로 보이는 이 사람, 이 부정하는 자, 바로 그는 삶을 보존하는 아주 큰 힘과 긍정하는 힘에 속한다.
인간은 이제 걸핏하면 싫증이 나게 되었다. 이러한 실증은 1348년 무렵의 죽음의 무도처럼 모두에게 번지는 유행병이기도 하다. 그러나 이러한 혐오, 이러한 피로, 자기 자신에 대한 불쾌감마저도, 그에게서 너무나도 강력하게 나타나기에, 그것은 곧장 새로운 족쇄가 되고 만다.
파괴, 특히 자기 파괴의 대가인 인간이 자기자신에게 상처 입힐지라도, 훗날 그로 하여금 삶을 숨쉬도록 강제하는 것은 바로 그 상처이다......”
블로그 명을 바꿀까 하는 생각이 든다. 과거에는 옳고 그름을 외치며, 올바름의 기준을 선언하곤 했다. 하지만 이제는 기쁨을 노래하고 싶다. 죽음을 들여다보기보다는, 죽음을 들여다보고 싶게 만드는 삶을 바라보고 싶으니까. 나쁜 눈초리로만 바라보아 온 나 자신을 있는 그대로 바라보고 싶으니까. 누군가가 노래했듯이 무릇 삶은 숨쉬는 것이다.
“삶을 숨쉬어요, 나의 레스비아, 그리고 사랑을 나눠요.
근엄하신 노인네들의 험담에는
한푼의 가치를 매겨버려요.
태양은 저물어도 다시 뜨겠지만,
짧은 빛이 지고 나면
우리는 영원한 밤을 지새워야할 할테니.
천 번을 키스 나누고 백 번을 나누고
다시 천 번을 나누고 다시 백 번을 나누고
다시 또 천 번을 나누고 다시 또 백 번을 나누고.
그렇게 수천을 세고 난 다음엔
우리도 모르게 한껏 뒤섞어버려요,
어느 못된 인간도 질투할 수 없도록.
우리가 몇 번의 키스를 나눴는지 모르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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